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얼레. 근데 렌즈를 빼도 검은 눈이었다.
이하늘도 이상하다 여겼는지 이공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왔다. 렌즈는 정말 없었다.
“……어라?”
“왜 그래, 누나.”
“아. 아니. 이활, 너도 빼봐.”
어? 나는 안 되는데.
저 새끼는 뭘 했는지 몰라도 나는…….
이공이 뭐 하냐는 듯 쳐다본다. 저 시선과 좀 전에 등이 따끔했던 게 뭔가 있는 건가 싶었지만 의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이 새끼, 날 미끼로 자기만 살아남으려는 거 아냐?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거, 렌즈를 벗고 죽는 게 나았다.
이활은 자포자기한 채 렌즈를 뺐다. 렌즈 통이 인벤토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냥 손바닥에 쥐는데.
“……뭐야. 까마네, 둘 다.”
이하늘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엥. 나도 눈 까만 거임, 그럼?
이활이 이공을 보았다. 이공이 표정 관리 잘하라고 눈짓을 준다.
“아니, 나는. 아……. 난 너희들이 헌터인 줄 알고…….”
그제야 당혹감이 물 밀려오듯 드는지 이하늘이 미안한 얼굴을 했다. 두 뺨을 문지르기까지 하면서.
“아니, 너희도 알아? 3절의 무궁이랑 특진과에 보우라는 헌터가 있는데…….”
×이바알.
3절의 무궁과 특진과 보우가 식은땀을 흘렸다. 어떻게 안 건지 몰라도 이거 진짜 제대로 × 될 뻔했다.
“그 두 사람이 너희랑 너무 닮았거든. 아니, 하. 미안……. 진짜 미안. 분위기 망쳤네. 진짜 미안. 영이 너도 바쁜데 불러서…….”
“아냐, 누나.”
“휴……. 그럼 너희들.”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껏 풀어졌다. 이 뭐 같은 분위기에 가장 시달렸던 이활이 바닥에 늘어지고 싶은 걸 참는데, 이하늘이 말을 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 오전에서 오후까지 시간 비워놔.”
“…….”
“각성 검사받으러 가자.”
아니, 의심 지우신 거 아니었나요……?
이활은 당장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까지 일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야 했지만.
이공 역시 당장 지금부터 일주일 정도는 탑 등반을 위한 준비를 해야 했지만.
“어…….”
“으응.”
긍정의 대답을 했다. 2년에 한 번씩 받는 각성 검사는 무조건 참석이었으므로.
최가영은 눈으로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이활은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몰라, ×발.
토요일. 벌써 이하늘이 관리국에 일일이 와서 각성 검사를 받게 된 지 일주일이 된 지금.
최가영은 ‘내일 봐’라는 약속을 일주일 만에 지키러 왔다.
그런데 이게 뭐지? 왜 이하늘이 자기 쌍둥이들과 함께 왔는가.
한 놈은 이제 등반 준비에 들어가야 하고 한 놈은 어제부터 지방에 갔어야 하는데 왜…….
이유는 이하늘에게 있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고 민폐란 걸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또 두 손을 모았다.
“저, 최가영 헌터님.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오늘 원래 아침에 병원 가서 각성 검사를 받으려 했는데…….”
국가 각성 검사.
국가 건강검진처럼 2년에 한 번씩 병원에서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간단한 각성 여부 검사이다.
물론 ‘간단한’이란 수식어가 붙은 것답게 정밀한 검사는 하지 않는다.
따라서 결과도 ‘각성자’와 ‘비각성자’로 나오는 게 아닌, ‘각성자 의심도’로만 판단 가능하다.
각성자 의심도가 높게 나오면 관리국에 가서 제대로 된 검사를 의무로 받아야 하고 낮게 나오면 받을 필요 없다.
국가 각성 검사는 의무가 아녔으나, 검사를 오랫동안 받지 않은 상태에서 각성자가 되면 각성 사실을 숨겼다는 의심을 받기 때문에 웬만하면 다들 2년에 한 번씩 검사를 받았다.
그건 이씨 남매도 마찬가지.
올해는 이하늘보다 이삼 일 늦게 태어났지만 해가 다른 두 쌍둥이가 검사받는 시기였다.
그러나…….
“제가 어제 밤늦게 들어가서요(각성 검사 때문에요). 늦잠을 자가지고(이 새끼들이 안 깨웠더라고요) 병원에 못 갔어요…….”
오늘은 토요일. 병원은 이른 오후에 닫는다.
“그래서 말인데…… 관리국에서 각성 검사받을 순 없을까요? 돈은 내겠습니다.”
최가영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다시 이활에게 시선을 건넸다.
야, 너 이거 어떡하냐?
이활이 이번엔 표정으로 말했다.
몰라, ×발…….
두 쌍둥이는 특성 ‘힘숨찐’을 가진, 얼마 안 되는 사람이었다. 힘숨찐을 활성화하면 일반인 수준으로 능력치가 내려가며 각성자라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없게 된다.
마력 운용? 당연히 절대 못 한다.
따라서 두 사람은 힘숨찐 상태로 일반 병원에서 각성 검사를 받으면 각성자 의심도가 ‘하’로 나왔다.
