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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60)화 (60/90)

<제60화>

최가영이 슬쩍 이공의 어깨를 톡 쳤다. 찢을 것처럼 억세게 쥐어졌던 이공의 커다란 손에서 그제야 힘이 풀린다.

언제 어디서 얼굴을 가린 저를 보았는지, 본 게 뭐가 어쨌다고 대체 왜 숨기는지.

최가영 본인도 궁금하긴 했으나 찔러봤자 경계심만 세울 게 분명해서 여기서 물러나기로 했다.

“쌤아, 가자.”

최가영의 부름에 통화하던 시초야가 흘긋 이쪽을 보더니 왁, 뭐라 외치고 전화를 끊었다.

“아, 진짜 찰거머리. 징하다, 징해.”

단번에 다가와 휴대폰을 건네는 시초야의 얼굴은 거머리와 통화하는 게 여간 짜증 나는 게 아니었는지 와락 구겨져 있었다.

“볼일 다 봤으면 가자. 너 때문에 하루가 길다.”

“쫌 있어봐. 언니랑 아직 할 얘기 남았다고.”

팍 신경질을 내고는 시초야가 팔짱을 꼈다. 아까 보았던 샘물 같은 눈동자와 이하늘의 눈이 마주쳤다.

“언니, 나 실은 헌터야.”

“아, 응. 그런 것 같더라.”

“엉. 언니가 날 모르길래 신기해서……. 어쩌다 보니 말 안 했던 거지 속이려 했던 건 아니야. 혹시 기분 나쁠까 봐.”

생각보다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런 감정을 느낄 만한 사이도 아니고 솔직히.

이하늘에게서 대꾸가 없자 시초야가 작게 소리 내어 웃는다.

“지금도 시초야가 누군지 모르겠지?”

응, 이라고 말하면 기분 나쁠까?

하지 않아도 무슨 대답이 나올지 안다는 듯 시초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됐고. 다 떠나서 내가 오늘 점심에 스카우트 제의한 건 농담이 아니야. 그래서 말인데 들어올래?”

우리 길드, 하고 중얼거리는 현역 고3이라는 시초야 씨.

이하늘은 난감해서 입술을 말았다.

경호원 일인 줄 알았을 때 자신 대신 동생은 어떠냐고 제안해 보려 했는데 이도 저도 아니게 됐다.

잠자코 듣고 있던 이공이 어처구니가 없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우리 누나 일반인입니다. 무슨 소립니까?”

“그래, 쌤아. 헛소리 말고 돌아가자.”

“뭐, 누가 보면 일반인은 길드 안 들어가는 줄? 나도 언니 헌터 아닌 거 알고 있거든? 그래서 사무직 권유했거든?”

야, 넌 무슨 사무직을 이렇게 뽑아.

공고 올린 것도 아니고 길드 대가리라 불리는 대장이 사무직을, 어?

낙하산이라 불리고도 한참을 남을 일에 최가영이 혀를 찼다.

결국 이하늘이 직접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 너도 알지만 내가 다니는 회사가 있어서…….”

“뭐. 돈 마이 주나. 얼만데. 내도 마이 줄 수 있는데?”

우리 길드가 돈이 없는 줄 아나. 가오도 있고 돈도 있다 이거야.

그때 이하늘이 경건하게 연봉을 읊었다. 최가영의 눈썹이 올라가고 시초야가 굳었다.

곧 그녀가 이하늘의 어깨를 잡았다.

“내, 내도 그 회사 알려도.”

와나, 시바. 길드 때려칠란다.

º º º

강남 세브란스 병원 앞.

“요즘도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가 있네.”

길드 가입 권유에 실패하자 번호라도 알려달라고 떼쓴 시초야가 손바닥에 적힌 번호를 보며 중얼거렸다.

옆에서 최가영이 흘긋 보고 눈을 굴렸다가 슬쩍 떠봤다.

“너 결국은 모임 안 나온 이유가 궁이 때문만은 아니었네?”

사실인지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흥미 끈 게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이하늘이라.

유성우도 그렇고 시초야도 그렇고, 왜 그렇게 일반인에게 관심을 갖는지. 저도 관심 끊고 산 지 10년이 지났는데 말이다.

‘게다가 동일인물.’

뭐어…… 무슨 헌터들이 끌리는 상이라도 되나.

뻘생각을 하는데 시초야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보다 지금 거기 교통사고 난 거 누가 수습 중? 미친아 걔?”

미친아. 시초야는 유성우의 닉네임 엄친아를 그렇게 부르곤 해서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최가영이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경찰에 넘겼겠지. 왜.”

“뭐 수상한 거 없음?”

“자세히 말해 줘야 언질을 주지, 성우한테.”

“어. 미친 새끼가 계속 내 속을 긁더라고.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는지.”

“더 자세히.”

보통이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라며 호통을 쳤을 시초야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진중한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언니랑 걷는데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마력으로 날 긁더라고. 시비 거는 것처럼.”

“궁이 아녔나. 톡에 그런 식으로 썼잖아.”

“걘 나중에 와서 오히려 기척을 감춘 거고.”

골치 아픈지 이마를 긁적이는 시초야를 보며 최가영이 의외라는 식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가만히 뒀어?”

