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63)화 (63/90)

<제63화>

하긴, 이하늘은 최초로 채널 접속을 했을 때도 유일하게 멀쩡했던 사람이다. 정신력이 대표인 저보다 방대해 두통으로 그칠 수도 있겠지.

그러한데 왜 그런 사람을 10년이 지난 후에서야 레바브가 발견한 걸까.

하이레가 턱을 문질렀다.

대표를 제외한 시스템 운영자에게는 순위가 존재한다.

1위인 임여명부터 9위인 안지희까지.

노골적이지만 확실한 순위는 한 가지를 뜻한다.

각자 지닌 정신력의 크기.

즉, 10년 동안 공석이었던 열 번째 시스템 운영자 자리는 안지희 다음으로 방대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에게 주면 되었다.

하지만 레바브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의 주인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처럼.

그런데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저다지도 정신력이 방대하다라.

왜 10년 전부터 이하늘 씨를 선발하지 않은 거지, 레바브?

이유가 뭐야.

〔ㄴ무 파고듦녀 닻쳐ㅠ〕

곧바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전혀 영양가라곤 없는 대답이었지만 거기서 힌트를 못 얻을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절대율을 어길 정도의 금기인 거군. 이와 관련된 주제가.

다행히 그는 더 파고들 생각이 없었다. 절대율을 어길까 우려되어서는 아니다.

지나치게 파고드는 건 어찌 됐든 그녀에게 실례였다.

실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직원들의 인적 사항도 딱 필요한 것만 읽는 그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

하이레는 피로 물든 휴지를 휴지통에 버리며 일어났다.

º º º

“후우…….”

<성신을 시스템에 가입시키는 방법♡>을 이세현에게 받은 이하늘은 몇 번 정독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긴장되었다.

【애국가를 부르면 되겠네.】

“…….”

이 성신, 뭐지?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나를 아는 것처럼 군다.

이런 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으므로 이하늘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요, 성신님. 혹시 저를 아세…….”

【잠시. 대화하기 전에 장소를 좀 이동할까.】

성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하늘의 배경이 변했다. 물에 물감이 퍼지는 것처럼 스르륵.

어디서 겪어본 광경이었다.

이건, 음. 그러니까…….

【채널 접속.】

아, 맞아. 채널 접속.

“근데 저 채널 접속 누르지 않았는데.”

【내가 널 초대한 거니까, 당연히.】

“그럼 여기는 성신님 채널인 거예요?”

미가입 성신이랬으니 언약한 상대도 없을 터.

그래서인지 머리로 장난치는 성신과 달리 채널이 그저 새하얬다.

어디가 끝이고 시작점인지 알 수 없는, 그저 새하얀 공간.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책상 의자와 함께 이동한 이하늘은 오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뻘쭘했다.

바람이 황당하단 목소리를 냈다.

【상상도 참 기가 막히게 해. 오점이라니.】

“저, 근데 왜 계속 제 생각을 읽으시죠?”

다른 성신들은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이 성신만 유일하게 생각을 읽어댄다.

불쾌함을 내비치며 프라이버시를 주장하는 이하늘에 성신이 유쾌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을 뱉어볼 테니 억울해도 참아보는 게?】

“어이없네…….”

【물론 생각하는 족족 말을 뱉으면 네가 내게 실망할 것 같으니 검열을 좀 해야겠지만.】

“무슨. 제 생각은 뭐 깨끗한 줄 알아요? 그냥 읽지 말아요.”

【적어도 나보단 깨끗한데.】

뭔가 더 말하려던 이하늘은 꾹 입을 다물었다. 이 성신과 이야기하다 보니 왠지 모르게 말리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미가입 성신님, 레바브 시스템에 가입하기 위해서 찾아오신 게 맞습니까?”

【아니지, 아니지.】

뭐가 아니야.

【내게 물어볼 것, 따로 있었잖아.】

본론으로 어서 넘어가 가입 절차를 밟고 싶은데 능구렁이처럼 피한다.

이하늘은 그를 노려보고 싶었으나 이 성신은 다른 성신과 다르게 홀로그램이 없었다.

