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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29화 (29/136)

29화. 변주(5)

누군가 아그네스를 보고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의 정부 아니야?”

그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소란 속에서도 묻히지 않고 뚜렷했다.

“뭐…!”

아그네스가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군중을 노려봤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무리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찾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황제 폐하의 유일한 정비가 될 사람이다! 그런 내게 감히 뭐라고?”

아그네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모습이 꼭 위협을 받아 온몸의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나, 몸을 빵빵하게 부풀린 복어 같았다.

“오벨리아, 정신 차려라.”

에크하르트가 갑작스러운 아그네스의 등장에 그대로 굳어 버린 오벨리아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목소리에 불에 덴 것처럼, 그녀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내리깔았다.

찰나에 증오 어린 시선이 아그네스에게 가닿아 정체를 들켰을까 봐 심장이 떨렸다.

아니, 심장의 이 격렬한 떨림은 아그네스를 너무 증오하기 때문이던가?

오벨리아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증오가 너무 깊었고 또 그것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지금이라도 아그네스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아그네스가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그녀를 짓밟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었다.

오벨리아는 자신의 피눈물 위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뻔뻔하고 당당하게 서 있는 아그네스를 눈에 담을 자신이 없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기필코 아그네스 또한 같은 피를 흘리게 해 주리라는 마음이 드글드글 끓어댔다.

눈을 마주쳤다간,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벨리아, 네가 원하는 건 그들이 단순히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니지 않나.”

오벨리아의 상태가 어떤지 알아차린 에크하르트가 계속해서 말을 꺼냈다.

그녀에게 이성을 찾으라는 의미였으리라.

“알아. 아는데….”

오벨리아의 꽉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도 언젠가는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아무렇지 않게, 그들과는 모르는 사람처럼 웃어 줄 예정이었다.

그래야만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가 훗날 더 크게 불행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런 식으로 아그네스를 마주하는 것은 오벨리아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무리 아그네스가 다급하다고 한들 이렇게 힐켄테데를 불쑥 찾아오는 무례를 범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아그네스도 귀족으로 지낸 세월이 있는데, 굳이 힐켄테데를 대상으로 무례를 범할까 했던 것이다.

그렇게 예기치 못한 마주침은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 되었다.

“힐켄테데의 저택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던가?”

오벨리아의 상태를 보던 에크하르트가 그녀를 가리고 서며 입을 열었다.

그의 서늘한 시선이 기사들을 향했다.

아그네스는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때 아닌 소란에 놀랐던 기사들이 즉시 아그네스에게로 다가갔다.

누가 봐도 그녀를 쫓아내려는 모양새였다.

“지금 황궁에서 온 날 쫓아내겠다는 거야…?!”

아그네스가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호기롭게 쳐들어왔으나 이런 식으로 문전박대를 당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아니, 뻔뻔하게 신부가 입어야 할 새하얀 색의 드레스를 골라 입고 온 것을 보면 감히 그러고도 힐켄테데에서 대접을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던 걸지도 몰랐다.

“이거 놔!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느냐!”

기사들이 아그네스의 팔을 양쪽에서 붙잡자, 그녀가 거세게 몸부림쳤다.

그러나 힐켄테데의 지독하게 단련된 기사들은 겨우 아그네스 따위의 몸부림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힐켄테데 대공! 당신, 날 이렇게 대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아그네스가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북부의 모든 귀족이 보는 곳에서 내쫓기게 생긴 그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 있었다.

“잠깐.”

에크하르트가 갑자기 기사들을 세웠다.

그가 성큼성큼 아그네스 쪽으로 다가갔다.

“그래. 제대로 생각하는 게 좋을 거….”

아그네스의 얼굴에 그새 득의양양함이 떠올랐다.

물론, 얼마 가지 못했지만.

스윽.

아그네스의 입이 마침내 다물렸다.

에크하르트가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누었기 때문이다.

“감히 황제의 정부 따위가 내 정원을 더럽힌 것도 모자라, 나와 맞먹으려 드는군.”

노골적인 경멸과 멸시가 아그네스의 위로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이 따끔거리는 것이, 옅게 피가 비추고 있을 게 뻔했다.

아그네스는 그런 상황에서 떠들 수 있을 만큼 담이 크지 못했다.

“아깐 잘만 떠들더니, 이젠 입을 다무는 건가? 아니면, 내 말을 무시하는 건 아니겠지.”

에크하르트의 시선이 얼음을 날카롭게 벼린 것처럼 차갑고 섬뜩했다.

아그네스가 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자, 잘못… 잘못했, 습니다.”

더없이 굴욕적이었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사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망설이는 순간, 에크하르트가 얼마든지 그녀를 벨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그네스의 선택이 정답이었는지, 에크하르트가 그제야 검을 거두었다.