“찾아보려는데 난 추적에 젬병이잖아. 걍 뒤쪽에 있단 것만 알았지. 그래서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뭐가 목적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난 걸 수도 있으니.

“그런데 한 시간을 가까이 쫓아오더라, 징한 새끼. 난 님과 달리 안티 팬 없는데 뭐지?”

안티 팬 없다고 말하는 얼굴이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다. 최가영이 헛웃음을 흘리며 입가를 매만졌다.

어떠한 가능성이 고개를 내밀었으나 최가영은 말을 아꼈다. 확실치 않은 거로 불안감을 조성하는 건 애새끼나 하는 짓이니까.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 안다는 듯 시초야가 짜증스레 혀를 찼다.

“그래, 님 생각대로 언니가 목적일 수도 있잖아. 그래서 일부러 언니 두고 현장에 간 건데.”

그녀의 예상대로 뭔가가 있었다. 이하늘이 소리를 질렀고, 거의 동시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찌를 듯한 마력이 사라졌다.

“그리고 언니는 기절했지. 이거 졸라 구리지 않음? 엉?”

“궁이가 모를 리 없을 텐데.”

“그 새끼 내가 언니 앞에서 그 얘기 꺼낼라 하면 말 자르고 난리도 아녔음.”

“그러니까 궁이도 뭔갈 알고 있다?”

“엉. 좀 쑤셔봐. 엉? 파보라고.”

시초야가 마구 허리를 찌르자 최가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친다.”

“염병하네. 힐러한테 그런 걸 걱정함? 파기나 해봐. ×나 궁금해.”

“신경 끄시고요. 다음 모임 때나 제때 나와. 탑 얘기니까.”

“엥. 탑은 왜?”

최가영이 버릇처럼 담배를 꺼내 들어 입에 물었다. 그러나 불은 붙이지 않는다.

붉은 눈을 올려 레바브탑을 바라볼 뿐.

“요즘 멋대로 등반하는 새끼들이 있다 해서.”

“뭔 소리.”

“미등록된 새끼들이 나라 불문하고 멋대로 탑을 오른다더라. 그것도 기록을 경신하면서.”

늦은 시간이지만 사람이 적지 않은 강남 세브란스 병원 앞.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유명한 최가영을 알아보지 못할 리 만무했다. 게다가 현재 시초야는 얼굴도 깠고 길드 마크도 드러냈다.

흘깃거리는 그들에게 말이 닿지 않기 위해 최가영이 작게 중얼거린 건 당연했다.

그러나 시초야는 다 들었다. 그러고서 표정까지 굳혔다.

“×발.”

얼씨구. 욕까지.

“아, 말을 해야제! 그런 중요한 얘기라고.”

“말을 안 해도 모이자고 하면 모이자, 응?”

“썅. 짜증 나. 다음은 언젠데?”

“정해지면 알려줄게.”

“아, 뭐 이리 되는 게 없노. 마음에 드는 언니야 꼬시지도 몬하고…….”

최가영이 그 말에 조용히 샘물 위에 던진다. 파문을 일으킬 돌을.

“그거 말인데. 아마 생각이 있었어도 네 길드 이름 듣고 거절했을걸.”

“뭐?”

효과는 확실했다. 시초야가 주먹을 휘둘렀고 최가영은 피했다.

“니 지금 나한테 시비 거나. 이 꼰대 노친네가 처돌았나.”

시초야가 걸치고 있는 외투는 그녀의 길드에 가입한 사람이면 전부 수급받는 것으로 등판에 길드명이 한자로 적혀 있다.

시초야는 피부처럼 입고 다니지만…….

“네 골목 친구들도 창피해서 못 입고 다니지, 아마?”

“아이라고! 주디를 콱 그냥.”

시초야가 달려들었지만 최가영은 가볍게 피하면서 그녀의 등을 보았다. 거칠지만 멋진 필체로 적힌 한자.

『始發』

“시발이 뭐냐, 시발이.”

“아! 뒈질래, 진짜! 아니, 하! 시발점 할라 캤다고, 원래는!”

“시발점도 웃기긴 한데. 하필 많고 많은 것 중에. 아무튼 그 애는 길드명 듣자마자 거절했을 거다.”

시초야가 눈을 뒤집으며 다시 달려드는 걸 슬쩍 손끝으로 막은 최가영이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날렸다.

“그리고 너, 그 여자애 이름은 알아?”

“뭐, 언니? 내가 모를 리가 없…….”

“모르지?”

싸늘한 침묵. 급격하게 가라앉는 흥분. 더불어 충격받은 듯한 표정.

시초야가 손을 뻗는다. 당당하게 최가영을 향해.

“전, 전화 좀 빌려도.”

“폰 어쨌어, 그러고 보니?”

“빌려주기나 해!”

평소 같으면 알아서 하라고 했을 테지만 최가영은 휴대폰을 빌려주었다.

예상대로 시초야는 손바닥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안 가 이름이 뭐냐고 묻는 소리가 들린다. 아주 조심스럽다 못해 절절하다.

최가영은 그저 작게 웃었다. 어차피 저장도 못 할 번호, 알게 되어서 뭐가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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