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이렇게 과민하게 반응하면 유성우에게 먹잇감을 주는 거나 마찬가지란 걸 알았지만 이활은 날카롭게 굴었다.
유성우는 어쩐지 말이 없었다. 그 침묵에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이활은 괜히 이죽거렸다.
“뭐,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냐?”
그럴 리가 없지.
누가 이하늘을 보고 첫눈에 반해?
이활은 제 누나를 떠올렸다. 그리고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응. 절대 그럴 리 없.
“아. 이게 첫눈에 반한 건가?”
그러나 저도 모르겠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유성우의 혼잣말에 돌처럼 굳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유성우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본 것 같거든요.”
“너, 너…….”
“게이트 안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최근에 닫았던 게…… 마포구는 아닐 테니까 2주 전 강남구 게이트에서 봤나 싶었죠. 마침 이곳이네요.”
뭔 개소리야, 이 새끼야!
이활의 목에 핏대가 솟았다.
“그런데 제 기억상 그 당시 피해자 31명 중에 저 사람은 없었단 말이에요? 그럼 대체 내가 어디서 봤을까.”
유성우가 급기야는 팔짱을 끼고 손가락으로 톡톡 제 팔을 두드렸다.
“그러니까 첫눈에 반한 건가 봐요. 첫눈에 반해서 어디서 본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걸지도. 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작업 걸 때 ‘우리 어디서 본 적 없어요?’라고 한다잖아요.”
“뭐, 뭔 개소리를 진지하게…….”
“고맙습니다, 보우 씨! 제 마음에 해답을 주셔서!”
유성우가 산뜻한 목소리로 밝게 말하며 이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처구니가 나간 이활이 아무런 말도 못 할 때, 유성우가 그에게 좀 더 가까이 가 되물었다.
“그래서, 저분 이름이 뭔데요?”
º º º
간단한 진술서를 작성한 후, 이하늘은 임여명과 바로 헤어져 지하철을 탔다.
여전히 출근 시간이었기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때문에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서 가면서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동생들이 이해가 안 갔다.
‘자기들은 한 달에 한 번 집에 들어올까 말까 하면서 내가 고작 2주 없었다고 신고를 해?’
아니다. 이건 상황이 다르다. 둘은 자신에게 사전 통보를 했고 저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 내 잘못이야. 내가 미쳤지. 연락 자주 안 한다고 뭐라 할 자격도 없어.’
결국 이하늘은 홍대입구역에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보이는 가장 커다란 휴대폰 대리점에 들어갔다.
“휴대폰을 사려고 왔는데요.”
이하늘의 발언은 휴대폰 대리점 직원의 얼굴에 웃음꽃을 만개하게 했다.
순식간에 요즘은 이런 휴대폰, 저런 휴대폰, 요금제는 어쩌고 용량은 저쩌고, 가격은 이러하다, 를 들은 이하늘은 진이 빠졌다.
“너무 비싼 것 같은데…….”
평범한 회사 월급만 한 휴대폰 가격에 이하늘이 조심스레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직원은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냈다.
“어휴, 고객님. 요즘은 비싼 것도 아니에요. 툭하면 게이트가 열리고 휘말리는 시대잖아요? 옛날 같으면 게이트에 들어가자마자 핸드폰이 먹통되면서 망가지고 그랬지만 요즘은 그러지 않거든요. 먹통만 될 뿐 망가지진 않아요.”
말 많은 직원은 주간 조의 시스템 운영자, 차한수를 방불케 했다.
“옛날은 방수만 되면 좋은 폰이라고 했지만 요즘은 일 톤 몬스터가 밟아도! 게이트에 들어가도! 불이 붙어도 멀쩡한 핸드폰을 원하는 시대랍니다. 가격이 그렇게 많이 부담되신다면 이 용량에, 이 요금제를 1년 동안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직원이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이 정도! 현금으로 가능할 것 같은데. 어떠세요?”
계산기에 적힌 금액은 조금 전에 들었던 가격의 35%가 깎여 있었다.
이하늘은 재빠르게 원가에 사서 가장 최저가의 요금제를 쓰는 것과 35% 할인된 휴대폰을 사고 1년이나 최고가 요금제를 사용하는 것 중 뭐가 나을지 계산했다.
‘내가 등신인가……. 암산이 잘 안 돼.’
지금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한 상황이라 더 그랬다.
‘에라이, 어차피 나 회사 다니면서 돈 많이 벌 건데! 그냥 쓰자! 다른 것도 아니고 휴대폰인데!’
이하늘은 결국 원가에 휴대폰을 사기로 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목을 붙잡혔으니.
“네? 원래 번호를 사용할 수 없어요?”
“네에. 앞자리 010을 사용하시는 거로 나오는데……. 재앙 후에 020으로 시작하는 번호가 생긴 거 아시죠?”
안다. 재앙 후에 휴대폰을 망가뜨리거나 잃어버렸던 그녀의 동생들 덕분에. 그들의 번호는 020으로 시작한다.
