소설리스트

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8)화 (8/90)

<제8화>

“지금 나보고 이걸 착용하라고요?”

테이블 위에 생겨난 건 다름 아닌 모노클과 무선 이어폰이었다.

무선 이어폰은 처음 보는 거지만 모노클은 아니었다. 하이레가 착용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

설마.

“설마 시스템 운영자들은 모노클을 써야 하나요?”

일반 안경도 아니고 모노클을?

왜?

모노클에 유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착용하면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알 뿐.

하이레 정도의 미인이나 되어야 그나마 덜 우스운 건데.

이하늘이 극도로 혐오하며 뒷걸음치자 레바브가 다급하게 변명했다.

〔엊ㅈ러 ㅅ가 엊절 수가 업서!〕

〔모놐를 → 만히 볼 수 잇음〕

〔이어폰 → 만히 들을 수 잇ㅇ!〕

많이 보고 듣는 거랑 시스템 운영자랑 무슨 상관인데?

이하늘의 표정이 더 썩어가자 레바브가 강수를 두었다.

〔이걸 착욜해야/11! 사람드를 구할스ᅟᅮ잇아〕

뭐?

〔우리 직원들 잘목ㅈ대면 클나요 ㅠㅠ 도우ㅏ즈세여〕

24년을 살면서 이하늘은 한 번도 이런 경우를 맞닥뜨린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게, 이하늘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속물적이며 적당히 분노한다.

헌터 시대가 도래했지만, 헌터도 아니고 하물며 헌터에 관심도 없다.

그런 사람이 도와달라는 말을, 네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보았겠는가?

아니, 한 번도 없다.

“아, 젠장…….”

그래서 이하늘은 약했다. 약한 소리를 하는 상대에게 면역력이 없었고 매몰차게 무시할 성정도 안 됐다.

약한 이에게는 한없이 무르고 여린 사람.

그것이 이하늘이었다.

“어차피 제가 도울 수 있다면 도울 거였어요. 모노클을 착용해야만 가능할 줄은 몰랐던 것뿐이고…….”

이하늘이 중얼거리며 뺨을 문질렀다. 모노클을 착용해야 하는 게 어지간히 부끄러운지 그녀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웬만한 악조건이 아닌 이상 어차피 계약할 생각이었으니까…….”

이하늘의 시선이 아직 중간밖에 못 읽은 근로계약서에 닿았다.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계약하기 전에 근무하는 것. 남들은 멍청하게 보겠지만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사람 목숨이 달린 건데. 안 그래요?”

레바브의 반응이 이번만큼은 빨랐다.

〔마자!〕

º º º

“하아.”

널찍한 원형의 공간. 곡면의 벽에 붙어 있는 기다란 사무용 책상 뒤, 넓은 1인용 책상이 있다.

그 자리의 주인 하이레는 한숨을 쉬었다.

손가락은 타이핑을 하느라 바쁘고, 귀는 아까부터 시끄럽게 구는 ‘위대한 것’들 때문에 따가우며, 눈은 방대하게 쏟아지는 일거리와 게이트에 휘말린 직원들의 채팅에 피로하다.

아무리 하이레라 해도 이 상황은 정말이지 마다하고 싶었다.

직원이 없는 점심시간에 게이트가 발생하는 것?

아무래도 좋다.

그 정도는 혼자서도 순조롭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다들 휘말리다니.’

문제는 시스템 운영자들이다.

10년이나 함께해 온, 가족이나 다름없는 시스템 운영자들이 식후 커피를 마시다 말고 게이트에 휘말렸다. 그것도 네 명이나.

‘등급이 E급. 보통이라면 상시 대기 중인 공략대가 배치되겠지만 까다로운 유형에 시간이 촉박하니 아마.’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헌터가 있다. 하이레가 또 한숨을 쉬었다.

‘우리 직원 중 한 명이라도 그 헌터 눈을 피해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사실 시스템 운영자가 게이트에 휘말리는 것 자체는 이번이 처음은 아녔다. 이렇게 한꺼번에 빨려 들어간 건 처음이지만.

