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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70)화 (70/90)

<제70화>

하지만 전자에도 후자에도 해당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으니.

휘말린 민간인이 레바브에게도 선택받지 못하고, 죽지도 않는 경우 말이다. 그러면 게이트가 닫히지 않고 계속 임시 폐쇄된 채로 유지되었다.

1년 이상 닫히지 않는 인원 제한 게이트를 일컫는 말, 스테잉 게이트.

그리고 시몬은 10년 만에 스테잉 게이트에서 올해 1월에 살아 돌아온 자였다.

민간인이었던 그가 살아 돌아온 이유는 한 가지를 뜻했다. 그가 레바브에게 선택받아 각성했다는 것.

백악관은 바로 그의 각성 여부를 확인했다. 결과는…….

‘말도 안 돼. 미각성자라고?’

‘코어는 일반인이 잡으면 죽어버리는데 어떻게……!’

‘다시 해봐!’

결과는 똑같았다.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이 한뜻으로 물었다. 게이트에서 대체 무엇을 했느냐.

시몬은 대답했다.

‘A silent mouth is melodious.’

뭐어……. 간단히 말해 입을 닥치고 있겠다는 뜻이었다.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헌터가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런 헌터가 없었으니 끝내 시몬에게서 얻은 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스테잉 게이트에서 나온 지 한 달도 안 됐을 때.

덜컥 백악관은 발표했다.

시몬이 S급이 되었다고.

º º º

이하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어요. 당신 꽤 드라마틱하게 헌터가 되었군요. 왜 행운아를 이름 앞에 붙였는지도 알겠네요, 넵.

하지만 게이트에 휘말린 지금 그의 역사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10년 동안 게이트에 갇혔던 건 조금, 아니 많이 안쓰럽긴 한데……. 솔직히 말해서 어쩌라고 싶다.

그냥 빨리, 다른 두 사람이 와서 망할 게이트 밖으로 나갔으면 좋겠는데.

이하늘은 가만히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검은 정장을 입었던 헌터들과 사장님, 직원, 그리고 메뉴판으로 얼굴을 가리던 사람…….

그중 누가 들어왔을까.

“기억해요? 제가 한국에 온 이유.”

시몬은 성격이 굳센 편이었다. 반응을 안 하는데도 끈질기게 말하는 것이 대단했다.

“놀래주려 했던 사람, 그 사람이 오래도록 염원하는 것이 있어요.”

그러시군요…….

“무엇인지 짐작이 가나요?”

아니요. 하지만 안 궁금하네요…….

“동생을 막아야 한다더군요. 정확히는 손가락 놀리는 걸 관두게 해야 한다나.”

손가락 놀리는 거?

외국인의 표현이 기가 막혀 이하늘의 눈썹이 올라갔다.

“옆에서 지켜봤는데 너무 빙 돌아서 가는 게 아닌가 싶고.”

혼자서 주절주절 말하는 외국인의 입을 어떻게 틀어막을까 고민할 때쯤.

시몬이 조각상 같은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말을 뱉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축구 선수가 축구를 포기하게 만들려면 발을 자르면 되잖아요?”

……뭐?

“가수가 노래를 포기하게 하려면 성대를 망가뜨리면 되듯이.”

흘러나오는 말들이 죄 잔인하다. 이하늘은 그제야 시선을 돌려 시몬을 응시했다.

눈을 이제라도 맞춰줘서 기껍다는 듯 웃는다. 잿빛 섞인 녹안이 휘어지는 눈매에 따라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동생 손가락을…… 막고 싶으면.”

잘라버리면 되지 않나.

“이 방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갑자기 멋대로 머리카락을 만지질 않나, 이젠 또라이 같은 소리를 유순하게 한다.

이하늘이 난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시몬에게 물었다.

“지금 저한테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는 이유가 뭔데요? 하나도 재미없는데.”

피가 이어지지 않았더라도 쌍둥이들의 누나였다. 이하늘의 성정 또한 만만치 않다는 뜻.

꽤 공격적인 말투에 시몬이 두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이 과거 ‘악의 지하굴’에서 이하늘을 조심스럽게 대했던 소악마와 유사해 보였다.

“그냥 고민이에요. 내가 보기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계속 돌아가려 하니까.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해서.”

“급할수록 돌아서 가라는 말은 외국에 없나 봐요.”

“하하. 있긴 하지만.”

있는데 왜 지랄이세요.

반사적으로 신랄하게 말할 뻔한 이하늘은 심호흡했다.

“아무튼 저는 이 게이트에서 나가는 게 가장 중요해서요. 그런 말은 본인에게 직접 해보세요.”

