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살아남기 위하여(3)
“오늘부터 오벨리아 님의 교육을 맡게 된 커티스 로웰스턴이라고 합니다.”
커티스가 오벨리아의 교육을 맡는 것은 원로 회의를 통해 결정된 사안이었다.
‘명분은 앞으로 힐켄테데의 주요 역할을 맡아야 할, 유일한 핏줄인 내 교육을 아무나 맡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지만….’
이유야 그럴싸했으나 당연히 오벨리아는 믿지 않았다.
프렐런트나 커티스 같은 원로들은 원로 중에서도 그 위치가 남다른 자들이었다.
오벨리아는 힐켄테데의 핏줄이라는 것을 증명했을 뿐, 그 외의 어떤 능력이나 가능성도 보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이미 에크하르트의 자리가 꽤 공고했으니 현재 그녀의 위치는 더없이 애매했다.
그러니까 커티스의 경우 오벨리아와 굳이 친밀하게 이런 식으로 엮이려 들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다.
물론, 교육 외의 다른 목적이 있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오벨리아 힐켄테데예요.”
오벨리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오만하게 대답했다.
커티스는 원로 중 가장 드높은 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이에게 하는 대꾸로는 거만하다해도 할 말이 없는 태도였다.
이런 오벨리아의 태도는 마치 그녀가 아직까지도 원로들 사이 상하 관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벨리아 님.”
그리고 대개 그런 모습들은 상대에게 방심을 불러들이기 제격이었다.
“이거루트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으셨을 줄 압니다.”
커티스가 굳이 제 속내를 숨기지 않고 단번에 드러내는 것이 딱 그러했다.
“제가 지금부터 오벨리아 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이루어 드릴 것입니다.”
커티스의 고개가 참으로 빳빳이도 치켜들려 있었다.
오벨리아는 커티스라는 자가 대단히 오만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우선, 같은 원로인 이거루트에게 최소한의 존칭도 하지 않는 것만 봐도 모를 수 없었다.
그것은 명백히 커티스가 이거루트를 자신의 아래로 취급하는 행동이었으니까.
심지어는 오벨리아에게 대단한 무언가를 베풀겠다는 듯 말하는 어조 또한 그러했으니, 어찌 커티스의 오만함을 느끼지 못하겠는가.
‘그런 주제에 꽤 약았어.’
커티스는 앞으로 자신이 할 일들을 ‘오벨리아가 원하는 것’이라는 말로 모조리 대신해 버렸다.
오벨리아는 그것이 일이 틀어질 경우,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로 돌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아마 커티스의 의도 또한 별반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까 이토록 그가 쉽게 오벨리아에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던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럼 원로는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죠?”
“제가 감히 어찌 무언가를 바라고….”
“커티스, 나는 대가 없는 호의가 있다고 믿지 않아요.”
오벨리아가 커티스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냈다.
그녀는 위협을 피해 숨어 지낸 사람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러니 마냥 순진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심지어 내가 바라는 건 대가 없이 얻기에는 터무니없죠.”
힐켄테데의 주인.
커티스가 추측하길, 오벨리아가 원하는 것은 그 자리였다.
범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냥 꿀꺽 삼키기에는 실로 커다란 과실이라는 점을 모르지 않을.
“…제가 바라는 것은 그리 커다란 것이 아닙니다.”
커티스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마침내 대답했다.
“현재 힐켄테데에서 정해지는 대부분의 일은 상당히 독단적인 면이 있지요.”
대놓고 에크하르트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결국은 그가 힐켄테데의 일을 전부 제 뜻대로만 정한다는 말이었다.
“저는 그저, 힐켄테데의 앞날을 정할 중요한 일들이 모두와의 소통을 통해 이루어졌으면 할 뿐입니다.”
오벨리아가 속으로 비소를 머금었다.
모두와의 소통.
말은 참으로 그럴싸해 보였다.
그러나 대공은 혼자고 원로들은 다수다.
‘모두’의 의견대로 힐켄테데의 일을 정한다면, 결국 그 속에서 대공이 지향하는 바는 얼마 남지 않을 게 뻔했다.
그게 원로들 마음대로 힐켄테데를 좌지우지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겨우 그거뿐이라고요?”
오벨리아는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커티스를 바라봤다.
마치 그의 말 안에 숨겨진 진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 멍청한 표정이었다.
커티스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녀의 멍청함이 답답한 듯한 얼굴이었다.
“조금 덧붙이자면, 오벨리아 님을 위했던 저희의 마음을 고려하셔서 저희의 말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 주시면 감사할 따름이겠지요.”
커티스가 제 뜻을 조금 더 명확히 전달하기 위하여 말을 덧붙였다.
아까보다 훨씬 노골적인 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원로들의 말을 따라 힐켄테데의 일을 정하란 말인가요?”
오벨리아는 그제야 말을 알아들은 듯, 불쾌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감히 나보고 당신들의 허수아비 따위나 해라?”
“그럴 리가요!”
커티스가 목소리를 높이며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다분히 연극적인 어조였다.
“그저 오벨리아 님께서 결정에 어려움을 겪으실 때, 저희를 써 주십사 할 뿐입니다.”
