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변주(4)
“그게 무슨…?”
“커티스를 도와서… 황실에 정보가 가되, 그 말을 듣게 될 대상은 황제가 아니라 아그네스 이멜리언이었으면 하는데. 해 줄 수 있겠지, 엘루미나 원로?”
프렐런트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오벨리아는 말을 이었다.
“커티스가 황실에 정보를 유출하려고 한 게 과연 처음일까? 그가 말한 걸 보면 이미 황실에 연락할 명확한 수단을 가진 거 같은데.”
당연한 말이지만 황실은 정보를 가려 받는다.
그런데 커티스는 황실에 죽은 황태자비와 닮은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오벨리아의 말대로, 이미 전적이 있지 않고서야 황실과의 연락통을 보유하고 있을 리 없었다.
“…오벨리아 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황제의 정부에게 연락을 하라고 하신 이유가 있으신 거겠죠.”
황제의 정부.
프렐런트의 그 발언에 오벨리아는 속으로 비소를 머금었다.
오벨리아를 죽이고도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채 정부라 불리는 아그네스의 꼴이 우스웠다.
‘애초에 나만 없으면 황후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도 우스워.’
황후의 자리는 많은 정치적 계산이 오가는 곳이다.
공작가나 후작가라고 하여도 아무나 황후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오벨리아 덕에 제국의 백작 영애로 살 수 있을 뿐, 실상은 망국의 왕녀로 알려진 아그네스가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는데 선황이나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황실이 감히 힐켄테데에 손을 뻗치려고 한 대가는 치러야지.”
오벨리아가 치미는 비웃음을 삼킨 채 프렐런트에게 답했다.
“아그네스 이멜리언은 그대의 말대로 황제의 정부일 뿐이고, 그래서 위태로운 위치에 있지. 그런 사람이 죽은 황태자비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반길까?”
공식적으로 황후의 자리가 비었다.
귀족들이 그 자리에 자신의 딸, 친인척 등을 앉히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쓰고 있을 터다.
그러니 아그네스의 불안과 초조가 오죽하겠는가?
“아그네스 이멜리언은 커티스가 전한 사실을 절대 황제에게 전달하지 않을 거야.”
“정부 주제에, 황제에게 끝까지 그 사실을 숨기지는 못할 텐데요.”
프렐런트의 말투에서 아그네스에 대한 멸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본디 제국에서 정부의 위치란 그런 것이다.
그리하여 정부를 두고 사는 귀족들조차도 그것을 겉으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벨리아가 죽었다고 생각하자마자 아그네스를 드러냈으니 그토록 어리석을 수 없었다.
아무리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해도, 귀족들이 이미 아그네스를 황제의 정부라 생각한 이상 그 의식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녀를 진짜 황후로 만들려거든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는 그들의 아이를 포기했어야만 했다.
그랬다면 귀족들이 황제의 정부라는 사실로 아그네스가 황후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 들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멜리언 가를 황후의 집안에 걸맞은 가문으로 만들 시간도 벌 수 있었을 테고.
가진 바 능력에 비해 욕심이 지나치게 많으면 결국 아무것도 못 갖는 법이었다.
“내가 노리는 게 바로 그거야, 엘루미나 원로. 힐켄테데 내부를 이간질할 생각을 했다면 반대도 당해 봐야 하지 않겠어?”
알렉산드로는 저 홀로 권력을 독점하고 싶어서 오벨리아를 죽이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아그네스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것을 용납할 리 없었다.
오벨리아는 먼 곳에서부터 그 둘의 사이를 천천히 멀어지게 만들 작정이었다.
“저들이 한 짓을 그대로 돌려받는 셈이군요.”
프렐런트가 오벨리아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렐런트의 얼굴에 황실의 계략을 역이용하려는 힐켄테데의 유일한 딸에 대한 뿌듯함이 역력했다.
***
그리고 그날 밤, 당연하게도 오벨리아는 프렐런트와 세운 계획을 에크하르트에게 전했다.
“황제의 정부에게 너에 관한 말을 흘리겠다고?”
그러자 에크하르트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오벨리아의 계획은 그녀를 내걸고 하는 것이었다.
그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그러나 그것을 오벨리아가 보기 전에, 그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알아서 해.”
에크하르트는 일부러 더욱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반사적으로 반응했던 일을 없던 것처럼 취급하고 싶었다.
그것을 끝으로 에크하르트는 더 이상 이 계획에 대하여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오벨리아와 프렐런트의 계획은 실행되었다.
며칠 뒤의 밤, 또 다시 황실의 개가 주제도 모르고 힐켄테데의 뒤뜰을 밟았다.
프렐런트는 오벨리아의 뜻대로 그 개를 돌아가는 길에서 우연히 죽게 했다.
그리고 개의 복장을 대신 뒤집어쓴 누군가가 황궁의 아그네스에게로 향했다.