“직접 말하긴 했어요. 손가락 자르면 되지 않느냐고.”

“그러시구나…….”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을지 안 궁금해요?”

“안 궁금해요.”

이하늘은 칼같이 말하고 휙 등을 돌렸다. 뒷문이 열릴 기미가 안 보이니 앞문 근처에라도 가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시몬은 뭘 그렇게 알려주고 싶은지 긴 다리를 이용해 이하늘 앞을 막았다. 이어서 허리를 숙이고 조용히 속삭인다.

“고려해 보겠대요.”

“…….”

와…….

이하늘은 마른세수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드는 생각이라곤 하나뿐.

진짜 뭐 어쩌라고. 감상평이라도 남겨주길 바라나?

내뱉을 수 있는 감상평도 단 하나뿐이었다.

동생분이 누군지 몰라도 참 안됐다는, 그런 짤막한 감상.

그때였다. 오래 열리지 않았던 뒷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이하늘이 뒤를 돌아봤다. 들어오는 이는 한 명이라 아쉬웠지만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이대로 한 명만 더 기다리면 되는…….

“응?”

이하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시력 좌우 2.0을 자랑하는 이하늘의 눈에는 막 들어온 이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꽤 자세히 보였다.

검은 모자, 검은 재킷, 검은 신발과…….

저 새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머릿속이 바쁘게 굴러갔다. 그리고 이내 도달하는 과거의 저편.

‘아, 미친…….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백퍼 형이 지랄하는데…….’

‘에라이 썅. 몰라.’

이하늘의 눈썰미는 아주 좋은 편에 속했다. 한 번 본 사람을 잊지 못하는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머릿속에 박힌 인간을 쉬이 알아채곤 했다.

등을 밀쳤던 손, 어깨에 들렸던 낡은 가방, 오르내리던 계단과 난데없이 날아온 캔, 마지막으로 속을 긁던 휘파람.

저 새끼가 가게에 있었나?

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하늘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라도 된 양 막 들어온 이를 찢어 죽일 듯 노려봤다.

검은 모자 청년, 게이트에 접속한 정이섭은 움찔했다. 좀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을 째려보는 야차 같은 이하늘이 전부 보였으니까.

아, 미친. 얼마나 오래 봤다고 날 알아봐?

정이섭은 얼굴에 철면피를 깔았다.

“아,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게이트에 휘말렸는데 여기가.”

“저기요.”

“뭐 하는 데인지 모르겠네? 혹시 여기 ‘기억 더미’인가요? 그 퀴즈 맞히는?”

“저 기억 안 나세요?”

“와, 넓다. 오, 저까지 세 명이니까 이제 한 명만 더 기다리면 되겠네요?”

“야.”

이하늘의 부름을 무시하고 시몬에게 처음 만난 사이처럼 말을 걸던 정이섭은 나직한 반말에 그제야 그녀와 눈을 맞췄다.

“야? 야, 내가 너보다 나이 많…….”

“…….”

“많, 많을 것 같은데? 허허. 몇 살이신데 갑자기 반말하시는지.”

앞쪽에서 시몬이 웃었다. 정이섭도 덩달아 웃었으나 속은 아니었다.

웃기냐? 이게 웃겨? 네가 입 잘못 놀릴까 봐 마감도 미루고 접속했는데. 웃어? 너 방금도 쟤한테 입 털려고 했지. 어?

순간, 이하늘이 정이섭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정이섭이 움찔하여 뒷걸음을 쳤지만 이하늘이 더 빨랐다.

“너 단순 소매치기 아니지.”

작게 속삭이는 말에 하마터면 정이섭은 허리 숙여 귀를 대줄 뻔했다.

소매치기라뇨? 그게 무슨 소리죠?

뻔뻔하게 말을 해야 했는데 이번 역시 이하늘이 더 빨랐다.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그날 그 짓을 한 걸 거 아냐.”

이하늘이 낮게 가라앉은 갈색 눈으로 과거를 되짚었다.

계속 오르내리던 계단, 도망치지 않던 남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처럼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린 말.

“누구야? 너 소매치기하라고 시킨 거.”

어우, 눈치도 빨라.

정이섭이 질색한 차였다. 방관하던 시몬이 끼어들려는 순간에 뒷문이 또 열렸다.

3/4를 4/4로 완전하게 바꿔줄, 마지막 사람이 나타났다.

8. 기억을 길이 보전하는 법

[4/4]

[확인 중…….]

[환영합니다, 네 명의 플레이어! 이곳은 ‘제로 페이지―기억의 목차’입니다.]

[1페이지에 도전하기 전에, 앞에 놓인 숫자 표를 몸에 부착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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