대신 <성신을 시스템에 가입시키는 방법♡>을 노려보던 이하늘은 심호흡을 했다.

“생각을 읽으실 수 있으니 저에 대해 아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 같아 더 묻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흐음……. 그래. 가입하러 왔다고 하자.】

왔다고 하자?

이곳에 당도한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어서 끝내고 돌아가고 싶은 이하늘은 대충 넘기며 레바브 시스템 이용약관을 내밀었다.

“어디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가입하시기에 앞서 이용약관을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제대로 읽지 않아서 생기는 모든 문제는 레바브 시스템이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 명심해 주세요.”

【같이 읽을까?】

“믕슴흐즈스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 같이 읽을까?】

아 씨…….

대표와 콘택트하지 않고 자신을 지목했을 때부터, 아니 게이트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정말 제멋대로인 성신이다.

이하늘이 투덜거렸다.

“어디 계시는데요.”

【네 곁에.】

분명히 목소리는 오른쪽 이어폰을 통해서 흘러들어 온다. 그런데도 바로 곁에서 중얼거린 것처럼 생생하게 들리는 이유는 뭐지.

이하늘이 귓가를 매만졌다.

“그럼 제가 넘겨드릴 테니까 다 읽으시면 말하세요.”

시간이 흐른다.

하늘이 묻고, 별이 답한다.

팔랑거리는 소리. 다시 묻는 소리. 또 대답하는 소리.

끝에 가서는 어느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다 읽었느냐고 묻던 하늘이 함께 읽다 집중한 탓이다.

그리고 별은 그런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가 읽으라던 이용약관인지 뭔지에는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이 미칭뇬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용약관을 다 읽은 이하늘은 스스로의 멍청함에 치가 떨려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용약관을 왜 네가 읽어. 응? 너 멍청이야? 임여명 말대로 정말 멍청이냐고.

뻔뻔해지자. 시간 낭비했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지만…… 성신이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건 맞으니까.

가입하려는 성신은 보통 이용약관을 안 읽거나 대충 읽고 넘긴다는 걸 모르는 이하늘은 정신승리에 성공하고 헛기침했다.

“이, 이용약관 다 읽으셨나요?”

【그래. 입 아프게 묻지 말고 그냥 동의한다고 체크해.】

이하늘이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무시 가능한 수준의 두통이 점차 찌를 듯한 고통으로 변해갔기 때문이다.

성신이 혀를 찼다.

【뭘 했다고 벌써 아파.】

“제가 보기엔 성신님이 말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저번에도 성신님이 말하니까 머리가 아팠거든요.”

【그러니까 닥쳐라?】

그렇게까진 말 안 했는데.

허공에 뜬 화면을 보며 일일이 동의 칸에 체크를 마치자 빈칸 가득한 화면으로 변했다.

“자, 그럼…… 여기 빈칸 작성해 주시면 돼요. 앞으로 센터에서 불리고 언약자에게 보일 수식언, 언약하시고 싶은 상대, 그 밖에 이 세계에 온 정확한 목적 등등.”

전술한 세 가지 말고도 뭐가 많았다. 이하늘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마저 읽는 그때.

성신이 괴상한 소리를 했다.

【수식언은 나의 주인공이 지어줬으면 좋겠는데.】

“네?”

【제대로 들었으면서 못 알아들은 척하기는.】

성신의 말대로다. 이하늘은 전부 알아들었다.

아니, 근데 무슨 수로 수식언을 지어주라는 거야.

창의력이 부족한 이하늘은 얼굴을 구겼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한테 맡기시면 큰일 날걸요. 아무렇게나 막 지을 수도 있어요.”

【그것 기대되는군.】

허, 기대?

“막…… 유치하게 전지전능한 절대자, 이렇게 입력해 버릴 수도 있다고요. 그래도 좋아요?”

이것까지 버틸 수 있느냐, 라는 심정으로 소설에서 봤던 것을 떠올리며 말한 이하늘이었으나.

하늘 위에는 별이 있는 법.

【그래도 좋아.】

산뜻하게 흘러나오는 별의 대답. 그에 응한 화면에 글자가 저절로 입력되었다.

/전지전능한 절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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