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변주(6)
오벨리아는 처음에 자신이 왜 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인간이 도저히 풀 수 없는 답답함과 분노에 잠기면 그것이 눈물이 되어 흐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아아….”
오벨리아의 입에서 채 말이 되지 못한 소리가 흘렀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제 손으로 퍽퍽 쳤다.
에크하르트가 그것을 막자, 마침내 오벨리아의 입에서 제대로 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윽… 흐…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그렇게, 흑…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녀는 아그네스가 증오스러웠다.
그러나 오늘 오벨리아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당장 어쩌지 못하는 스스로가 얼마나 미웠던지,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내가 또… 우윽, 내가, 그걸, 살려서… 흐….”
꾸역꾸역 울음을 참아내느라, 오벨리아의 울음은 울음 같기도 고통 어린 신음 같기도 했다.
어차피 그 두 개의 본질은 별반 다를 바 없었을 테지만.
“아… 아, 흐으으….”
후두둑.
눈물이 방울방울 지다가 종래에는 주르륵 계속해서 뺨을 타고 흘렀다.
울분이 가시지 않았다.
억울했다.
답답했다.
오벨리아는 아그네스를 살려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지금 당장 아그네스에게 참혹한 복수를 돌려주기에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 사실이 너무나 비참하고, 또 비참하고… 그래서 자신이 미웠다.
에크하르트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그녀를 차마 어쩌지도 못하고 그저 쳐다봤다.
그가 증오해도 할 말 없을 여자가 울고 있는데, 그 울음이 너무 처참해 보였다.
달랠 수도, 타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에크하르트는 조용히 돌아섰다.
그러나 오벨리아의 곁을 떠나지는 않았다.
마치, 네 눈물을 아는 척하지 않을 테니 실컷 울라는 것처럼.
또한 네가 울어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오벨리아의 눈물은 점차 더더욱 쏟아졌다.
아그네스를 마주하고서도 원수를 죽이지 못한 그 한이 흐르는 밤이었다.
***
당연한 일이지만, 아그네스가 제멋대로 힐켄테데에 행차했다가 기사들에게 붙들려 쫓겨난 일화는 알렉산드로의 귀에도 들어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거기에 간 거야!”
그리고 또 당연하게도 알렉산드로는 그 일에 대하여 대단히 분노했다.
수도, 아니 제국 전역이 그 일로 황제의 정부와 황제를 비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아그네스는 두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그렇지, 행동 하나하나 조심해도 모자랄 판에 초대받지도 않은 곳에는 왜 가서 이런 망신을 만들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의 언성은 점점 높아졌다.
차라리 황태자 시절이 자유로웠다고 말하고 싶을 만큼, 요즈음 황제가 된 그는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 아무리 정부로 취급된다지만 황제의 면을 봐서라도 넘어가 줄 만한데, 그 건방진 힐켄테데는 알렉산드로의 여자를 망설임 없이 내쳐 버렸다.
그건 사실상 그가 무시당한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 말하면 말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아무리 오벨리아처럼 할 수는 없다지만, 도움이 안 되면 가만히라도….”
그리고 알렉산드로의 말은 기어이 아그네스 또한 소리를 지르게 만들었다.
“날 죽은 패배자년 따위와 비교하지 마!”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알렉산드로의 얼굴은 아까보다도 더욱 차게 굳어 있었다.
그런 그를 확인한 아그네스는 낭패 어린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오벨리아를 흉내 내어 우아함을 연기했다.
그러면서도 천성이 고아하고 자존심이 드높은 오벨리아와 달리, 아그네스는 알렉산드로의 앞에서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나긋나긋하게 굴었다.
그런 점이 오벨리아와 다른 아그네스를 좋아했던 알렉산드로가 지금 그녀가 보이는 태도를 용인할 리 없었다.
“그러니까… 그게… 알렉, 네가 나를 오벨리아와 비교하니까….”
아그네스가 뒤늦게 말투를 바꾸어 다시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알렉산드로의 표정이 풀릴 리가 없었다.
그러자 그녀도 억울해졌다.
말을 잘못한 것은 그인데, 왜 자신만 일방적으로 잘못을 빌어야 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 관계에서 약자는 아그네스였으므로, 잘못을 비는 것 또한 결국 그녀의 몫이었다.
“…망신당하게 해서 미안해, 잘못했어.”
아그네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기가 죽어서가 아니었다.
저 홀로 사과해야 하는 이 상황에 열이 뻗치는데, 그것을 티 낼 수 없으니 표정을 가리기라도 해야 할 뿐이었다.
솔직히, 망신당한 일도 그렇지 않은가.
알렉산드로가 약속했던 대로 아그네스를 황후 자리에 올려 주었다면 힐켄테데 따위가 어찌 그녀를 그렇게 박대했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아그네스는 이 말 역시 속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짜증이 나 죽을 것 같지만, 그 정도는 그녀도 분간할 줄 알았다.
“당분간 외출 금지야.”
그리고 한참 동안 아그네스를 매섭게 노려보던 알렉산드로가 노골적인 한숨을 푹 내쉬며 마침내 말을 꺼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내게 그따위 언행을 보이지 마.”