***
오벨리아만 없으면 황후가 될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아그네스도 상당히 초조할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녀는 한동안 반응이 없었다.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 주변의 호위를 그녀 몰래 늘렸음에도 걸리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미묘한 긴장 속에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그리고 완벽한 신부의 치장을 한 후 거울 앞에 앉아 있는 오벨리아의 심정은 복잡했다.
‘결혼을 다시 할 줄이야.’
오벨리아의 모습은 완벽했다.
황족이 아니기에 금사를 사용하지는 못했으나, 새하얀 천 위로 촘촘히 수놓아진 은사에 다이아몬드가 엮인 드레스는 충분히 화려했다.
심지어 장인들이 손수 짠 레이스로 겹겹이 겹쳐 만든 치맛자락은 걸음걸음마다 풍성하게 하늘거렸다.
새하얀 머리칼은 화사한 색의 생화와 엮어 땋았고, 그것을 한 번 더 틀어 올려 화려한 드레스에 잘 어울렸다.
바실리스크의 독을 마신 이후 늘 창백했던 피부는 고운 화장을 통해 생기가 넘쳤다.
그래, 오벨리아는 누가 봐도 완벽한 신부였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쓰게 웃었다.
8년 전, 금사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드레스를 입고 금관을 머리에 썼을 때도 그녀는 완벽한 신부였으니까.
똑똑똑.
노크 소리가 그런 오벨리아의 상념을 깼다.
그녀는 씁쓸함을 입가에서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벨리아가 문을 열자, 그 앞에는 에크하르트가 있었다.
“…에크하르트?”
오벨리아의 두 눈이 커졌다.
식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에크하르트가 여기 있으니 놀란 탓이었다.
“가지.”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놀란 게 마치 오히려 별스러운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담담한 태도였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오벨리아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새하얀 장갑을 낀 에크하르트의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신부가 결혼식의 주인공이라는 옛 관습은 아직도 상당히 유효했다.
그래서 제국에서는 결혼식 때, 신부가 대기실에서 식장으로 가는 길을 가족들이 축복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지금 오벨리아에게는 그런 그녀를 축하해 줄 가족이 없었다.
알렉산드로가 오벨리아에게 끔찍한 존재가 된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결혼식은 행복했다.
오벨리아가 예식장으로 가는 내내 사랑하는 모든 이가 돌아가며 그녀와 손을 잡은 채 축복을 빌어주고 함께 걸어 주었다.
돌아갈 수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오늘 저 홀로 식장으로 가는 길을 걷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 가야 할 길에 문득 에크하르트가 나타난 것이다.
그 기분을, 오벨리아가 아닌 그 누구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시간 없어.”
에크하르트가 가만히 있는 오벨리아를 채근했다.
에크하르트의 재촉에 따라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에크하르트가 자연스럽게 오벨리아를 이끌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 태연스러워서 오벨리아는 더욱 이질감과 기묘함을 느꼈다.
예식용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유독 그의 손이 따뜻했다.
묻고 싶었다.
왜 여기에 왔냐고.
그녀에게 분노하고, 그녀를 포기해 놓고 왜 이렇게 구냐고.
그러나 오벨리아는 묻지 못했다.
그녀는 에크하르트의 대답이 두려웠다.
그가 좋은 말을 하든, 나쁜 말을 하든 상관없이 오벨리아의 마음은 휘청거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예식장으로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벨리아는 어쩐지 에크하르트가 자꾸만 어려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게 매우 좋지 않은 조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끝내 에크하르트의 손을 놓지 못했다.
***
아그네스가 오벨리아에게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조심해야 했으나 오늘은 결혼식이었다.
그런 만큼 존재만으로도 위협적인 기사들을 쫙 깔아 놓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로 인해 힐켄테데의 가장 커다란 연회장을 화려하게 꾸민 결혼식장에는 기사 몇 명이 귀빈들의 안전을 위하는 척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에크하르트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기사라는 점이었다.
“에크하르트 힐켄테데와 오벨리아 힐켄테데, 입장!”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버진 로드의 초입에 서자, 그것을 발견한 대신관이 잠시 후 외쳤다.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함께,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버진 로드 위를 걸어갔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대신관의 앞에 서자, 대신관이 주례사를 읊었다.
평화로웠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평화는 언제까지고 지속되지 않는 법이었다.
두 사람이 사랑의 맹세를 하고, 축성 받은 포도주를 나눠 마실 즈음이었다.
돌연 정원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뜻하지 않은 소란에 결혼식장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에크하르트가 표정을 굳히며 보초를 서던 기사를 손짓해 불렀다.
“무슨 일인지 알아….”
그러나 에크하르트가 기사에게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소란의 장본인이 보란 듯이 신랑 신부를 위해 꾸며진 중앙 입구를 통해 정원으로 들어섰다.
“어머, 내가 늦었네. 실례가 된 건 아니겠죠.”
눈부시도록 새하얀 데다, 신부만큼이나 화려하다고 할 수 있는 드레스를 입은 무례한 여자.
아그네스 이멜리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