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살아남기 위하여(2)
변명 하나 없는 여자가 입에 담은 것이라고는 미안하다, 괜찮다 그따위 것뿐이라니.
에크하르트는 꼭 자신이 불한당이 된 기분이었다.
“방금처럼 이딴 식으로 폐 끼치지 말고.”
혀끝에 칼날이 내걸린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으리라.
“미안해.”
그러나 오벨리아가 순순히 사과하자, 에크하르트의 기분은 도리어 더 나빠졌다.
그가 건넨 독약을 마시고 아프면서, 그 아픈 걸 미안해한다는 게.
그게 너무 기분이 더러웠다.
“…오늘은 피곤하군. 내일 이야기하지.”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알겠어.”
오벨리아가 조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초조했고, 한시라도 빨리 원로들의 행동에 관한 의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당장 에크하르트의 표정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그것을 증명하듯 오벨리아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에크하르트는 그녀의 방을 급하게 나가 버렸다.
***
이거루트는 자신의 말대로 아주 조용히 오벨리아를 찾아왔다.
물론, 반쯤은 그가 몰래 찾아올 수 있도록 미로 정원에 나가 있던 그녀의 의도이기도 했다.
“오벨리아 님을 뵙습니다.”
이거루트가 오벨리아에게 나이 든 몸을 숙여 인사했다.
아무래도 저번에 시녀가 무례를 범하자 오벨리아가 화를 냈던 일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 인사하지는 않아도 돼요.”
오벨리아가 만족스러운 목소리를 꾸며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치 허락하듯 숙였던 허리를 펴라고 손짓하는 것은 덤이었다.
“그래서 이거루트 원로님은 나한테 뭘 해 줄 수 있죠?”
마침내 이거루트와 시선을 마주한 오벨리아가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어차피 그들 사이에 서론 따위는 필요 없었으므로.
“그러면 외람되지만 하나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거루트는 앞뒤 없는 오벨리아의 말에도 당황하지 않고 도리어 질문을 꺼내 놓았다.
“해 봐요.”
“어디까지 되찾으실 생각이신 지요?”
그 말의 저의가 분명했다.
이거루트는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를 밀어낼 생각이 있는지 떠보는 것이었다.
“이거루트 원로, 뭘 되찾는다는 거예요?”
그러나 못 알아들은 척, 오벨리아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힐켄테데인데.”
오벨리아의 짜증스럽게 찌푸려진 얼굴과 오만한 말투에는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마치 이미 자신이 모든 것을 다 가진 줄 아는 철부지 같기도 했고, 이거루트의 ‘어디까지’에 대한 대답을 내놓은 것 같기도 했다.
전자인지 후자인지를 가늠하듯 이거루트가 빤히 오벨리아를 쳐다봤다.
전자일 경우, 힐켄테데의 진정한 가치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현재에 안주하는 멍청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이거루트에게 자신을 떠보지 말고 그의 패를 먼저 보이라고 말한 셈이었다.
그 모호한 대답이 이거루트가 다음 말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힐켄테데의 모든 것 말입니다.”
이거루트는 최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래야만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를 적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을 때, 빠져나갈 틈이 생기기 때문이다.
“원로, 자꾸 말을 돌리지 말아요. 내가 힐켄테데인데, 대체 원로가 말하는 그 모든 것이 뭘 말하는 거예요?”
오벨리아가 짜증스러운 어투로 곧바로 말을 받았다.
대화가 뱅뱅 돌고 있었다.
그녀가 멍청해서든지, 그게 아니든지 결국 이거루트가 먼저 패를 보여야 명확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말 그대로, 오벨리아 님께서 마땅히 누리셔야 할 힐켄테데의 가장 높은 자리 또한 되찾길 원하시냐고 여쭌 겁니다.”
마침내 이거루트가 속내를 드러냈다.
그는 결연한 표정이었다.
오벨리아가 보기에는 우스워도, 자칫하면 에크하르트와 완전히 척질 발언을 하였으니 퍽 긴장한 모양새였다.
“당연히 내 자리를 찾아야죠.”
그리고 오벨리아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거루트의 안색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이것이 그가 기다리던 말이었을 테니까.
“그래서 말인데….”
오벨리아가 느긋하게 말끝을 늘어트렸다.
“설마, 이거루트 원로 혼자서 이러는 건 아니겠죠?”
오벨리아의 눈초리에 불신이 담겼다.
아무리 눈치가 없고 멍청해도, 이거루트 혼자 꺼내는 말이라면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오벨리아의 의심은 타당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만나게 되실 겁니다.”
이거루트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가 따르는 자가 누구인지 곧바로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오벨리아는 여기서 물러서기로 했다.
원로들의 이름을 전부 외우지 못한 것처럼 굴어 놨으니, 여기서 아는 척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좋아요, 기대할게요. 만나는 방법은 이번에도 그쪽에서 알아서 하겠죠.”
