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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61)화 (61/90)

<제61화>

그래서? 누나한테 숨기라고?’

‘어. 말하지 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이가을이 개짓거리를 한 것 때문에 왜 우리가 누나를 속여야 해.’

‘하지 말라면 하지 마. 내 말 들어. 이하늘한테 말하면 백퍼…….’

‘뭐가. 말을 해.’

‘몰라, ×발. 말하면 큰일 날 것 같다고.’

‘그럼 너는 숨겨. 나는 말할 테니.’

“영아. 왜 그래. 피곤해?”

이공이 눈의 초점을 바로 했다. 얼굴 앞에 흔들리는 손이 보였다.

“빨리 집에 가자.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이활한테 전화했어야 했는데 하필 초야랑 통화하다가 배터리가 나가서. 왜 영이 네 것도 덩달아 배터리가 다 된 거람.”

이활 놈, 은근히 잔걱정이 많아서 큰일이라니까.

너보다 심하다며 절레절레 젓는 고개. 그에 함께 흔들리는 노란 머리카락과 그 아래에 위치한 갈색 눈.

살아 있다. 8년 전처럼 죽은 것 같은 모습이 아니라.

손 뻗어도 닿지 않을 허상이 아니라, 이렇게 손을 뻗어도.

이공이 살며시 주먹을 쥐고 내민다. 그러고는 이하늘의 뺨 근처를 배회하다 멈춘다.

이공의 버릇이었다. 대뜸 손을 뻗어 뺨 근처에서 멈추는 것.

그럼 이하늘은 고개를 기울여 이공의 주먹에 얼굴을 톡 대주고야 만다.

그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고 자신도 어쩌다가 이런 식으로 대응하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왜 또.”

“아냐. 누나가 맞나, 싶어서.”

“또 그 소리. 그보다 활이 분명 지랄할 텐데, 그거나 어떻게 진정시킬지 고민하자.”

누나의 말에 작게 웃은 이공은 이하늘의 말을 따르는 대신 도중에 끊겼던 8년 전을 되새겼다.

‘누나. 있잖아…….’

말하면 큰일 날 것 같다던 이활의 표현은 놀랍게도 과장된 게 아니었다.

2년 만에 재회했을 때만 해도 막 졸업을 앞둔 14살의 누나와 다를 바가 없었는데.

이상하게 사실을 털어놓으려고 하니까 그 당시에 놓쳤던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깡마른 몸이라든가, 저보다 작아진 키라든가.

무미건조해진 표정과 죽은 것 같은 눈동자 말이다.

과연 제가 알던 누나가 맞나 싶었다. 손을 뻗어 확인하고 싶은데 혹시나 허상일까 겁이 덜컥 났다.

이거 정말, 이미 각성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면.

큰일 날 것 같은데.

말도 안 돼. 아무리 그래도 이걸 숨긴다고? 고작 이가을 그 개자식 때문에?

나는 달라. 그러니까 누나의 불안감을 없애주면 돼.

‘누나, 나 실은…….’

‘헌터야?’

‘……어?’

‘너, 헌터냐고.’

그에 그렇다고 대답을 안 한 이유, 아니.

못한 이유는 죽은 것 같은 누나의 눈에 조그마한 감정이 실렸기 때문이다.

공포.

이공은 헌터가 되면서, 그리고 별과 언약을 맺으면서 부정적인 모든 것을 기민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착각이 아니다.

이하늘은 자신이 헌터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정확히는 제가 이가을처럼 본인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공포를 느꼈다. 확실했다.

아냐. 누나, 겁먹지 마. 나는 이가을이랑 달라.

나는 가족을 버리는 짓 따위 안 해. 누나를 두고 어디 안 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수많은 말을 함으로써 누나를 안심시킬 수 있었으나 결국 그는 딱 한마디만 했다.

‘헌터가 뭔데?’

이활의 선택을 이해 못 해놓고, 제 쌍둥이와 똑같은 짓을 한 거다.

그렇게 8년이 지났다.

이하늘은 건강해졌고 비교적 밝아졌다. 그대로인 것은 헌터에 대한 불호 감정뿐.

‘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공은 병원에서 시초야를 대하던 이하늘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헌터인 걸 뻔히 알면서도 평범하게 대하던 이하늘. 헌터를 싫어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뿐이랴. 잊은 게 분명한 최가영을 어째선지 지금 알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왜 그를 알고 있는지, 그 이유를 숨긴다.

이상했다. 누나가 왜 점점 달라지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싸했다.

“누나.”

이공의 부름에 이하늘이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다가 말고 시선을 던졌다.

8년 전보다 생기가 도는 갈색 눈을 마주 보며 이공은 좀 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그 여자가 누나를 속였는데 화 안 났어?”

그 여자?

“시초야 말하는 거야?”

“응.”

“어, 응.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 그런지 별로 아무 생각 없네.”