어쨌거나 나름 이런 일에 익숙한 시스템 운영자에겐 웬만하면 지키려는 규칙이 하나 있다.

바로.

‘게이트에 휘말리면 헌터에게 잡히지 말자!’

이런 규칙이 생기게 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때는 시스템 운영자가 퇴근하던 중 최초로 게이트에 휘말린 날.

헌터가 게이트를 무사히 닫아 살아 돌아왔더니 관리국에서 피해자 신원을 파악하기 위함이라며 인적 사항을 받아 가겠다 하였다.

당시 며칠 만에 퇴근했다가 게이트에 말려들었던 시스템 운영자는 절실히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싶었고, 그 결과 술술 자신의 정보를 뱉었더란다.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아는가?

그대로 14일 동안 격리되어 안정을 취하는 복지를 누렸다.

그 말은 무엇이냐. 그 한 명이 14일씩이나 격리됐을 동안, 다른 시스템 운영자가 그만큼 개고생을 했다는 의미다.

게이트에 휘말린 피해자를 위해 나라에서 준비한 복지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스템 운영자들은 그걸 즐기면 안 되었다.

그러한데 오늘 게이트에 끌려 들어간 인원은 무려 네 명.

‘네 명씩이나 동시에 14일 동안 격리되면…….’

야간 조 다섯 명과 대표 두 명이라는 적은 인원이 14일 동안 퇴근도 못 하고 야근하는 미래가 그려졌다.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비록 지금까지 관리국과 헌터의 눈을 피해 빠져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살아 돌아오는 게 먼저지.’

하이레가 미간을 좁힐 때, 뒤쪽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일이 좀 잘못됐네. 야간 조 부를까?”

이세현이었다.

하이레는 이 여자가 이하늘 씨는 어쩌고 여기에 왔나 싶었지만 일단 대꾸했다.

“여명이 호출했어. 다른 사람들은 아직 자고 있는지 답이 없다.”

“여명이? 허어, 오늘 며칠 만에 퇴근한 거였잖아. 욕 좀 하겠는걸.”

하이레가 동의의 의미로 침묵했다.

어느새 모노클을 착용한 이세현은 벽에 붙은 책상으로 향했다.

총 다섯 자리. 그녀는 그중 한 자리에 임의로 앉았다.

“직원들은 내가 맡을 테니까 하 대표가 나머지 맡아.”

“후우, 헌터에게 잡혀도 괜찮으니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전해.”

“그걸 누가 몰라. 걱정 붙들어 매시죠.”

이세현이 커다란 화면 구석에 무언가를 띄웠다.

웬 채팅 창이었다.

시솝 커뮤니티(SYSOP Community)

> 서버 | 대한민국

> 그룹 | 주간조방(6명)

/그룹명이 변경됩니다./

/주간조방 → 망한주간조방/

> 그룹 | 망한주간조방(6명)

[ 9 ] 돈많은백수가꿈 : 죄송해서 어떡해요ㅠㅠ

[ 2 ] 소문만복래 : ㅠㅠㅠㅠㅠㅠ

[ 9 ] 돈많은백수가꿈 : 저희 진짜로 커피만 마시고 들어가려고 했거든요

[ 9 ] 돈많은백수가꿈 : 그런데 게이트가 열릴 줄은;;;;;;

[ 2 ] 소문만복래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3 ] 닉넴결정귀찮 : 여기서라도 간이 시스템 열어서 작업할까요?

[ 2 ] 소문만복래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3 ] 닉넴결정귀찮 : 아 좀!!!

[ 3 ] 닉넴결정귀찮 : 닉값해 진짜 왜 저래

[ 2 ] 소문만복래 : 그렇지마뉴ㅠㅠㅠㅠㅠㅠㅠ

[ 2 ] 소문만복래 : 나만 혼자잖아!!!!!

[ 2 ] 소문만복래 : 다들 붙어 있는데 나만 혼자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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