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무표정한 얼굴의, 선이 전체적으로 가느다란 이가을이 나왔다. 그가 이하늘을 지나쳐서 바로 소파에 갔다.
“병원에 가자.”
“뭐? 됐어. 이하늘 졸업식 가줘야 해.”
“…….”
“병원에 갔다가 가도 안 늦어. 일어나. 택시 곧 올 거라 나가야 해.”
“아니, 씨. 됐다니까? 사실 하나도 안 아파.”
“…….”
침묵하는 이공과 안 가겠다고 떼쓰는 이활. 묵묵히 병원을 주장하는 이가을.
그 셋을 지켜보던 이하늘이 팔짱을 꼈다.
“지금 가서 후딱 주사 맞고 오는 게 날 도와주는 거거든? 빨리 가. 졸업식 11시에 시작하니까 지금 빨리 갔다 오면 되잖아.”
이하늘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파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쌍둥이들을 설득하던 이가을의 휴대폰이 울렸다. 안 봐도 훤했다. 택시 기사일 터.
“빨리, 빨리.”
이하늘의 재촉에 이공이 제일 먼저 일어났다. 다른 사람 말은 죽어도 듣는 시늉 안 하면서 누나 말만 듣는 이공다운 행동이었다.
에이 씨, 하며 이활도 일어났다.
둘은 좀 이따 보자는 말도 없이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나갔다. 그런 인사를 안 해도 되는 사이였으니까.
“하늘아.”
하지만 이가을은 달랐다. 조용히 일어나 신발을 신던 그가 이하늘을 불렀다.
“응……?”
이제 오빠를 어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딱 한 달 전에, 생일에 오빠가 분명 말해 줬는데.
부모님이 없어도 우린 가족이라고.
확실히 얘기해 줬으니 언제 버려질까 밤마다 고민 안 해도 되고 눈치 볼 필요도 없는데.
대답하는 이하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못 챘는지 모르겠다.
이가을은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간 이하늘을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좀 이따가 보자.”
“응…….”
“못 데려다줘서 미안해.”
“……혹시 애들이 너무 아프면, 졸업식에 안 와도 되니까…….”
“하늘아.”
조용히 선 긋는 말투에 이하늘이 입을 다물었다.
“꼭 갈 거야. 그러니까 기다려.”
그러나 뒤이어 흘러나오는 말은 이하늘을 기쁘게 만들었다.
겨울 방학 때 동생들 생일 축하해 줬던 걸 말한 게 실수였다.
“너 생일 12월 31일 아냐? 근데 어떻게 네 동생들은 1월에 태어나?”
“야, 이 멍청아. 다음다음 해에 태어났나 보지.”
“그런데 하늘이 동생들 4학년 아니고 5학년이야.”
“빠른인가 보네.”
“아, 그런가?”
이공과 이활은 이하늘 다음다음 해에 태어나지 않았고 빠른 연생은 더더욱 아니었다.
빠른 연생이었다면 이하늘과 같은 학년이었으리라.
‘정확히 이틀 정도 차이 난다고 말할 수도 없구.’
좀 더 어렸다면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머리에 피가 마르기 시작한 이하늘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멋대로 넘겨짚어 주시는 같은 반 친구들을 보던 그녀가 흘깃 뒤를 봤다.
꽃다발과 카메라를 든 학부모들이 잔뜩인 강당 뒤편을 빠르게 훑어본 이하늘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안 왔다는 속상함보다 동생들이 많이 아픈가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누가 어깨를 툭 쳤다.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이하늘의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근데 하늘아, 탈색 몇 번 했어?”
“아, 한 번.”
“와, 근데 이렇게 밝게 나온 거야? 잘 나왔다. 왜 한 거야? 염색은 안 해? 무슨 색으로 할 거야?”
뭐가 그리 급한지 그녀의 친구는 대답도 듣지 않고 연달아 질문했다.
이하늘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턱에서 끝나는 곱슬머리가 하얗게 보일 정도로 물이 빠졌다.
“그냥, 중학생 되기 전에 염색해 보고 싶어서. 색은 아직 못 정했고.”
이젠 옆에 앉은 애가 말을 거들었다.
“하늘색 하면 되겠네. 너 이름 따라.”
“응, 재미없고. 하늘색 말고 민트 어때?”
“야. 민트나 하늘이나. 똑같은 거 아님?”
“하. 코랄이랑 핑크랑 똑같다고 할 애네, 얘.”
언제나처럼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됐다. 이하늘은 그저 눈을 굴렸다가 대각선에 앉은 애와 시선이 마주쳤다.
싸우는 두 사람 사이를 익숙하게 가르는 친구가 고개를 기울인다.
“근데 반장 왜 안 온 거야? 졸업식인데.”
“아. 반장 오늘 아침에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갔대.”
“뭐지? 옆 반 내 친구도 오늘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서 병원 갔다구 했는데?”
울렁? 병원? 이하늘이 눈을 깜박이며 끼어들었다.
“내 동생들도 오늘 아파서 병원 갔어.”
“헉. 하늘이 동생두? 뭐지, 갑자기?”
“뭐긴 뭐야. 우연이지.”
