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여자가 말을 걸었다. ‘닉넴결정귀찮’은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저 헌터, 최가영 헌터보다 속도가 느리니 따돌릴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힘내란다.
저 헌터가 일부러 속도에 맞춰 쫓아오는 악취미를 가졌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신입인가?’
신입이 벌써 채널 접속을 했다는 사실이 영 충격적이었다.
역으로 생각하면, 신입이 채널에 접속해야 할 정도로 인력이 부족하다는 의미.
물론 신입이 채접한 이유는 레바브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였기 때문이었지만 ‘닉넴결정귀찮’은 거기까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닉넴결정귀찮’은 이 신입의 정성을 봐서라도 힘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신입의 힘내라는 어쭙잖은 응원이 통했다는 뜻이다.
‘그래, ×이이이발. 발악해 보자!’
있는 줄도 몰랐던 안간힘을 쥐어짜 낸 ‘닉넴결정귀찮’이 막판 스퍼트를 올렸다.
그 순간, ‘닉넴결정귀찮’이 옹기종기 모여서 헌터의 구조를 기다리던 민간인들을 지나쳤다.
“헌터가 멈췄어요!”
신입이 외쳤다.
멈출 수밖에. 아무리 악취미를 가진 헌터라 해도 민간인 구조를 우선으로 여긴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도망가는 민간인이 아닌 얌전한 민간인들을 먼저 구조하겠지.
덕분에 헌터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아직 일렀다.
희생된 ‘내가왜’와 ‘돈많은백수가꿈’을 안전 구역에 넣고 나서도 가뿐히 쫓아왔던 헌터였으므로.
“저기서 꺾을까요?”
신입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멀지 않은 거리에 코너가 있었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닉넴결정귀찮’은 바로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멈췄다.
저 멀리 앞에, 몬스터가 있었다.
거대한 몸통의 늑대형 몬스터.
투명화된 모노클이 그 몬스터가 이 게이트의 보스란 걸 알려주었다. 더불어 E급이라는 사실도.
‘아, 신이시여.’
다른 것도 아니고 대빵이 왜 이런 곳에 있는가?
E급이면 보스라도 하급에 속했으나 문제는 본인이 헌터가 아니고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시스템 운영자라는 점이었다.
“몬스터가 있다고 왜 말 안 해줬어요! 알고 계셨으면서!”
용케 보스 몬스터를 보고도 비명을 지르지 않은 신입이 무려 성신에게 따졌다.
【안 물어봤잖느냐.〗
돌아오는 성신의 대답이 어처구니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곧 이럴 때가 아닌 것을 깨닫고 숨을 죽였다. 아직 보스 몬스터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으니 ‘닉넴결정귀찮’은 조용히 뒷걸음질해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헌터에게 쫓겨 오랜 시간 동안 달렸고,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털썩.
본의 아니게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졌다는 의미다.
그 소리를 놓치지 않은 보스 몹이 덩치에 맞지 않게 매끄러운 몸짓으로 뒤를 돌았다.
쿵, 하고 땅이 울렸다.
‘아, × 됐다.’
시스템 운영자 ‘닉넴결정귀찮’이 태평하게 욕설을 중얼거린 찰나.
그녀의 앞을 누군가가 휙 막았다.
신입이었다.
하얗게 보일 정도로 탈색한 머리를 자랑하는 신입 말이다.
“운영자님, 피해요!”
보스 몬스터를 막겠다는 듯이 두 팔을 벌려 외치는 신입. 어차피 채널에 접속한 거기 때문에 막으려도 막을 수가 없을 텐데.
우스웠으나 꽤나 고맙고, 또 깜찍한 행동이었다.
쿵쿵, 거대한 늑대가 ‘닉넴결정귀찮’을 향해 돌진했다. 거리가 아직 있는데도 썩은 내가 진동했다.
신입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포악한 몬스터만 보다가, 바보처럼 양팔을 벌린 채로 굳어 있었다.
꿈결처럼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었을 때.
파지직, 콰광―!
굉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º º º
콱 감은 눈꺼풀 너머로 눈부신 빛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게 의아해 눈을 떴던 이하늘은 윽, 하며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나뭇가지처럼 뻗은 새하얀 빛줄기와 파지직거리는 살벌한 소리.
뭔지 너무나도 자명했다.
‘번개?’
찌를 듯한 눈부심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이하늘은 끝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번개 공격을 여과 없이 받는 늑대 위에, 누군가가 삐딱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에겐 번개 따위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누구? 잘 안 보여.’
이하늘이 누구냐고 궁금해하면 누가 답해 주는지 아는가?
열일하는 모노클이다.