“잘 들어. 황제 폐하라 할지라도 내 허락 없이 내 정원에 발을 디딜 수는 없어.”

오만한 말이었다.

아까와 달리 황제가 아닌 황제 폐하라 칭했으나, 에크하르트의 어조에 황제를 향한 존경심 따위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불청객은 입 다물고 조용히 꺼져.”

에크하르트가 기사들을 향해 고갯짓했다.

기사들이 그대로 아그네스를 끌어내려던 찰나였다.

“커티스! 당신이 내게 와도 된다고 했잖아!”

사람들의 앞에서 굴욕을 당한 것에 대한 울분에 찬 아그네스가 소리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람들의 이목이 커티스에게로 향했다.

그는 어느덧 사색이 되어 있었다.

커티스는 마치 아그네스를 모르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처럼, 어떻게든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하여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로웰스턴 원로가….”

하지만 사람들의 수군거림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힐켄테데의 원로라면, 저택의 문지기가 그 명령을 어기기 어려울 테니 아그네스가 뜬금없이 정원에 나타난 것도 말이 되는 일이었다.

사실 오벨리아가 커티스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쉽게 용인되도록 손 쓴 덕이었으나, 사람들이 그런 것까지 알 리는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커티스가 감히 대공의 허락도 없이 힐켄테데 저택의 문을 열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엄연히 중죄였다.

심지어 불청객을 들여놓은 것은 더더욱.

“범인을 특정 지어 주었으니, 그건 고맙다고 해야겠군.”

에크하르트가 싸늘히 미소했다.

그러나 자신을 외면한 커티스 따위, 아그네스가 알 바 아니었다.

그녀는 그대로 기사들에게 끌려 나갔다.

그리고 에크하르트가 커티스를 가리키며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저 자를 구금하라.”

***

결혼식과 피로연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준비는 완벽했으나, 아그네스가 워낙 소란을 피우고 커티스가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으니 다들 식과 연회에 집중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게 여차여차하여 오벨리아는 현재 에크하르트와 그녀를 위한 신방에 들어 있었다.

그렇게 홀로 남자. 오벨리아는 자연스럽게 낮에 봤던 아그네스를 떠올렸다.

‘…꼼짝할 수 없었어.’

오벨리아가 제 아랫입술을 이로 짓이겼다.

분노에 차서, 겨우 감정 하나를 다스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언젠가는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를 마주해야 할 텐데 또 이런 식이라면 분명 그녀뿐 아니라 에크하르트도 곤욕을 치를 터였다.

또 다시 알렉산드로나 아그네스를 봤을 때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면, 오벨리아가 그 오벨리아 카테리안느임을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일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오벨리아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미는 감정을 꾹 삼켜내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오벨리아의 자매 같은 시녀도, 오랜 그림자인 그녀의 기사도, 심지어 아버지조차도 죽었다.

첫째 오빠의 생사도 모르고 어머니는 저택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그 일에 아그네스가 일조했다.

그런 자를 상대로 증오를 어찌 삼키겠는가!

“오벨리아.”

지척에서 들린 에크하르트의 목소리에 오벨리아가 홱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차오르는 증오가 너무 그득그득하여 그가 다가오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미안해, 에크하르트. 내가 일을 망칠 뻔했어.”

오벨리아는 차마 에크하르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에게 감정적으로 굴지 말라고 했던 게 오벨리아였다.

그런데 정작 복수를 해야 할 상대를 두고 감정 하나 다루지 못해 일을 그르칠 뻔했으니, 오벨리아로서는 대단히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사과를 늘어놓았다.

“정말 미안해.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게 할게.”

오벨리아의 고개가 자꾸만 숙여졌다.

결혼식장에서 아그네스를 향한 증오를 들켰다면 지금껏 애써 그녀의 정체를 숨기고 해 온 모든 일이 허사가 되었을 것이다.

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감정적인 사람일 줄은 몰라서…. 미안, 정말….”

오벨리아의 말끝이 자꾸만 흐려졌다.

에크하르트에게 미안했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자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보다 앞선 증오가 오벨리아를 짓눌렀다.

“…너, 괜찮나?”

에크하르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오벨리아의 감정 따위 무시하고 싶고, 이 여자와 복수 외의 것으로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심정과 그로 인한 증오가 얼마나 지독한지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다.

괜찮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고야 만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

오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의미 없는 소리만을 냈다.

괜찮냐고.

에크하르트가 그렇게 물어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더욱 당황스러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투둑.

그녀가 두 눈을 깜박이자 물방울들이 연달아 창백한 뺨을 지나 아래로 추락했다.

오벨리아는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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