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76)화 (76/90)

<제76화>

잃은 거 아니고 그냥 잠깐 떨어져 있는 건데요. 말 똑바로 하세…….

“내 손주도 저기 있어.”

…….

“길을 잘 잃어버리는 앤데……. 그래서인지 늦게 나오나 봐.”

……내 동생들은 길눈도 밝은데 왜 늦게 나오는 거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한결 편했다. 길을 잃어 늦게 나오는 거라면, 길눈 밝은 그들은 언젠가 꼭 길을 찾을 테니.

이하늘이 오랜만에 웃는 차에 화면이 전환됐다.

º º º

“B급?”

“죽은 거라고 봐야지.”

“난 안 들어가. F급 게이트도 뒈질 수 있는 마당에.”

순식간에 생긴 게이트. 그 속에 빨려 들어간 사람들. 그중에는 그녀에게 매번 아는 체했던 할머니도 존재했다.

이하늘은 물끄러미 진입하지 않겠다고 외면하는 헌터들을 바라봤다.

이상한 일이지. 분명히 저 사람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구원자라고, 영웅이라고 거들먹거렸다.

근데 왜 사람들을 안 구하지.

누구는 사람을 구하려고 가족까지도 버리는 마당에 저 사람들은 왜…….

이하늘은 헌터가 싫어도 그들이 사람을 구한다는 점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조금 조롱했을 뿐이다.

그래, 헌터는 뭣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사람 구하는 거 말이야.

근데 이게 뭐야?

힘이 있으면서, 왜 외면해.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하늘이 게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저 미친년이!”

이게 뭐가 구원자야. 영웅이긴 누가 영웅이고 누가…….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중 하나가 이하늘을 막았다. 다급하게 막은 행동에 비해 단단하게 옭아맨 손길은 이상하게 자상했다.

“어떤 미친 새끼가 의무를 버려. 너희들이 ×발, 그러고도 헌터야?”

다른 쪽에서 들리는 살벌한 욕설. 반면 또 다른 사람은 그저 진정하라는 듯 등을 토닥인다.

하나는 아마도…… 최가영.

또 다른 하나는…….

‘누구지?’

올려다보려는 찰나에 페이지가 또 넘어갔다.

º º º

이하늘은 이제 제삼자처럼 관람했다.

등만 보이는 남자가 두 무릎을 굽혀 쭈그렸다. 그 앞에 무릎을 안은 여자가 있다.

“말은 그렇게 해도 헌터가 싫지 않지?”

“아닌데요.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을 정도로 혐오해요. 싫어해요.”

“말은 그렇게 해도 아는 것 같은데. 모든 헌터가 나쁜 게 아니란 걸.”

침묵이 돈다. 그 끝에 여자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알아요. 아는데, 그럼 나는 대체 누굴 원망해야…….”

갈 곳 없는 원망이었다. 부모님은 죽었고 하나뿐인 오빠는 저를 버렸으며 동생들은 사라졌다.

원망은 어처구니없게도 구원자에게 닿았다.

구원자란 존재가 어떻게 날 버리지.

구원자란 존재가 어떻게 아직도 동생들을 못 구해.

뭐가 구원자라는 거야.

그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할 수 없는 저를 향한 원망이기도 했다.

즉, 구원자를 원망하지 않을 시, 그녀의 무겁고 날카로운 원망이 자기 자신에게 닿을 거란 뜻.

그럼 어떻게 될까. 못 버틸 터다. 아마 스스로…….

남자가 말했다.

“그래. 그럼 그냥 헌터 싫어해.”

“네, 네?”

“그냥 대놓고 미워하고 싫어해. 누가 뭐라 하는데?”

너에게 감히 누가.

뒷말은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제삼자인 이하늘은 들을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구지?

왜 저 사람에 대해 알려고 할 때마다…….

이하늘이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움찔한 남자가 뒤를 돌아본다.

아니나 다를까, 페이지가 다시 빠르게 넘어갔다. 이번엔 낱장이 아니라 뭉텅이로.

º º º

“아니지. 아니야.”

물기 어린 목소리. 누군가가 이하늘의 뺨을 매만진다.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야. 대체 언제쯤…….”

따뜻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눈을 뜨고 싶은데 뜰 수가 없다.

“언제쯤 네가 비로소―”

〖그쯤 할까.〗

〖이건 너무 일러.〗

불쑥 바람이 튀어나왔다. 이어지던 목소리가 뚝 끊기고 뺨을 매만지던 손길도 멈추었다.

촤라라라락―

머릿속에서 책장이 다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하늘은 그게 다시 뒤로 넘어가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아악!”

이하늘은 일어나자마자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저를 내려다보는 방독면 때문이었다.

그녀의 비명에 방독면도 놀란 모양이다. 움찔하더니 곧 이하늘의 어깨를 잡았다.

진정하라는 것 같아서 이하늘은 숨을 몰아쉬려 노력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뭐, 뭐…….”