알렉산드로가 경고하듯 덧붙였다.
“…알겠어.”
시무룩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인 아그네스가 속으로는 그 경고를 같잖게 여겼다는 것은 그녀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
“으음….”
오벨리아가 비몽사몽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울다가 기절하듯 잔 모양이었다.
별로 오래 자지 않았는지 신방 안은 아직도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완전히 눈을 뜬 순간, 오벨리아는 창문을 암막 커튼이 모조리 막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오벨리아가 당황하여 상체를 홱 일으켰다.
몇 시간을 잔 것인지 도대체 감도 오지 않았다.
“일어났군.”
그리고 잔뜩 당황한 오벨리아와 달리, 평이해 보이는 에크하르트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밤새 거기 있었던 거야…?”
그리고 오벨리아는 놀라 에크하르트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침대에 올라오지도 않고 바닥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지만, 그녀로서는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군영 바닥보다는 훨씬 낫다.”
에크하르트가 몸을 일으키며 담담히 말했다.
그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오벨리아는 울다 잠든 후 내내 끙끙 앓았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꿈속에서조차 편안하지 못한 그녀의 옆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차마 오벨리아와 같은 침대를 쓸 수도 없어서 바닥에 앉아 있던 것이다.
햇빛이 그녀를 비출 아침이 되어서야 움직여 암막 커튼을 친 것 또한 같은 이유였다.
“몸은 괜찮나?”
에크하르트가 무겁게 내려온 암막 커튼을 걷어내며 물었다.
어제 많은 눈물을 쏟아냈으니, 사람이라면 의례적으로 물을 수 있는 질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괜찮아.”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한 바탕 쏟아내고 나서 그런지 오히려 훨씬 개운한 것 같았다.
환하게 내리쬐는 정오의 햇빛 탓에, 창가에 서 있는 에크하르트의 모습이 눈부셨다.
오벨리아가 강렬한 햇빛을 피하기 위하여 눈살을 찌푸렸다.
“어차피 이왕 늦은 거, 느긋하게 식사하고 움직이도록 하지.”
에크하르트가 그런 오벨리아를 알아차린 듯, 그녀에게서 햇빛을 가리고 섰다.
그제야 그녀는 눈을 똑바로 뜰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빛을 등지고 섰는데도, 그의 얼굴은 이토록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인다는 게.
“…그래.”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아마 그 탓이었을 터였다.
오벨리아가 이미 아침이 훌쩍 지난 시간에도 아주 오래간만에 초조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승낙이 떨어지자, 에크하르트가 시녀를 불러들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시녀들이 들어와 상을 차렸다.
고소한 빵의 냄새와 싱그러운 샐러드의 향이 공중에 가득했다.
따끈따끈한 수프에서 피어오르는 김은 절로 식욕을 돋게 했다.
그런 아침이었다.
가만히만 있으면 썩 잘 어울리는 아내와 남편 같은.
그런 평범한 아침.
***
커티스는 물론, 그에게 동조한 일파가 모조리 숙청되었다.
에크하르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 탓에 원로의 자리가 상당히 비어 버렸으니, 새로운 이들을 앉혀야만 했다.
보통 전 가주를 모시던 가신들이 원로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힐켄테데가 아무리 북부의 왕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에게도 다른 마음을 품는 귀족들이 많지 않은가.
힐켄테데라고 한들 그들을 따르며 다른 마음을 품은 자들이 전혀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원로를 새로 뽑는 것에 누구도 이견을 가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힐켄테데에서는 쭉 그렇게 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벨리아는 달랐다.
“이 기회에 원로의 수를 줄이는 게 어때?”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에게 제안했다.
“원로들의 반발이 적지 않을 거다.”
에크하르트의 대답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아무리 원로들이 서로 싸운다고 한들 중요할 때는 결국 같은 원로의 편이었다.
그런데 원로들의 절대적인 수가 줄어든다면 그들은 분명 반발할 터였다.
원로 중에 비리를 저지른 자들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몇 가지 비리쯤이야, 원로들의 공로를 생각하여 적당한 벌과 함께 넘어가라는 식으로 굴 테니까.
에크하르트라고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다.
가신들은 현 가주의 편이다.
원로들은 전 가주를 모시던 자들이라 현 가주와 대립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로라는 자리를 두는 것은 그들의 경험과 연륜이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원로들이 단체로 반발해 버리면 힐켄테데의 상황은 곤란해질 게 뻔했다.
“그래서 생각해 본 게 있는데….”
“쉿.”
에크하르트가 돌연 오벨리아의 말을 멈추었다.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 소리도 없이 문가로 다가갔다.
휙!
에크하르트가 문을 홱 열어젖혔다.
다다다닥.
누군가 다급하게 복도를 뛰어 사라지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다.
에크하르트는 표정을 굳힌 채 방을 나서며 말했다.
“혹시 모르니 방문을 잠그고 있어, 오벨리아.”
그가 발소리를 따라 재빠르게 복도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