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즉, 문제를 틀렸을 시 쏟아지는 몬스터가 A급일 수도 있고 F급일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이 게이트가 F급인 이유는 단 하나.
문제가 열라 개쉽다는 거다. 다름 아닌 본인의 기억 문제니 당연했다.
“영민하시군요.”
외국인의 말에 이하늘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게이트 도감’을 최근에 읽어서요.”
“아, ‘게이트 도감’. 저는 아직 읽어본 적이 없어서.”
엥?
이하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과 며칠 전까지 ‘게이트 도감’을 읽지 않았던 사람이 생각할 만한 건 아니지만.
‘나보다 더한 사람이 있었다니……!’
곧 이하늘은 그러려니 하며 2/4라 적힌 숫자를 보았다.
“문제만 안 틀리면 쉽게 게이트에서 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저기서 4가 의미하는 건 문제를 풀 때 필요한 인원수. 현재 이곳에 있는 건 자신과 외국인뿐이라 그 앞에는 2라고 적힌 듯했다.
최소 게이트에 4명 이상 휘말렸다는 뜻이므로 2명을 더 채우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문제는 헌터가 한 명이라도 없으면 ‘파이널 페이지’에 도착했을 때 코어를 습득할 수 없다는 건데요…….”
뭣보다 헌터가 없는 채로 문제를 풀어 나가게 되면, 문제를 틀렸을 때 쏟아지는 몬스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레바브에게 선택받아 각성자가 되지 않고서야 헌터 없이 깨는 건 불가능.
그나마 다행인 건 세 시간 동안 죽치고 고기 파티했던 사람들이 헌터들이라는 것?
‘그중 한 명이라도 함께 휘말렸으면 괜찮은데.’
“그래도 혹시 헌터 없이 해야 할까 봐 걱정이네요…….”
이하늘이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쉰 순간.
스윽, 하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손이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이하늘이 고개를 들자 아무렇지 않게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준 외국인이 웃는다.
뭐야, 이 새끼? 언제 봤다고 이렇게 스스럼없이…….
초면에 스킨십하는 남자에겐 가차 없는 이하늘은 단숨에 외국인의 호칭을 ‘새끼’로 격하했다.
“제가 운이 좋아요.”
게다가 뜬금없는 소리까지 한다.
이하늘은 대놓고 옆으로 슬쩍 피했다.
“그러세요? 그렇군요…….”
“서프라이즈로 한국에 왔는데 놀래주려 했던 사람은 이미 한국에 없더라고요. 요즘 뭐를 깨고 다닌다나.”
더불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신다.
이하늘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을 굴릴 때.
“그래서 웬일로 운이 없지, 했는데 꿩 대신 닭이라고 늘 궁금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났지 뭐예요.”
딱 멀어진 거리만큼, 외국인이 다가온다.
“거기다가 이런 이벤트까지 생기고. 역시 운이 좋네요, 저.”
무슨 삽소리지, 진짜. 운이 좋든 나쁘든 어쩌라고…….
표정 관리에 실패한 이하늘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헌터가 없으면 운이 좋아도 소용없는데요.”
“오, 농담인 줄 알았는데 모르는 거였구나.”
외국인이 낮게 웃는다.
“저 헌터예요. 행운아 시몬.”
행운아 시몬?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한국 헌터도 모르는데 외국 헌터를 어찌 알랴.
아무튼 헌터라니. 헌터 없이 게이트를 닫아야 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졌다.
근데 웃기는 사람이야. 헌터면 게이트 정보 창 볼 수 있었을 텐데 나한테 왜 물어봐.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차 물어본 건가?
이 와중에 이하늘에게 궁금증이 하나 더 생겼다.
외국인 헌터가 우리나라 게이트에 휘말리면…… 외국인에게 레바브 창을 누가 보내지?
외국인 나라의 시스템 운영자? 아니면 한국인 시스템 운영자?
꽤 뜬금없는 궁금증이었으나 시스템 운영자인 이하늘은 퍽 진지했다.
º º º
시스템 운영자 대표 둘은 직원과 달리 주 6일 근무하며, 그중 하루는 당직이다.
당직 날짜는 매달 금요일과 토요일 중 각각 하나씩 선택. 그리고 이번 달 토요일 당직은 하이레였다.
어차피 센터에 머물면 피로도 쌓이지 않고, 잠도 원체 많지 않은 편이라 당직에 별다른 유감은 없었으나.
당직하는 날이 하필 임여명과 이하늘도 쉬는 날이라 그들이 담당한 성신을 도맡게 되면 아무리 하이레여도 조금 피곤했다.
【이런 빌어먹을! 방금 균열이 벌어졌다! 내 언약자가 들어갔어!〗
【배고플 텐데……. 식당이 난리가 났네.】
【채널 접속해라, 망할 대표! 내 언약자가 들어갔단 말이다!〗
【약자야, 걱정하지 마. 아무것도 아니었던 너도 살아남았잖아. 누나를 믿어보자, 응?】
“하아…….”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손이 부족했을 터다. 하지만 레바브에게 더 나은 혜택을 받은 하이레는 멀티 플레이를 시도하며 입을 열었다.
