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변주(7)
당연하게도 에크하르트는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자를 놓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만에 침입자를 잡아낸 그의 얼굴에는 힘들어하는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그네스 이멜리언이 움직였다.”
숨어든 자의 정체는 아그네스가 보낸 사람이었다.
그렇게 쫓겨난 후에도 오벨리아에게 관심을 거두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그네스가 황궁이 있는 수도에서 북부의 힐켄테데까지 구태여 온 것은 오벨리아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원로들의 이름으로 아그네스에게 내 초상화를 보내면 어때?”
잠시 고민하던 오벨리아가 입을 열었다.
아그네스는 결혼식 날, 오벨리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오벨리아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터였다.
어차피 오벨리아는 언젠가 아그네스에게 얼굴을 보여야만 했다.
조금 일찍 보이는 것쯤이야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그네스는 불안해서 알렉산드로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도 못할 테니까.
“원로들을 걸러낼 기회로 이용하자는 거군.”
단 한 마디만으로도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말을 알아들었다.
원로들이 지금보다도 더 줄어들게 되면 그들이 아무리 발언을 해 봤자 영향력이 미미해진다.
게다가 이미 커티스가 일을 친 시점에서 다른 원로들이 또 잘못을 저지른다면 원로회 자체가 그 자질을 의심받게 될 터였다.
그럴 때 아예 밀어붙여서 원로회의 의석수 자체를 줄여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면 일의 적임자로는 프렐런트가 좋겠군.”
에크하르트가 말했다.
프렐런트는 유일한 진짜 힐켄테데를 위협하는 일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녀보다 적임자는 없었다.
“프렐런트는 내가 힐켄테데의 핏줄이 아님에도 대공의 자리를 차지한 것을 대단히 싫어했지. 그런데도 힐켄테데의 존속을 위해 내가 대공 자리에 오르는 것은 동의했어.”
프렐런트가 매번 에크하르트에게 맞섰던 것은 진짜 힐켄테데도 아닌 그가 힐켄테데를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그녀는 힐켄테데를 위한 에크하르트의 결정에는 결국 찬성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프렐런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자는 힐켄테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는 이 기회에 원로라는 이름으로 힐켄테데에 해악만 끼치고 있는 원로들을 몰아내면 되는 것이었다.
“아그네스가 도움이 될 때도 있네.”
오벨리아가 서늘하게 웃었다.
오벨리아의 얼굴이 똑같이 그려진 초상화를 보고 기겁할 아그네스를 생각하니, 결혼식 날 그녀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해묵은 감정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물론, 이것은 오벨리아가 아그네스와 알렉산드로에게 줄 불행의 시작일 뿐이겠지만.
***
아그네스의 독단적인 행동 이후, 알렉산드로가 직접 붙여 준 시녀가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이멜리언 영애, 누군가 이것을 보내왔습니다.”
아그네스가 순간 그 시녀를 휙 노려보았다.
이멜리언 영애.
아직도 알렉산드로와의 혼인을 인정받지 못한 아그네스는 이미 황궁에서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황후로 불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악문 그녀의 턱이 약하게 떨렸다.
화를 쏟아내고 싶었으나, 알렉산드로가 붙여 준 시녀였다.
참아야만 했다.
그러나 대꾸하는 아그네스의 어조는 이미 대단히도 신경질적이었다.
“누가 보낸 건지 정체도 모를 상자 따위를 감히 내게 건네는 거야?”
“이멜리언 영애께서 북부에서 온 것이 있거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가져오라고 하셨기에.”
알렉산드로가 보낸 시녀는 아그네스의 신경질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아그네스로 하여금 더욱 속에서 천불이 일도록 만들었다.
“내놓고 너는 나가 봐.”
아그네스가 시녀에게서 휙 상자를 빼앗아 들었다.
중간에 연락이 끊기기는 했으나, 한둘도 아니고 꾸준히 북부로 사람을 보내고 있으니 그중 누군가는 그녀에게 상자를 보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확인해야만 했다.
“아악!”
시녀가 나가자마자 상자를 연 아그네스가 곧장 비명을 지르며 상자를 떨어트렸다.
툭, 쨍그랑!
무언가의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선명히 났다.
상자 밖으로 튀어나온 액자의 그림에는 오벨리아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안에 든 쪽지를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얼굴이 아그네스가 궁금해하던 ‘오벨리아 힐켄테데’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살아, 살아 있었어?”
아그네스가 손끝을 떨며 깨진 액자를 집어 들었다.
황태자비의 궁이 전소한 날 죽은 오벨리아 카테리안느.
그 얼굴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오벨리아 힐켄테데.
이게 과연 우연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아그네스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당장, 당장 사람을 불러와!”
그리하여 아그네스가 다급하고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지금 당장, 누구라도 보내 오벨리아 힐켄테데의 정체를 알아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불안하고 두려워 죽을 것 같았으므로.
***
아그네스가 사람을 보내는 빈도수가 점점 늘고 있었다.
