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62)화 (62/90)

<제62화>

임여명은 교대 시간이 와도 바로 퇴근하는 법이 없었다. 빠르면 점심시간 전에, 늦으면 오후 늦게까지 있다가 갔다.

‘아직도 신입인 내가 못 미더운 거겠지.’

하지만 이하늘은 이제 ‘아는 게 하낟도 업는’ 수준이 아니다. 게임으로 치자면 레벨업 좀 해서 ‘아는 게 별로 업는’ 수준일 것.

왜냐.

‘성신한테 보내는 메시지 말투도 배웠고.’

소설을 통해서지만.

‘그리고 뭐냐, 게이트와 던전의 차이점도 배웠다고.’

역시 소설을 통해서지만.

그러니 이제 타이핑 업무뿐만 아니라 성신과 대화하는 업무도 해도 될 듯싶었다.

일 중독자라서, 또는 신입이라서 일을 찾아 하겠다는 거창한 마음가짐이 아니었다.

그냥 자신 때문에 임여명이 늦게 퇴근하니 마음에 걸렸던 것뿐.

근데 얘 오늘 심각하게 나를 무시하네. 무슨 일 있나?

이하늘이 고개를 기울여 임여명의 얼굴을 들여다보려는 차.

그가 덥석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깜짝이야.”

“타이핑 좀 해.”

“어?”

“빨리.”

그러면서 임여명이 곧바로 손을 놓았다. 이하늘은 영문도 모르는 채로 서둘러 접속해서 타이핑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다 발견했다.

제 긴팔 소매에 묻은 땀을. 정확히 임여명이 붙들었던 팔목 부위였다.

이상함을 인지한 이하늘은 화면에서 고개를 돌렸다.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숙인 그가 보인다.

“임여명?”

“…….”

“여명……아?”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춘 이하늘이 임여명의 어깨를 잡았다.

세상에.

땀을 미친 듯이 흘리고 있다.

아니. 왜?

센터에서는 피로가 쌓이지 않는다. 그뿐인가? 밖에서 얻은 잔병도 무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감기에 걸린 채로 센터에 들어오면 다 나은 것처럼 몸이 멀쩡해진다는 뜻.

그런 센터에서 임여명이 땀을 흘린다니.

이하늘이 그 사실을 대표에게 알리려고 입을 여는데, 임여명이 다시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허튼짓하지 말고 타이핑이나 해.”

“아니, 왜 그러는지 이유라도 알려줘야 가만히 있든 말든 하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좀…….”

뭔가 말하려던 임여명이 헉, 숨을 들이켜며 입술을 악물었다. 땀은 이제 비 오듯 흐르고 있다.

이건 심하다. 숨기면 안 된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하늘을 말릴 자, 아무도 없다.

“대표님! 임여명이……!”

다급한 목소리에 아직 퇴근하지 않은 야간 조 포함 이 대표의 시선까지 모두 이하늘에게 꽂힌 찰나.

“쿨럭!”

임여명이 피를 토했다.

“미친, 뭔……. 여명아!”

쏟아지는 핏물에 이하늘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주변에서 새된 음성이 연달아 들리는데 귀에 꽂히는 건 별로 없었다.

뭐, 왜 이러는 거지? 왜 피를…….

이유를 찾는 이하늘의 머릿속에 어느 대사가 팍 펼쳐졌다.

‘성신과 직접적으로 대면해서 그렇습니다. 격의 차이로 인해 평범한 인간의 몸이 견디지 못하는 거죠.’

하지만 그건 처음만 그렇고 나중엔 괜찮다고 했잖아. 근데 왜…….

그때였다.

하이레가 평상시에 볼 수 없는 살벌한 표정으로 다가와 책상 위 지문 인식기에 손을 댔다.

[대표의 권한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연결하겠습니까?]

[연결 완료―대표, 하이레]

화면에 간략한 문구가 떠올랐다 사라진다.

곧 책상에 손을 짚은 채로 하이레가 속삭이다시피 말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처럼, 어딘가 들끓는 목소리로.

“어디서 굴러먹다 온 성신인지 모르겠지만, 시스템에 등록하고 싶으면 절차를 순서대로 밟아야지.”

“…….”

“그래. 내가 한국 서버 대표니 나와 콘택트해. 내 직원 괴롭히지 말고.”

하이레는 누군가와 대화하는 듯했다.

잠깐 패닉에 빠졌던 이하늘의 어깨를 감싸는 손이 있었다. 이세현이었다.

“하늘 씨, 놀랐죠? 시스템에 등록하지 않은 성신이 다짜고짜 콘택트하면 이러는 경우가 있어요. 보통 대표한테 접촉해 오기 마련인데 저렇게 뭘 모르는 성신이 가끔…….”

레바브 시스템.

세계에 뿌리내린, 성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대표적인 연결 고리.

어느 성신이든 인간과 언약하고 싶다면 무조건 이 시스템에 등록, 다른 말로 가입을 해야 했다.

하이레의 표현대로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성신 역시 시스템에 가입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문제는 미가입 성신은 가입한 성신과 달리 ‘날것’ 그대로라는 점.

