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이하늘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러나 이어폰을 꽂은 오른쪽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이어폰이 아닌 근방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음, 어떻게 설명해야 네가 이해하기 편하려나.】
【나는…….】
【도서관 하나를 가지고 있단다.】
【거기엔 ■■의……. 저런, 필터링 되는군.】
【아무튼 책 중에 차마 건드릴 수도 읽을 수도 없었던 책이 하나 있었는데.】
잘 잇다가 돌연 말을 멈추는 별.
곧 땀에 전 이하늘의 이마를 문지른다. 보이지 않지만, 그리 느껴졌다.
【일단 내 성성(星性)을 좀 바꿔야겠어.】
【너와 편히 대화하려면 이쪽이 더 좋지만.】
깜박, 이하늘이 눈을 감았다가 뜨자 모노클 앞 채팅 창에 올라온 성신의 말이 변했다.
정확히는.
〖그렇다고 네가 아픈 걸 두고만 볼 순 없으니.〗
괄호 색이.
〖어때, 나의 주인공. 두통은 좀.〗
어쩐지 깨끗해진 바람의 웃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가라앉았나?〗
저 높은 어딘가에서 친히 굽어본다고 다 ‘같은 별’이 아니다.
별마다 가진 성질(星質)이 다르니까. 그리고 시스템은 그것을 크게 세 갈래로 나눠 분리했다.
길성(吉星).
〖유치하게 이딴 색으로 구분하는 게.〗
흉성(凶星).
【웃기긴 하나…….〗
살성(殺星).
【이보다 효과적으로 구분할 방법이 없긴 하지.】
말하는 족족 변하는 괄호 색을, 이하늘은 눈살을 찌푸리며 관찰했다.
그러고는 얼떨떨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착한 놈, 덜 나쁜 놈, 나쁜 놈이라는 거네요?”
〖글쎄……. 좋을 대로 생각해.〗
“성신님은 원래 나쁜 놈이셨고.”
〖글쎄……. 그것도 좋을 대로 생각하길.〗
무슨 말이 그래.
불친절한 설명에 샐쭉해진 이하늘이 한참 후에야 물었다.
“근데 괄호 색깔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거예요? 바꿔도 되는 거고?”
〖그야 난 못하는 게 없고 날 막을 자도 없어서.〗
“아하……. 그 ‘전능’하시고 ‘절대자’이신 별님이지, 참.”
누가 지은 건지 정말 잘 지었네요, 그쵸?
어쨌든 다른 성신들은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요, 저 다른 성신님과도 대화해 본 적 있거든요. 그런데 그분들이랑 대화할 때는 머리가 안 아팠어요.”
그런데 왜 성신님만 나쁜 놈이란 이유로 제가 두통에 시달리고 땀까지 흘리는 걸까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질문이었으나 상대는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별.
꽤 유쾌하게 대답한다.
〖다른 것들과 나를 비교하면 안 되지.〗
음…….
이하늘은 온데간데없어진 두통의 흔적을 찾으려다가 포기하고 인정했다.
“어쨌든 착한 별 되시니 훨씬 편하긴 하네요. 진작에 바꾸시지. 임여명, 피까지 토했단 말이에요.”
〖그럴 이유가 없지만…… 설령 내가 공을 들여 바꿨어도 똑같았을걸.〗
그보다, 나의 주인공.
목소리가 후욱 들어왔다.
깜짝 놀라 그만 좀 속삭이라고 저도 모르게 성깔 부릴 뻔한 이하늘은 멈칫하며 채팅 창에 눈을 고정했다.
분명히 별은 말했고 하늘은 들었는데 채팅 창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아해하던 중, 성신의 말이 올라왔다.
〖나의 목적이 무엇이냐 물었지.〗
〖전해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
〖나는 책 한 권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되찾으려고 해.〗
책?
〖그리고 그 책의 주인공은…….〗
하늘밖에 없는 새하얀 공간에 상냥한 바람이 인다.
새하얀 공간만큼이나 하얗게 보이는 금발이 살랑이고 폐부까지 청량한 공기가 들어차면.
〖너란다.〗
왜 계속 ‘주인공’이라 불렀는지 이유를 말해 주는 목소리가 있다.
“저라……고요?”
〖그래.〗
“제가…… 소설 속 주인공이라고요?”
보호 센터에서 2주간 격리당하면서 임여명이 사다 준 소설을 완독한 이하늘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으니.
웹소설 읽기다.
그중에 흔한 것이 빙의물.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이하늘의 생각은 이리 튀는 것이다.
허업, 내가 알고 보니 소설 속 주인공? 그럼 빙의자는 누구? 아니지, 빙의물이 아닐 수도 있…….
별이 찬물을 끼얹었다.
〖소설이라고 안 했는데.〗
“뭐예요. 주인공이란 역할이 있으면 소설이죠.”
아무튼.
“그래요. 제가 주인공인 책을 성신님이 잃어버려서, 네. 찾으러 왔다고 칩시다.”
전혀 믿지 않는다는 어투로 중얼거린 이하늘이 이맛살을 구겼다.
“전지전능한 절대자신데 똑같은 책을 못 만들어요?”
〖텍본 긁는 짓은 안 해. 불법이잖아.〗
“……아, 넵.”
기상천외한 답이 흘러나와 잠깐 굳은 이하늘은 괜히 뺨을 긁었다.