이제는 며칠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오벨리아의 방에 다양한 이들이 접근했다.
물론, 에크하르트가 일부러 경계를 느슨하게 서도록 기사들에게 미리 경고해 둔 덕이었으나, 침입자는 대단히 실력이 뛰어난 이는 아닌지 그것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게 아니었어도 오벨리아는 아그네스의 행동이 단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전부 다 대단치도 못한 것들만 보내는구나.’
도리어 오벨리아는 아그네스가 그다지 여의치 않은 상황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그네스가 보내는 이들은 전부 이멜리언 백작가의 사람이 아니라 돈을 주고 따로 고용한 자들이었다.
오벨리아도 오랜 황궁 생활을 했으니 그런 식으로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고용할 수 있는 자들에게도 급이라는 게 있었다.
진짜로 급이 높은 자들은 사람도 가려 받는다지만 아그네스에게 풍족한 돈이 있었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자들을 보냈을 터였다.
‘알렉산드로와의 관계도 매끄럽지 않은가 보네.’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의 사이가 좋았다면, 그가 계속해서 그녀에게 이것저것 안겨 줬을 터다.
아그네스가 보내는 자들의 질은 심지어 조금씩 낮아지고 있었다.
적어도 알렉산드로가 아그네스에게 베푸는 것들이 처음과 같지는 않다는 증거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점차적으로 아그네스가 운용할 수 있는 돈이 줄어들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상황에서 아직 황후도 되지 못한 아그네스가 알렉산드로 몰래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의 질이야 딱 이 정도 수준인 것이다.
덕분에 아그네스가 보낸 이들을 속이는 것도 쉬웠다.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수하들을 이용해, 그들이 아그네스에게 정보를 준 원로인 양 속이고 아그네스와 답신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내통한 정보들은 또 다시 에크하르트의 수하들이 비리를 저지른 원로들의 집에 몰래 숨겨 두었다.
모든 일이 매끄럽게 흘러가는 듯했다.
에크하르트가 아그네스의 사람인 척 구는 이들 중에, 알렉산드로가 보낸 종자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아그네스 이멜리언이 황제한테 네 존재를 들킨 모양이야. 혹은, 황제가 제 정부를 감시하고 있던가.”
그리하여 에크하르트는 이 사실을 오벨리아에게 전했다.
아그네스가 오벨리아의 존재를 알렉산드로에게 알릴 리도 없었고, 스스로 알렸다면 두 사람이 굳이 따로 사람을 보낼 일도 없을 터였다.
그러니 에크하르트의 말 중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의 사이가 매끄럽지 않으리라는 오벨리아의 추측이 대략 들어맞은 것이다.
“알렉산드로는 워낙 의심이 많은 사람이니까.”
알렉산드로가 오벨리아 힐켄테데의 생김새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이 시점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성군의 모습을 표방하고 있는 그로서는 제 아내에게 직접 바실리스크의 독을 건넸다고 밝히지 못할 터였다.
그런 이상, 오벨리아의 정체를 증명할 증거는 없었다.
“아그네스가 제멋대로 북부까지 왔다 갔으니 그 후 잔뜩 예민해져 있겠지.”
알렉산드로는 천성이 타인을 잘 믿지 못했다.
그런 그가 자신만은 신뢰한다는 게, 한때의 오벨리아에게는 자랑이었다.
어쩌면 그조차 연극이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아직도 알렉산드로를 사랑하기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8년간 최선을 다했던 자신의 진심이 실은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는 게, 그게 입이 쓸 뿐이었다.
“에크하르트, 혹시 황제의 방이나 집무실에도 사람을 들일 수 있을까?”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오벨리아가 문득 물었다.
에크하르트가 잠시 고심하더니 대답을 내놓았다.
“그 자에게 무엇을 시킬 건가에 따라서 다르겠지. 복잡한 일이라면 기껏 들여보내도 들킬 가능성이 크니까.”
“간단한 일 하나만 해 주면 돼.”
오벨리아는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 사이에 언젠가 터질 불씨 하나를 심고 싶었다.
“아그네스에게 보낸 것과 똑같은 액자에 담긴 초상화를 알렉산드로의 방이나 집무실에 감춰 놔 줘.”
오벨리아는 믿었다.
알렉산드로는 아내인 오벨리아를 배신했다.
설령 그것이 자신에 의한 것일지라도, 아그네스는 절대 그 사실을 잊을 수 없으리라.
이 작은 불씨가 발견될 즈음에는, 그들을 불행으로 집어삼킬 커다란 화마가 되어 있을 터였다.
***
프렐런트가 어리석은 자는 아니었으니 어설프게 원로들을 모함하려고 했다가는 역풍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프렐런트를 끌여들일 완벽한 준비가 끝날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준비가 착착 진행되던 어느 날, 오벨리아는 원로와 가신들이 함께 모인 회의 중 모두가 보는 앞에서 쓰러졌다.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그녀를 받아 안았다.
원로와 가신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음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