“그래도. 누나 헌터 안 좋아하잖아. 거부감 안 들어? 번호까지 알려주고.”

목소리는 여상했지만 이상하게 투덜거리는 어투에 이하늘이 눈을 깜박이다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영아, 혹시 질투해?”

“…….”

“누나는 우리랑만 놀아야 하는데! 뭐 이런 거야, 지금?”

끝까지 대답이 없는 이공의 모습에 급기야 이하늘은 걸음마저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허어, 얘가 이러는 거 오랜만이네.

초등학생 때, 정확히는 재앙 전에 자주 보았던 반응이었다.

어떻게 달래지. 옛날에 영이가 이런 식으로 굴면 어떻게 해줬더라…….

이하늘이 생각에 잠긴 사이, 이공이 낮게 웃었다.

“그러게. 질투인가 봐.”

“응?”

“우리는 안 되고, 걔네는 돼서.”

그게 무슨 뜻?

물어볼 수 없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이활의 사자후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야!”

“어우…….”

“지금 시간이 몇 시야! 너 제정신이야? 누구랑 저녁을 먹었길래 이 시간에 기어들어 와!”

이하늘은 신고 먹기 전에 그의 입을 막기 위해서 이활에게 서둘러 걸어갔다.

º º º

“안녕하십니까, 이하늘 씨.”

졸린 눈을 비비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는데 바로 근처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하늘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펄쩍 뛰었다.

“아. 안녕하세요, 대표님.”

까딱 고개를 끄덕이는 하이레. 오늘도 변함없이 정갈하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늦게 출근하셨네요.”

로비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기 전, 이하늘이 대화의 문을 열었다.

정적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건 편한 상대에만 해당하는 일이었으니.

“예. 어젠 오랜만에 퇴근해서.”

……그 말은, 지금까지 퇴근을 안 했다는 거로 들리는데요.

주간 조 출근 시간은 오전 8시. 한 번도 지각한 적 없는 이하늘은 출근할 때마다 봤었다.

이미 이 대표와 교대를 마치고 작업 중인 하이레를.

그게 일찍 출근해서가 아니라 퇴근을 안 한 거였……?

이하늘은 약간 질린 얼굴을 했다가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하고 휴대폰을 꺼냈다.

“저, 대표님. 많이 늦었지만 휴대폰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레바브가 준비한 건데요. 그보다.”

“네?”

“몸은 괜찮으십니까?”

“몸이요?”

웬 뚱딴지같은 소리지? 일하는 데 불편함이 없냐는 건가?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하이레가 설명을 보탰다.

“직원이 다음 날 출근에 지장이 있을 정도의 문제가 생기면 레바브가 보고를 합니다.”

……설마.

“어제 응급실에 실려 가신 거로 압니다만.”

물론 자세한 사유는 듣지 않았다는 뒷말은 이하늘에게 닿지 않았다.

그저.

이 레바보 자식이 또 일러바쳤구나. 아니 무슨, 프라이버시가 없어……!

이 자리에 없는 레바브를 욕하느라 바빴다.

싸늘한 침묵이 돌아왔다. 이하늘이 입을 다무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장 세계가 멸망한다고 해도 표정에 금 하나 안 갈 것 같던 하이레도 이 침묵이 영 불편한 모양이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원래 레바브가 이렇게 일일이 보고하지 않는데. 저번에 소매치기도 그렇고, 이상하네요.”

“제가 신입……이라서 그런가 봐요.”

하. 하. 억지로 웃어 보이는 이하늘. 그리고 딱히 동의하지 않는 듯 대꾸하지 않는 하이레.

이하늘은 프라이버시를 챙겨주지 않는 갑 레바브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상상을 하다가 눈을 굴렸다.

“그런데 대표님은 레바브와 자주 소통하시나 보네요.”

“예, 아무래도.”

워낙 바쁘셔서 원래 레바브가 나타나는 일이 별로 없단다. 대표인 하이레와 이세현과만 대충 소통하고 사라지기 일쑤라고.

‘그럼 지금까지 대표들한테 말이 없으니 절대율 어긴 건 잘 넘어간 거라고 봐도 되나?’

띵, 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센터가 펼쳐졌다. 익숙하게 발을 내딛는 순간.

【글쎄?】

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하늘은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무슨 일입니까?”

“아뇨, 아니에요…….”

게이트에서 접촉했던 그 성신…… 목소리가 들렸는데.

착각일 것이다. 이어폰을 착용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성신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어.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렸던 방향을 확인한 이하늘은 갑자기 두통이 몰려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이 또한 기분 탓일 거다.

“나 왔어.”

레바브의 모노클만 착용한 이하늘이 야간 조이자 파트너인 임여명에게 도착했음을 알렸으나 그는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가 이런 식으로 구는 것은 이제 너무나도 익숙했기 때문에 이하늘은 아무렇지 않게 여분의 의자를 끌고 와 옆에 앉았다.

“퇴근 바로 안 할 거지,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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