오벨리아가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이 진짜 힐켄테데라는 자부심에 잔뜩 빠진 사람처럼.
“그럼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오벨리아 님.”
이거루트가 고개를 숙였다.
그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오벨리아는 분명 보았다.
물론, 모른 척했지만.
***
에크하르트가 물었다.
“왜 일부러 일을 어렵게 돌아가는 거지?”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가 굳이 그들의 편인 척하며 그 틈새로 파고들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그는 원로들을 꼼짝 못 하게 할 상당한 증거를 모아 놨던 것이다.
다만 3년간 힐켄테데를 돌보느라 그것들을 터트릴 틈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벨리아와의 혼약으로 에크하르트의 지위가 더 공고해지고, 에크하르트 외에도 힐켄테데의 사람들을 다룰 위치의 이가 생기니 여유가 생기는 셈이었다.
“그 좋은 걸 뭐하러 지금 써먹어?”
오벨리아가 아무리 대놓고 자신의 이름을 썼다지만, 준비가 될 때까지 알렉산드로의 앞에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 황가에 할 모든 복수와 관련된 일에 에크하르트가 대외적으로 나서야만 했다.
그리하여 지금 그녀는 힐켄테데의 내정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점차 바빠질 그에게 그런 짐까지 씌울 수는 없었으므로.
“지금은 나를 이용하고, 원로들의 또 다른 약점은 훗날 써먹어.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원로들을 걸러내고 나면 남은 이들에게도 불만이 생길 거 아니야.”
게는 가재 편이라고 했다.
아무리 원로들 간에 파벌이 나뉜다고 해도, 같은 원로를 쳐냈을 때 위협을 느끼지 않을 원로는 없을 터였다.
그런 그들이 에크하르트를 경계하게 될 경우, 그에게는 원로들을 휘어잡을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는 게 오벨리아의 판단이었다.
“내가 그런 불만 따위 못 잡을 거라고 생각하나?”
“쉬운 길을 어렵게 돌아갈 필요는 없잖아.”
오벨리아의 차분한 말은 딱히 그르지 않았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어딘가 불만인 모양이었다.
“…그 말은, 네가 원로들의 표적이 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에크하르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한숨을 애써 삼키며 말했다.
오벨리아의 행동은 원로들 사이로 파고들어 비밀을 캐내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해서 몇몇 원로들을 끌어내리고 나면, 그들의 원망은 죄다 그녀에게 향할 터였다.
에크하르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약대로 그가 오벨리아를 보호하겠지만, 모든 것을 잃은 그녀에게는 자신을 보호할 독단적 수단이 없었다.
그리고 힐켄테데의 원로들은 북부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찰나의 방심이 오벨리아에게는 엄청난 위협이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것은 에크하르트가 받게 될 불만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터였다.
그는 이런 식으로 굳이 그녀의 뒤에 숨지 않아도 원로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에크하르트는 비겁자가 되기 싫었다.
“내 목숨과 네 목숨의 가치가 같아?”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말은 오벨리아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녀는 어차피 죽는다.
자신은 죽어도 복수는 완성되어야만 했다.
오벨리아에게는 제 목숨보다 에크하르트의 목숨이 훨씬 가치 있었다.
그래야만 혹여 그녀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죽더라도 복수는 이루어질 게 아닌가.
“사람의 목숨을 가치로 판단하나?”
에크하르트에게서 날 선 말이 흘러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에도 결코 그에게 지지 않았다.
“다른 상황이면 모르겠지만- 당신과 내가 엮인 단 하나의 이유는 복수일 텐데. 그러면 곧 죽을 나보다, 복수를 이어갈 수 있는 당신이 우선이어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에크하르트의 말문이 턱 막혔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오벨리아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 볼 것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지금,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순전히 그의 마음이 내키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 당신 같은 여자랑 얽히는 게 아니었는데.”
에크하르트는 그런 제 마음이 달갑지 않았다.
오벨리아는 시종일관 이성적이고 냉철했다.
그에 반하여 에크하르트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그는 어쩐지 자신만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았다.
에크하르트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오벨리아는 그의 원수와도 같은 여자이므로.
“이미 지독하게 얽혔으니, 당신의 바람은 애석하게도 이미 틀렸네.”
역시나 오벨리아는 그저 담담했다.
그녀는 에크하르트의 말이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오벨리아의 시녀도, 기사도, 심지어는 아버지도 그녀와 얽힌 상대에게 죽었기 때문이다.
자신만 아니었더라면 죽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오벨리아는 결코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비밀 호위를 더 붙여 줄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부르도록 해.”
결국 이번에도 진 것은 에크하르트였다.
***
프렐런트와 커티스 중 황실과 결탁한 원로들의 우두머리가 누구인가.
오벨리아는 의외의 곳에서 아주 쉽게 그 답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힐켄테데의 유일한 핏줄로 알려진 오벨리아에게 교육을 하겠다고 나선 자가 무려 그 우두머리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