ᛗ
∙이름―유성우(劉成又)
∙닉네임―엄친아
∙세계―■■■ 어스 대한민국
∙나이―만 21세
∙등급―S급
∙랭킹―제도 비활성화
∙길드―공무원이무슨길드야
∙언약성―남쪽에 떠오르는 태양
∙속성―복합 계열 교속
∙성향―너그러운 심판자
∙캐릭터 키워드―만능, 대리인, 처단자
……더 보기
“얌전한 멍멍이가 왜 이를 드러내고 그럴까?”
유성우란 자의 산뜻한 말소리가 이하늘의 귀까지 닿았다.
‘S급…….’
최가영처럼 방독면도 쓰고 있다. 그렇다면 저 사람도 S급 공무원 헌터라는 게 된다.
다행인 점은 유성우 헌터가 굉장히 강해 보인다는 것.
이제 안전해.
파도처럼 밀려오는 안도감에 이하늘은 주저앉았다.
유성우가 가볍게 발을 휘둘렀다.
가벼운 발짓과 달리 빠악, 하는 섬찟한 소리가 울렸다.
깨갱. 개처럼 어울리지 않는 울음소리와 함께 그 거대한 늑대가 쿵, 하고 쓰러졌다. 기절이라도 한 듯이.
공기까지 찌릿찌릿할 정도로 거셌던 번개는 그제야 사라졌다.
“와, 단명할 뻔했네.”
뒤편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이하늘의 상사이자 헌터에게서 도망쳤던 시스템 운영자다.
괜찮냐고 물어야 하는데, 이하늘의 입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해서 다행이네요. 괜찮으십니까?”
대신 부드러운 목소리가 물어봐 주었다.
유성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 운영자님에게지. 나는 안 보일 테니까.’
그건 그렇고 결국 헌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야근.
머릿속에서 피어나는 아득한 단어에 이하늘이 이마를 짚는데, 근처까지 온 유성우가 무릎을 굽혔다.
운영자와 눈을 마주하기 위해서일 터.
‘그런데…….’
이하늘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왜 나를 보는 것 같지?’
이하늘은 ‘머리로 장난치는 자’의 채널에 입장했지, 실제로 게이트에 휘말린 게 아니다.
즉, 모노클을 낀 시스템 운영자가 아니면 그녀를 볼 수 없단 뜻.
그런데 유성우의 고개가 정확히 이하늘에게 고정되었다.
‘내 뒤에 있는 운영자님을 보는 거 맞……지?’
저 망할 방독면 때문이다. 머리카락을 가리지 못해 유성우가 금발인 건 알 수 있지만 얼굴은 완벽하게 가려서 어딜 보는 건지 헷갈렸다.
그때.
유성우가 손을 뻗었다. 정확히 자신을 향해.
당연히 저 손이 저에게 닿지 않을 거란 걸 안다.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최가영도 통과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이하늘은 움찔했다. 저도 모르게 등을 뺐다. 손이 닿을 것만 같았다.
‘으아아아아.’
보스 몬스터를 만났을 때도 뱉지 않았던 비명을 속으로 내지르는 차였다.
유성우의 손이 이하늘을 통과했다.
‘아, 역시. 나한테 뻗는 게 아니었구나!’
“어디 다치신 데는 없죠? 제 대처가 미흡했던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 죄송합니다.”
이하늘을 통과한 유성우의 손이 운영자의 팔뚝을 감쌌다. 일으켜 세워주려는 모양이었다.
“네에, 괜찮습니다아…….”
운영자가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지칠 만도 했다. 안 잡히려고 기껏 열심히 도망쳤는데 허무하게 붙잡혔으니.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하늘도 안도의 숨을 내쉬며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멀리서 달려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냐?”
최가영이었다. 잠깐 따로 있는 사이에 옷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유성우가 그걸 발견하고 와아, 하고 감탄했다.
“과장님, 꼴이 왜 그래요? 몬스터한테 뜯기신 거예요?”
“닥쳐, 새끼야. 이래서 내가 수준 낮은 게이트에 들어오기 싫은 거야. 애초에 널 부를 수 있었으면 난 왜 부른 거람.”
“그냥 스킬 쓰시지.”
“내가 장난이라도 그딴 말하지 말랬다.”
“아하하. 구조는 얼마나 하셨어요?”
무척 친근해 보였다. 하긴, 같은 방독면 쓰는 사이인데 데면데면하면 더 웃기겠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어느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영자야, 잘 해냈구나. 첫 입장인데 수고가 많았다.〗
이하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저에게 친절히 설명해 주었던 그 인자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좀 전과 살짝 달랐다. 목소리가 이어폰에서 들리는 게 아니라…….
‘머리 어쩌고 성신처럼 진짜 옆에서 들리는 듯한.’
이하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자락에,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게 걸렸다.
지지직거리는 홀로그램. 이것은 ‘머리로 장난치는 자’와 같았으나.
‘왜 하얀색이지?’
하얀색의 홀로그램.
색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