상황 파악이 덜 된 얼굴로 말을 더듬으면서까지 주변을 둘러보다가 게이트가 폭주했다는 데까지 생각이 닿았다.

‘그리고, 그리고…….’

필드가 펼쳐지자마자 그녀는 보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신의 책 내용을.

이하늘은 반사적으로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멀쩡한 손가락이 눈에 들어온다.

손이 보이는 거 보니까 눈도 멀쩡해.

귀도…….

짜악―

방독면이 느닷없이 손뼉을 쳤다. 이하늘은 그 날카로운 소리를 들으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귀도 멀쩡하군.

드디어 이하늘이 방독면에게 시선을 던졌다. 주목을 끌려고 한 건지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손짓을 한다.

‘뭐라는 거야?’

방독면을 썼으니 특진과일 테고.

이하늘이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손을 허우적대.

손이 어딘가 익숙하다.

아, 그 메뉴판으로 얼굴을 가렸던…… 활이랑 분위기가 닮은 그 사람인가.

근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데. 나 방금까지 내 책 내용을 봤는데.

분명 성신이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어떻게 책 내용을 본 건지 모르겠으나…….

이하늘이 뺨을 만졌다.

‘초반부에 겪은 건 뭐지?’

뭔지 몰라도 그건 ‘이하늘’이 겪은 게 아니니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끄트머리에 보았던 과거는 왜 여태 잊고 있었을까.

공통점이 있던 할머니, 갑자기 터진 게이트, 외면한 헌터들까지는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기억했다. 그마저도 이 기억 더미에서 문제를 풀다가 기억해 낸 거지만.

그런데 최가영과…….

‘끝내 얼굴을 보지 못했던 사람.’

그건 정말이지 기억이 안 난다.

기억력이 안 좋아 잊은 거라기엔 말이 안 되었다. 그런 인상적인 순간을 잊을 리가.

누군가가 억지로 잊게 만든 게 아니고서야…….

그때였다. 계속 손짓하던 방독면이 이를 바득 갈며 이하늘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억지로 입을 벌린다.

“무슨……!”

“숨 쉬라고, 좀……!”

다짜고짜 입을 벌린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듯, 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언제부턴가 호흡을 멈추고 있었던 이하늘은 그제야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걸 확인한 방독면이 턱을 놓았다.

씨이, 익숙한 씨근덕거림. 그에 이하늘이 혼란한 눈으로 바라보자 방독면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딜 가나 했더니 코어가 박힌 단상 앞이다. 그가 코어에 접촉하자 익숙한 창이 앞에 떴다.

〔코어 습득 완료!〕

〔폭주가 종료됩니다.〕

〔축하합니다! 서든 게이트, ‘기억 더미(F급)’의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공헌도에 따라 완료 보상을 증여합니다.〕

그딴 거 하나도 안 궁금해.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던 이하늘을 보자마자 정신줄이 한 바퀴 돌았던 이활은 거친 손놀림으로 창을 넘겼다.

지금 궁금한 건…….

〔사망자―0명 / 부상자―0명〕

……사망자가 없다고?

º º º

관리국 특진과 사무실.

최가영은 무의식적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골이 아팠다.

사망자 없음, 부상자 없음.

평소와 같다면 다행이었을 문구였겠으나 지금은 아니다.

“임시 폐쇄가 풀린 인원 제한 게이트에 사망자가 없다는 게 말이 되냐?”

아이고, 인생아. 왜 이렇게 ×같이 굴러가세요. 제가 얼마나 굴러야 만족하시겠습니까?

최가영은 게이트에서 총 세 명을 보았다.

하나, 일반인 이하늘.

둘, 행운아 시몬.

셋, 아마 F급일 이름 모를 헌터.

그런데 게이트를 폐쇄하고 나온 이는 총 셋이었다. 자기 자신, 이하늘, 그리고 힘숨찐 이활.

이활은 폐쇄가 풀려 들어온 거란다. 즉, 최소한 한 명은 죽었다는 소리. 여기서 포인트는 게이트가 폐쇄될 때 시체도 함께 나온다는 거다.

그런데 시체가 없었다.

“하…….”

그 말은 무엇을 뜻하느냐. 행운아 새끼와 F급 새끼가 게이트 폐쇄하기도 전에 밖으로 나갔다는 소리다.

그런데 아는가?

헌터 중에서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 생산계 헌터가 제작하려고 혈안이 된 게 있다.

바로 ‘게이트 탈출석’.

게이트에 한 번 휘말리거나 진입하면 퀘스트를 완료할 때까지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두 사람이 도중에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니면…….

‘아직 생산계도 못 만든 게이트 탈출석을 갖고 있었다거나.’

“시몬, 헌커톡으로 연락 안 돼?”

최가영이 물었다. 그러자 허공을 보던 욜로인생이 고개를 저었다.

“비공개인가 봅니다. 닉네임을 찾을 수 없다고 뜨네요.”

헌터 커뮤니티.

각성한 자들이 레바브 시스템을 통해 이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로, 게시글도 올릴 수 있고 헌터 간에 연락도 할 수 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