얼핏 보면 대단한 충언 같았다.
똑똑하다면 방금의 말과 지금의 말이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알 터였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전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
“뭐, 그 정도쯤 못 들어줄 거 없지요.”
오벨리아가 오만하게 커티스를 내려다봤다.
그가 제게 납작 엎드려 있는 게 퍽 마음에 든 얼굴이었다.
커티스의 입가에 그녀의 허영심을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허영심에 취하여 그것을 전혀 보지 못한 것처럼 거만한 모양새로 그에게 손을 내렸다.
“그럼 잘 부탁해요, 커티스.”
“오벨리아 님을 도울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커티스가 공손한 태도로 오벨리아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동맹의 결성이었다.
***
커티스와 오벨리아의 교육 시간, 방문은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굳게 닫혀 있었다.
교육은 밤까지 길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방 안에 사람이 있던 적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오벨리아가 그날로부터 쉴 새 없이 많은 원로를 만나고 다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만난 원로들은 모두 차곡차곡 기록되어, 에크하르트에게 반감이 있는 자들을 솎아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그러나 오벨리아는 날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바실리스크의 독에 점령된 몸은 단지 사람을 여럿 만나는 것만으로도 날이 갈수록 힘에 부치는 게 느껴졌다.
제 몸의 위태로움이 느껴질수록 그녀는 초조함에 더욱 불이 붙었다.
아무리 원로들이 에크하르트에게 대항하려 해도, 결국 그는 3년 동안 굳건히 힐켄테데를 지켰다.
그만큼 에크하르트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으니 원로들이 신중하게 구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에 관한 이성적 판단과는 별개로, 허약한 몸은 오벨리아의 정신까지 뒤흔들었다.
원로들이 에크하르트에게 반감을 품었다는 그 단순한 사실만으로는 그들을 온전히 끌어내릴 수 없다.
오벨리아는 차근차근 나아가는 게 아니라 빠른 진척을 원했다.
“내가 힐켄테데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해.”
그래서 오벨리아는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원로들 사이에 스며들어 그들 깊숙이 파고들고자 했던 기존의 계획은 너무나 더뎠다.
아직까지 별다른 힘이 없는 그녀는 원로들에게서 있어 우스운 존재였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오벨리아를 빼놓고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러다가 언제 제 몸이 스러져 일을 끝마치지 못할까 두려웠다.
실질적인 권력이 있어야만 원로들 사이에서도 오벨리아의 발언에 힘이 실릴 터였다.
“…대뜸 네게 권한을 줄 수는 없어.”
“내가 당신의 약혼녀가 되면 돼. 어차피 힐켄테데에는 안주인이 오래도록 부재했으니, 차기 대공 부인이어도 실질적인 안주인으로서 권한을 누릴 수 있겠지.”
현 힐켄테데의 대공과 실질적 힐켄테데의 핏줄.
두 사람의 결합은 퍽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내게 생긴 권한을 커티스가 그냥 썩혀 둘 리 없어. 커티스는 그 권한을 이용하려 들 거고, 나는 그때 필요한 걸 얻어내면 돼.”
“너와 내 약혼은 원로들이 정리된 이후의 이야기 아니었나?”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말에 이견을 표했다.
두 사람의 약혼은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원로들을 걸러낸 뒤에 이루어질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의 약혼이 가져올 득보다 실이 많아. 여러 사람의 경계를 사게 될 거다.”
원로들도 인간이니 오벨리아와 막 뜻을 함께하게 된 지금이야 그녀를 경계하느라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은 따로 속닥인다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면 끝내 그 경계는 느슨해질 터였다.
시간만 있다면 초기의 계획도 나쁘지 않았다.
“지금 원로나 가신들이 가만히 있는 건, 네가 표면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야.”
에크하르트의 말이 옳았다.
오벨리아가 힐켄테데의 유일한 핏줄로서 요란하게 등장한 것과는 달리, 그다지 큰 사건을 일으키지 않음으로써 그녀에게 쏠렸던 사람들의 이목은 점차 흩어지고 있었다.
반면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의 약혼녀가 된다면 또 다시 그녀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것이었다.
“대공비의 자리를 노리던 이들은 당연히 네 결격 사유를 찾으려 들 거고, 커티스 측의 경계심도 괜스레 높이는 꼴이 될지도 모르지.”
오벨리아에게 실질적인 힘이 생긴다면, 그녀가 그 힘에 만족하고 변심하여 커티스 측을 배반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원로들에게는 없었다.
에크하르트의 말은 충분히 일리 있었다.
“커티스에게 아들이 있던데.”
“오벨리아!”
오벨리아의 말에 순간적으로 에크하르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공인 에크하르트는 대공비가 되길 원하는 자들에게 더없이 매력적인 상대였다.
그렇다면- 대공이 될 가능성을 가진 오벨리아의 옆자리 또한 탐욕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약혼쯤이야 깨 버리면 그만이었다.
오벨리아의 옆자리를 제 아들이 차지하리라는 희망을 심어 준다면, 커티스의 경계심을 쉬이 낮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