“정부에서 이제 재앙 전에 사용한 번호 말고 020을 쓰라고 했거든요.”
듣도 보도 못한 소리에 이하늘이 얼굴을 구겼다.
“그런 말 한 번도 들은 적 없는데요. 무엇보다 저 잘만 사용했어요.”
“물론 계속 써오시던 분들은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해뒀었죠. 근데 핸드폰을 바꾸시는 경우나 통신사를 옮기실 때는 번호 변경이 강제라…….”
직원이 안타깝단 표정을 지었다.
“계속 사용하실 수 있는 것도 올해까지 이야기고요, 내년 1월 1일 전까지 변경하지 않으시면 수신 발신 다 정지돼서 어차피 바꾸셔야 해요.”
고작 전화번호를 변경하는 것뿐인데 고객의 표정이 좋지 않다.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직원은 친절한 목소리로 간단한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하시는 일 때문에 꺼리시는 거면 전화번호 변경 알림 서비스를 사용하시는 건 어떠세요? 최대 1년까지 이용 가능해 넉넉하실 거예요. 게다가 원래는 유료 서비스인데 지금 무료로 지원해 드리고 있답니다.”
전화번호 변경 알림 서비스? 최대 1년?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이하늘이 가만히 생각했다.
‘1년 안에 오빠한테서 연락 오지 않으면 소용없잖아.’
불현듯 든 생각에 이하늘이 움찔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오빠랑 무슨 상관이야.’
10년이 넘도록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은 이유는 그냥 귀찮아서다. 다른 이유는 없다.
절대로 오빠가 다시 연락할까 봐 번호를 안 바꾸는 게 아닌…….
“손님?”
귓가가 멍해지고 상념은 깊어져 가는 그때.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환기했다.
“야, 이하늘.”
직원의 부름에도 미동 없었던 이하늘이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당장 연락하기 위해서 휴대폰 대리점에 들르게 한 원인이 있었다.
뭘 먹고 자랐는지 키가 무척 큰, 그리고 깡패같이 껄렁껄렁한 동생.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있다.
저를 실종 신고한 녀석이 어떻게 알고 여길 찾아왔는지 궁금했지만 역설적으로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은, 지금은.
“활아.”
“너 2주 동안 내가 얼마나.”
“나 휴대폰 잃어버렸는데…….”
“뭐, 뭐, 뭐, 어. 뭐야.”
옷을 갈아입고 그녀를 찾자마자 힘을 숨긴 뒤 대리점에 들어온 이활.
헌터 ‘보우’가 아니라 ‘이활’로서 이하늘을 만나면 화를 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던 그.
그러나 그토록 찾았던 누나를 보자마자 그 결심은 우르르 무너졌다.
“표, 표정 뭐야?”
“휴대폰을 새로 사면 번호를 바꿔야 한다네.”
기껏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황당하다.
번호 바꾸는 것과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게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이활은 뭔가를 더 캐물으려다가 겨우 어느 한 가지 사실에 도달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º º º
10년 전, 1월 31일.
전 세계에 탑이 꽂힌 지 한 달이 된 날이자.
첫 재앙이 시작된 날.
그날은 이하늘에게 남았던 가족이 전부 사라진 날이기도 했다.
º º º
“좀 잊어!”
일단 휴대폰을 사지 않기로 하고 집에 가는 걸 선택한 이하늘은 이활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이하늘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뭘 잊으라는 거야? 어우, 소리 좀 지르지 마. 오랜만에 누나 만났는데 소리 지르고 싶어?”
“오랜만? 오냐, 너 말 잘했다. 너 2주 동안 어디 싸돌아다녔어? 도대체 어디에 있었어. 어떻게 한마디 말도 없이, 연락도 없이, 메모도 없이!”
어우…….
이하늘은 질려서 표정을 바로 구겼지만 입은 다물었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어. 소매치기당했단 말이야. 연락하고 싶어도 할 수.”
“소오매치기이?”
이활이 얼토당토않다는 어조로 말을 잘랐다.
“신고했어?”
“아니.”
“왜 안 해? 어디서 소매치기당했는데. 아니, 요새도 소매치기하는 새끼들이 있단 말이야?”
“그러게. 내가 부자로 보였나. 소매치기는 삼성역에서 당했고, 바빴어. 2주 동안 집에 안 들어간 게 아니라 못 들어간 거야.”
이참에 이하늘은 조곤조곤 2주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이야기했다. 이활의 반응은 커다랬다.
“취직? 아니, 한 달 동안 죽은 듯이 놀겠다며.”
“그으랬지.”
“어디에 취직했는데?”
“음.”
아쉽게도 대답할 수 없었다. 여기서 더 떠벌렸다가는 보안이 뚫린다.
그녀가 침묵하자 이활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근데 2주씩이나 야근을 해서, 거기서 묵었다?”
“그렇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