8, 9년 동안 각성 검사를 줄기차게 받는데도 들키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
그러나 관리국에서 받는 검사는 다르다. 보호 센터보다도 더 세밀한 검사를 자랑하는 관리국은…….
힘숨찐 활성화도 마력 운용으로 판단해 버린다.
즉, 힘숨찐 상태인 두 사람이 관리국에서 검사받으면 영락없이 들키게 된다는 뜻.
‘이건 바우가 실험해 본 적 있지.’
최가영이 으음, 하며 턱을 매만졌다. 이하늘 뒤편에 선 쌍둥이의 표정이 가관이다.
하나는 인생을 포기한 것 같고 하나는…….
‘……겁먹었나, 지금?’
최가영이 물끄러미 이공을 보았다. 평소에 전혀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안색이 평소보다 하얀…….
어쨌거나 검사를 받게 할 순 없었다. 둘이 힘숨찐인 이유가 다름 아닌 너 때문인데.
“미안한데 그건 안 되겠는데.”
사실 된다. 안 될 게 뭐가 있나.
“관리국 각성 검사는 예약제거든.”
이건 맞지만.
“너도 원래는 안 됐는데 간신히 되게 한 거라.”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원래 이하늘도 불가능했지만 그냥 가능케 했다. 간신히가 아니라.
최가영의 입김이 들어갔으므로.
고작 특진과 과장이란 직급을 단 최가영은 실제로는 관리국의 2인자였다. 그가 말 한 번 하면 안 되는 게 없다.
그 점을 모르는 이하늘은 아쉬운 기색을 띠었다. 최가영이 한마디씩 할 때마다 이활의 표정이 밝아졌다는 것 역시 모르리라.
‘쯧, 도와줘 봤자 꼬리 한 번 안 흔들 새끼한테.’
그러나 이왕 도와준 김에 그는 몇 마디 더 거들었다.
“뭐가 그리 급해. 월요일에 당장 받고 오면 되는 것을. 관리국에서 각성 검사받는 거 돈 꽤 들어서 나중 가면 아까울걸.”
“잠깐.”
그때였다. 안도하던 이활이 가만 보니 이상하단 표정으로 이하늘의 어깨를 감싸 당겼다.
“근데…… 뭔데 반말이야?”
이것 봐. 도와줬더니 꼬리 흔들기는커녕 시비다.
최가영의 눈썹이 하늘로 솟자 이하늘이 찰싹 이활의 팔뚝을 때렸다.
악, 하고 들려오는 이활의 외마디. 최가영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보우’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라. 힘숨찐 상태니 이상할 건 없었지만 신기한 광경이긴 했다.
“너야말로 왜 반말이야. 얘가 미쳤나.”
“아 씨, 뭔데? 둘이 친해? 왜 친해? 아니면 뭐야. 너…….”
이제 쟤 기억하는 거냐고 물어보려는데 이공이 이하늘의 소매를 잡으며 끼어들었다.
“누나. 언제 끝나?”
“아, 지금 받고 오면…… 한 시간쯤?”
“다녀와. 우리 여기서 기다릴게.”
“응? 알았어.”
이하늘도 이공이 조금 이상하단 걸 느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게 재촉 한 번 안 하던 애가 다그치니.
두 사람을 로비에 두고 이하늘은 서둘러 검사를 받으러 움직였다. 동행하던 최가영이 슬쩍 물어왔다.
“그래서, 왜? 두 사람이 각성자로 의심됐나 봐?”
“네? 아.”
왜 그렇게 급하게 검사를 받으려는 거냐고 에둘러 물은 거란 걸 깨달은 이하늘은 말할까 말까 고민했다.
저번 채널 접속에서 보았을 때, 그는 무궁도 보우도 잘 아는 헌터다.
동생들을 그 둘로 착각했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없을 것 같아 입을 다물려는데 이런 생각도 불쑥 든다.
말 안 할 이유는 또 뭔데?
마음이 삐죽해진 이하늘은 며칠 전 채널 접속했을 때를 떠올렸다.
다들 사라지고 남은 스타트 존에서 자연히 접촉하던 똑같은 키의 두 사람.
헬멧과 방독면 때문에 얼굴이 전혀 안 보였음에도 그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게 또 이상하리만치 익숙해서 성신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둘을 보았다.
진짜 얼굴 궁금하다. 얼굴을 봐야 내 동생들이랑 닮았다는 생각을 그만둘 텐데.
그런데 웬걸. 이하늘의 마음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이 슬쩍 얼굴을 가리고 있던 걸 벗었다.
드러나는 턱과 입, 콧대와 눈.
어?
눈썹과 이마, 그리고 머리카락.
……어?
닮았다, 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웠다.
그냥 이건 ×나 똑같았다! 도플갱어였다!
이공과 이활도 서로 도플갱어라고 불러도 좋을 쌍둥이인데, 그 두 사람과 똑같은 도플갱어가 또 있다니?
다른 점은 딱 한 가지.
보라색 눈.
둘 다 보라색 눈을 하고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 동생들은 눈이 검은색이지만…….
헌터가 되면서 눈동자나 머리 색이 변하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둘은 분명…….
근 하루를 고민했다. 고민만 했을까. 한 번도 헌터에 대해서 찾아본 적 없는데 검색도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