즉, 성신 대면에 익숙한 시스템 운영자라 할지라도 미가입 성신과 접촉하면 몸에 직접적인 부작용이 오는 것이다.

다만 레바브에게 혜택을 좀 더 받은 대표는 달랐다. 그렇기에 보통 미가입 성신은 대표와 콘택트해 시스템에 가입하기 마련이다.

이세현의 말대로 뭘 모르는 성신이 무턱대고 운영자와 접촉하는 경우도 더러 있긴 했지만.

“근데 여명이가 왜 바로 안 알리고 바보처럼 버텼지?”

그럴 때는 즉시 미가입 성신과의 대면을 중단하고 대표에게 알리면 된다.

“흐음. 하늘 씨는 미가입 성신과 콘택트하게 되면 저런 식으로 버티지 말고 대표에게 알려야 해요, 알았죠?”

임여명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하늘은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근데 임여명 괜찮은 거 맞죠……?”

“아, 걱정 말아요. 휴게실에서 쉬면 좀 괜찮아질 거야.”

막 퇴근하려는 야간 조 몇이 임여명을 부축했다. 휴게실로 가려는 모양이었다.

쉬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에 이하늘이 안심하며 겨우 시선을 떼는 차였다.

부축받으며 스쳐 지나가던 임여명이 느닷없이 이하늘의 손목을 붙잡았다.

오늘로써 몇 번째 그에게 붙잡힌 이하늘이 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냐고 묻지도 못했다. 임여명이 다짜고짜 요구했으니까.

“너도 가.”

“뭐?”

“너도 휴게실 가라고. 나랑, 빨리.”

피로 얼룩진 입으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하늘이 미간을 찌푸렸다.

“얘가 뭐라냐. 신입 씨는 일해야지, 너 많이 아프냐?”

그를 부축하던 야간 조 ‘박하사탕’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빈정거린다.

그러나 임여명은 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이러는 게 이상해 결국 그의 뜻대로 일단 휴게실까지 따라가 주려는 순간이었다.

백색소음처럼 들리던 하이레의 목소리가 끊긴 것을 깨닫고 이하늘이 잠깐 앞을 보았다.

하이레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낮게 속삭인다.

“직원과의 콘택트는 불가하다고, 방금 말했는데. 왜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지?”

그 두 마디에 우습게도, 이하늘은 한 가지 가능성을 머릿속에 전개했다.

센터에 오자마자 들렸던 저번 그 성신의 목소리.

임여명은 저를 끌고 가려고 한다. 흡사 자리를 피하게 만들려는 것처럼.

그리고 마지막.

하이레의 의미심장한 말.

이건 마치…….

이하늘은 홀린 듯 주머니에서 레바브의 이어폰을 꺼냈다.

신입이라는 이유로 타이핑 업무만 해왔던 그녀는 입사 첫날과 게이트에 휘말렸던 날을 제외하고 이어폰을 꽂은 적이 없다.

“야, 그냥 가자니까……!”

그러나 지금.

임여명의 만류에도 이하늘은 그것을 귀에 꽂았다.

그러자 바람처럼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눈치도 참 빨라, 나의 주인공은.】

기다렸다는 듯이 뺨을 톡 건드리고.

【나는 다시 만나기만을 기다렸는데…….】

어울리지 않게도 조심스레 묻는다.

【너는 날 기다렸나?】

º º º

반대편, 거꾸로 솟은 탑 내부.

한가운데 놓인 책상 위에서 낡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이가을이 눈을 떴다.

빛 한 점 들지 않은 메마른 눈동자가 또르륵 굴러 어느새 손에 들린 책을 본다.

“왜 이렇게.”

팔락. 넘어가는 책장.

“내 동생을 끌어들이는 새끼들이 많지…….”

나직한 중얼거림을 끝으로 그가 탁, 책을 덮었다.

º º º

레바브탑 최상층 센터의 휴게실.

침대 위에 기절하다시피 잠든 임여명을 보던 하이레가 근처 의자에 앉았다.

‘대표님. 이 성신 저와 콘택트하고 싶다는 거죠?’

‘제가 할게요. 시스템 가입시키기만 하면 되나요?’

‘괜찮아요. 이상하게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조금 두통은 이는데…….’

‘가입시키는 방법은 뭐예요?’

이하늘이 이어폰을 꽂고 잠시간 침묵하더니 대뜸 하던 말이 저거였다.

하이레는 다 차치하더라도 한 가지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고작 두통만 인다고?

10년간 시스템 운영자 대표로서 많은 성신을 만나보았다.

그러나 방금과 같은 성신은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절차라면 대표인지 뭔지와 진행하라는 건가…….】

【네가 대표? 다시 들어도 웃기는 표현이군.】

【글쎄, 내가 원하는 건 열 번째 운영자라.】

딱 몇 번째 운영자를 지목한 것도 방금 그 성신이 처음이었고.

하이레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침대 근처 테이블 위의 휴지를 뽑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피를 뱉었다.

이렇게 육체적으로 무리가 오게 만든 것도 그 성신이 최초였다.

‘그런데…….’

고작 머리만 아프다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