“채널 접속은 못 한다. 한가하지 않은 거 알지 않나.”
【뭐라? 이 발칙한 대표 놈이!〗
하이레는 익숙하게 ‘머리’ 성신의 고함을 무시하며 서울 마포구에 뜬 게이트의 정보를 떠올렸다.
F급에 인원 제한.
일반인들만 휘말린 거라면 모를까, 최가영도 게이트에 들어갔다면 사상자가 발생하진 않을 거다. F급이니 조금 오래 걸릴진 몰라도.
성신의 도움이 당장 필요한 게 아니니 반드시 채널에 접속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불편해도 위에서 지켜봐. 왜 굳이 가까이서 보려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군.”
하긴, 성신들의 괴팍한 속을 한낱 인간이 어떻게 이해하랴.
또다시 몰아치는 ‘머리’의 호통. 그로 인해 다른 성신들의 목소리가 묻혀서 하이레는 일시적으로 그의 볼륨을 낮췄다.
그리고.
“…….”
눈을 한 번 깜박였다 뜨자 누군가의 채널에 들어와 있었다.
이게, 무슨…….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 분간이 안 가는 백색 공간에 영화관 같은 커다란 창이 떠 있다.
채널에 2D로 입장했을 때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하이레는 스스로의 행동을 뒤돌아봐야 했다.
내가 지금, 채널 접속을 눌렀던가?
〖아니니까 진정하고.〗
성신들의 말소리가 뚝 끊긴 이어폰에서 두통을 유발하는 음성이 들린다.
하이레는 홀로그램을 찾으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그 어디에도 없었다.
〖피곤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언약자도 없는 지금, 어떻게 채널을 만들었지?”
가입 전에 멋대로 자신의 직원을 제 공간에 부른 건 이해할 수 있었다.
‘날것’이니 뭔들 마음대로 못 하겠어.
하지만 가입한 지금, 최소한 채널은 통제받아야 했다. 그게 레바브가 정한 ‘선’이니까.
짜증이 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첫째,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둘째, 내가 지금 피곤해. 셋째, 그런데 바빠. 넷째, 그래서 짜증이 나거든.〗
〖그러니 묻는 말에나 대답해.〗
별이 물었다.
〖다른 나라 놈이 이 나라에서 설치기 직전인데 밖으로 내쫓지 못하나?〗
“뭐?”
〖■ ■■■까지……. 뭔 말을 못 하게 해.〗
〖하긴, 일개 시솝이 뭘 할 줄 알겠냐마는.〗
〖쯧, 모든 게 엉망이군. ■■을 간단히 막은 것처럼 말해서 느긋하게 연애나 하려 했더니.〗
들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길게 중얼거리던 별은 곧 쓸데없는 것을 괜히 불러왔다는 것처럼 귀찮은 어조로 명령했다.
〖모노클과 이어폰을 그 애에게 전달해. 지금 가지고 있지 않아 곤란할 테니.〗
“정황을 설명해.”
피곤하다는 말이 진실인지 어디선가 들려오는 한숨 소리가 무겁다.
곧 켜지는 화면.
그 속에 이하늘이 있다. 어느 모로 보나 게이트에 있는 이하늘이.
“……레바브가 알려주지 않았는데.”
〖걔가 요즘 바빠. 설치는 게 이 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대답은?〗
하이레가 침묵 끝에 답했다.
“본인이 소지하고 있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오래 산 나보다 유연하지 못한 인간이라니.〗
미약하게나마 온화했던 목소리가 낮아진다.
〖불가하면…….〗
서늘한 바람.
〖가능케 해야지.〗
고작 손끝이었다.
겨우 1초도 되지 않는 찰나.
하이레가 착용하고 있던 모노클과 이어폰에 별이 손을 댔다. 단지 그만으로도 목을 비트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이러한 고통은 레바브를 목도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하이레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순간.
용건이 끝났다는 듯 시큰둥한 목소리가 하이레의 등을 떠민다.
〖이제 됐어, 돌아가.〗
〖그러다 죽겠네.〗
º º º
시몬.
10년 전 재앙이 시작되면서 터진 균열에 휘말린 자.
첫 재앙 때 나타났던 균열 대부분의 유형은 인원 제한이었고 그 균열을 닫기 위해선 두 가지를 기대해야 했다.
하나. 게이트에 빨려 들어간 민간인들이 게이트를 닫거나.
둘. 게이트에 휘말린 민간인들이 전부 죽거나.
전자는 레바브에게 선택받아 각성하면 이룰 수 있었으니 언급되었던 희망적인 사항이었다. 그러나 후자는…….
게이트에 들어간 인원이 제로가 되면 각성자들이 진입해 폐쇄할 수 있었기에 언급되었다.
한마디로 최악을 바라야 했다는 뜻.
그렇게 인원 제한 게이트가 우후죽순 닫혔다. 전자보다 후자로 인해 닫히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