“무슨 일 터지는 거 아냐? 무서워…….”
“혹시 전염병……?”
본인들이 공포감을 조성해 놓고 아이들은 무서워했다.
이하늘이 다시 강당 뒤를 보았다.
여전히 그녀의 형제들은 보이지 않았다.
곧 졸업식이 시작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강당을 울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흘러.
“잘 가, 하늘아. 보고 싶을 거야!”
“졸업 축하해, 중학교 가서도 잘 지내.”
“간다!”
친구들이 한마디씩 인사하며 떠나고 졸업식이 완전히 끝났다. 그러나 이하늘은 홀로 자리를 지켰다.
“으으음.”
텅 빈 강당에 있기엔 눈치가 보여서 운동장으로 나온 이하늘은 겨울바람이 불어와 얼 것 같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전화해 볼까?’
그래.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법.
이하늘이 이가을의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
이하늘은 이상을 감지한 사람처럼 허공을 보았다.
시야에 걸리는 길쭉한 탑. 인공위성으로는 찍히지 않는다는, 하늘을 꿰뚫은 것처럼 끝을 알 수 없는 흑탑.
한 달 전에 생긴 정체불명의 탑이었으나 적응의 동물 인간답게 모두 익숙해졌다. 이하늘만 제외하고.
깜빡. 눈을 감았다 뜨는 차였다. 길쭉한 탑 위쪽부터 아래로 전류가 흐르듯 빛이 타고 내렸다.
건물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탑의 하층부. 그러나 전류의 속도에 따라 아마 지금쯤이면 육지에 닿았을 거라는 생각이 막 들었을 때.
“헉!”
이하늘이 비틀거렸다. 머리가 울렸다.
아니, 땅이 울린다. 공명하듯, 짐승의 울음처럼 마구 공기가 진동한다.
때마침 이상한 착각이 들었다. 전류가 바닥에 닿으면서 어떤 ‘그물’ 같은 것이 이 세계를 덮었다는.
착각은 짧았다. 이상을 느꼈던 게 마치 꿈인 것처럼 정신이 막 들었다.
‘뭐지, 방금. 지진?’
이하늘은 전화 버튼을 눌렀다. 왠지 모르게 조급했다. 불길함이 목덜미를 타고 내렸다.
[긴급 전화만 가능합니다.]
통화 연결이 실패되면서 화면에 떠오르는 문구.
불길함이 증폭된 그 순간.
“꺄아아아!”
“저게 뭐야?”
“방금, 어느 남자애가 빨려 들어갔어요!”
학교 바깥에서 터져오는 비명과 혼돈.
땅바닥에 박힌 듯한 발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몇 초 후였다. 이하늘은 뛰었다.
교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기괴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허공에 괴이한 것이 떠 있다.
검붉은 색의 타원형. 누가 허공을 쥐어 옆으로 잡아 뜯은 것 같다.
쿵쿵.
왜 이렇게 심장이 조이고 입안이 마르지.
뭔지 몰라도 어린 이하늘이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저게 위험하다는 것.
이하늘은 침을 삼키며 막 도망치려다가 멈칫했다.
안 되는데. 오빠가 기다리랬는데.
위험하니 오지 말라고 알려야 했으나 하필이면 전화가 먹통이다.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던 이하늘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저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위험해 보이진 않는다.
그러니까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기다리자. 여기서 움직이면 오히려 혼란스럽기만 할 거야.
막 이하늘이 다시 교문 안으로 들어가는 차였다.
검붉은 타원형의 구멍이 맥박 뛰듯 꿈틀거렸다.
그 광경을 본 건 이하늘뿐만이 아니라서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터지기 일보직전의 폭탄을 마주한 것처럼.
그러나 이하늘은 물러설 수 없었다. 홀린 듯 쳐다보았다.
그렇게 몇 번 꿈틀거리던 그것이.
휘익!
무언가를 뱉었다.
탁, 하고 허공에서 떨어져 바닥에 안착하는 어느 사람. 비명을 지르던 이들의 말에 의하면, 아마 저 구멍에 빨려 들어갔다는 사람일 테다.
사람을 뱉은 구멍이 응축하며 사라진다. 대신 그 아래에는 여전히 사람이 존재했다.
땀에 절어 이마에 가닥가닥 붙은 갈색 머리카락과 선이 옅어 유약해 보이는 얼굴.
드물게 찡그린 눈썹과 그에 반해 언제나 그래왔듯 무감한 눈동자.
오빠, 라고 부르기도 전에 눈이 마주쳤다.
이가을이 그녀에게 뛰어왔다.
와락, 이하늘을 끌어안는다. 괜찮냐고 묻는다.
진정시켜 주듯 토닥이는 손이 떨리는 게 느껴져서, 이하늘은 오히려 그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영이랑 활이는?”
“일단 집으로 가자.”
“영이랑 활이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말도 안 되는 상황.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현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부정하며 고구마를 먹는 대신, 이하늘은 동생들의 행방을 물었다.
이가을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물병으로 손을 닦았다. 이제 보니 그의 손에 말라붙은 피가 보였다.
“뭐야……?”
“하늘아. 일단 집으로.”
“……애들 집에 있는 거지?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