아니, 그래요. 텍본은 불법이죠.
근데 역시 영, 개소리 같은데.
내가 주인공인 책? 그런 게 왜 있는지도 모르겠고 애초에 믿기지도 않는다.
사실이라 해도 왜 내가 주인공인 책을 찾으러 예까지 직접 당도하시냐구.
‘그리고.’
이하늘이 가장 중요한 생각을 했다.
‘왜…… 멋대로 내가 주인공인 책을 만들지?’
그거 누가 쓴 거죠? 시중에 판매되는 책이면 저에게 돈은 주시나요?’
〖정말이지 기발한 생각을 하는구나.〗
하나뿐인 책이니 애쓰며 찾아다녔던 것 아니겠냐는 성신.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하늘은 대충 넘겼다.
“아무튼 책을 찾으러 오셨다니. 언약하기 위해서 오신 건 아닌 거네요?”
〖그러하다면?〗
“죄송하지만 성신님. 마음에 드는 각성자를 만나셨을 때 한국인이 아니면 어쩌시려고요. 한국 서버에 가입하시면 다른 나라 각성자와는 언약하지 못한답니다.”
그래서 보통 성신들은 마음에 드는 각성자를 만나고 나서야 시스템에 가입한다고, 이용약관에 적혀 있다고 알려주었다.
“게다가 탈퇴가 얼마나 번거로운데요. 한국 서버에 함부로 가입하시잖아요? 한국인 각성자와 한 번은 언약을 맺고 끊은 후에야 탈퇴하실 수 있어요. 이용약관에 적혀 있잖아요. 방금 보시지 않았어요?”
팔랑팔랑, 이하늘이 집중하며 읽은 이용약관을 계속 넘겼다.
“음, 다른 성신님들보다 대단……하신 것 같으니 강조해 드리는데, 시스템에 가입하시면 ‘소속’되시기 때문에 뭐가 제한되는 것이 많을 거고…….”
〖기특하게도 이리 나를 걱정해 주니.〗
기나긴 말을 자른 별이 느른하게 웃는다.
〖나는 어떠한 것에도 국한되지 않고.〗
〖또한 국한된다 한들 내 목적은 너니까.〗
〖기꺼이 두 손 내밀어 구속될 수 있단다.〗
〖그러니 걱정 말고 마저 진행해, 나의 주인공.〗
말이 맺어지자마자 또 화면에 많은 것들이 저절로 입력된다. 공란도 몇 있었으나 빠르게 지나가 무엇이 비었고 쓰였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도 끝나 간다. 의문스럽기만 한 성신의 등록이, 아니.
구속이.
〖시작은 이미 예전에 알렸고.〗
〖이제 끝을 향해 달려야 하는 법.〗
넓게 퍼지는 공명, 사위가 변한다.
먼 곳에서 광채가 솟아오른다. 끝도 없는 바람이 태어나고 하늘의 색이 다채롭게 변한다.
끊임없는 시간, 멈추지 않는 기록.
속속히 머릿속에 들어오나 감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것.
만물(萬物).
〖물론.〗
〖끝은 새로운 시작이니 결국 영원할 것이다.〗
〖너는 그저, 그 모든 것을 내가 곁에서 볼 수 있게 허락해 주면 되노니.〗
그럼 나 또한 내 모든 것을 너에게 바치겠노라.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요?
닿지 않는 목소리였으나 ‘바람’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니 듣지 못할 것도 없었다.
〖말했잖아, 무지한 아이야.〗
〖나는 책을 잃어버렸고…….〗
〖너는 그 책의 주인공이지.〗
그러니까 그 책을 찾으면 되잖아요. 그게 더 편하고 빠를 텐데…….
〖글쎄.〗
〖나는 글보다 실체가 좋고.〗
〖버젓이 눈앞에 실체가 있는데 어찌 글로만 만족하고 지나칠 수 있을까.〗
그때, 하늘과 별 사이에 끼어드는 창이 있었다.
「⚠경고⚠―오류 발생!」
「현격한 격차로 인해 등록이 불가합니다. 포기하시겠습니까?」
「수리합니다.」
「궁극적 존재의 포기로 격(格)이 박탈됩니다. 격차가 줄어듭니다, 격차가 줄어듭니다, 격차가 줄어듭니다, 격차가 줄어듭니다…….」
「축하드립니다. ■■■ 어스―대한민국 서버에 성공적으로 등록을 마치셨습니다.」
「환영합니다. ‘전지전능한 절대자’.」
〖아무리 그래도 대우를 안 해주면 불쾌하지.〗
우습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 불쾌함은커녕 하늘 앞이니 상냥하게 굴겠다는 것처럼 꽤 유순했으나…….
「환영합니다. ‘전지전능한 절대자’ 님.」
심기를 건드리긴 싫어서 재빠르게 수용한다.
그것을 끝으로 이하늘의 눈이 속절없이 감기기 시작했다.
책을 잃어버려 찾으러 왔다는 성신. 그러나 책보단 실체가 좋으니 직접 곁에서 관찰하겠다는 성신.
알겠어. 알겠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설명 안 되는 것이 있다.
이 성신의 밑도 끝도 없는 호의와 호감은 언제 시작되었고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걸까?
그냥, 잃어버린 책의 주인공이라는 이유 하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