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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33화 (33/136)

33화. 생을 만드는 것(1)

프렐런트의 말에 원로들 사이에 한 차례 싸한 침묵이 흘렀다.

“그게 무슨 소리요?”

“이미 대공 전하께서 그대들이 저지른 비리의 덜미를 잡으셨다는 의미요. 완전히 들통 나면, 대공 전하께서 원로회를 가만히 둘 것 같소?”

프렐런트는 가장 큰 문제인 원로들이 황제의 정부와 결탁한 사실에 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원로회의 모든 원로가 그 사실을 알고도 에크하르트에게 고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죄요, 고한다면 원로회 자체가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프렐런트, 우리를 버리고 원로회가 뭐 얼마나 잘 될 성싶소!”

“망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게 나가는 쪽이든 남는 쪽이든.”

프렐런트의 말이 옳았다.

원로의 자리를 차지하고 비리를 저지르면 더욱 큰 벌을 받는다.

차라리 프렐런트의 선에서 정리되면 다행이었다.

원로 자리에서 내쫓기게 생긴 자들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결국 그날 30여석에 달하던 원로회의 의석수는 커티스 일파와 비리에 얽힌 원로들이 모두 정리되어 단 13석만이 남았다.

힐켄테데의 역사상 가장 적은 원로회 의석수를 달성한 셈이었다.

이로써 마침내 힐켄테데의 모든 권력이 에크하르트의 손에 들어왔다.

***

며칠 뒤, 힐켄테데의 성에 황실의 연회를 알리는 초대장이 도착했다.

알렉산드로의 즉위식과 함께 황태자비가 죽었기 때문에,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연회가 예기치 않게 중단된 터였다.

그것을 다시 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겨우 그것 때문에 알렉산드로가 초대장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로는 일부러 힐켄테데 대공과 대공비의 앞으로 각각 따로 초대장을 보냈다.

본래라면 한 가문에 초대장은 한 장만 보내는 게 보통이었다.

어차피 그 가문에서 연회에 오고 싶은 사람은 모두 초대장의 주인과 함께 등장할 텐데, 따로 보낼 필요가 무어 있겠는가.

그렇지만 대공의 앞으로만 보내면 대공비가 올 수도, 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일부러 오벨리아의 앞으로 초대장을 또 보낸 것이다.

황제에게 초대장을 받고 특별한 이유 없이 연회에 빠질 수는 없었으니까.

‘오벨리아 카트리안느’와 똑같이 생겼다는 ‘오벨리아 힐켄테데’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부리는 수작임이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마침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수도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걸음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수도에 있는 힐켄테데의 타운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황제의 전속 시종이 찾아왔다.

힐켄테데에 숨어든 황제의 첩자는 잡아들인 지 오래였으니, 초대를 해 놓고 타운하우스의 근처에서 두 사람이 도착하는 것을 계속 기다린 것이 분명했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의 혼인 선물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황실 연회의 초대장이 왔을 때부터, 오벨리아나 에크하르트 모두 알렉산드로에게 꿍꿍이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황제의 시종이 내민 것은 그들의 결혼 축하 선물이었다.

선물은 보석부터 옷감, 희귀한 식재료, 수도에서 자생하지 않는 정원수까지 황제가 보냈다는 게 티가 나게 화려했다.

힐켄테데의 사람들이 티 내지 않고 선물들을 모두 검수했으나 유해한 것은 없었다.

황제가 성의껏 보낸 선물들이었으니 아무리 에크하르트가 힐켄테데 대공이라고 한들 굳이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감사히 받겠다고 전해라.”

결국 에크하르트는 황제의 선물들을 타운 하우스 안으로 들였다.

“폐하께서 힐켄테데의 안주인께서도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지 꼭 확인하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황제의 시종은 선물이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도 곧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알렉산드로는 선물을 핑계로 시종을 시켜 오벨리아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내 아내는 여독으로 인해 쉬는 중이다. 방해하지 말고 알아서 하도록.”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그것을 단호히 잘라냈다.

알렉산드로가 오벨리아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가장 극적일 때 이루어져야만 했다.

“대공 전하, 확인하지 않으면 제가 곤란해집….”

“그래서, 네 곤란함 따위에 내 아내를 피곤하게 하라는 건가?”

에크하르트가 오만하고 위압적인 눈으로 시종을 내려다봤다.

무려 황제의 전속 시종이었다.

황제의 선물을 전하러 황제의 대리로 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 없던 시종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럼, 잘 돌아가게.”

그러거나 말거나 에크하르트는 단호히 시종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시종은 결국 내쫓기듯 타운하우스를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시종이 돌아가고 나서야 오벨리아는 모습을 드러냈다.

“알렉산드로가 왜 굳이 지금, 여기로 선물을 보냈을까.”

오벨리아가 의문을 표하며 알렉산드로가 보낸 선물 목록들을 살폈다.

그녀와 에크하르트가 결혼한 후 이미 시간이 꽤 흘렀다.

선물을 북부로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굳이 지금, 수도에 있는 타운하우스로 축하 선물이랍시고 물건들을 보내다니 어딘가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나도 이상하긴 하다만… 선물을 검수해 봐도 수상한 부분은 찾아낼 수가 없었다.”

에크하르트도 찜찜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연이어 목록을 살펴도 결국 알렉산드로의 별다른 의도는 발견할 수 없었다.

실제로도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정확히 하루 뒤에 발생했다.

***

오벨리아는 황궁에 살던 시절의 습관으로 일찍 일어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건강이 더욱 나빠지면서 기상이 늦어졌는데, 그에 반해 끔찍한 일을 겪은 후유증 탓인지 잠결에도 예민하여 쉽게 깨어나고는 했다.

그리하여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가 잠들어 있을 때면 되도록 주변이 부산스럽지 않도록 사람들을 물려두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 점이 그날따라 독이 되었다.

“대공 전하, 큰일 났습니다!”

시녀가 늦은 아침 에크하르트의 집무실로 달려왔을 때는 이미 일이 벌어진 뒤였다.

“대공비 전하께서 갑자기 열이 올라 떨어지질 않으세요!”

에크하르트는 그 말을 듣자마자 오벨리아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의원에게서 듣게 된 말은 어이없을 정도였다.

“알레르기 반응입니다.”

“그게 무슨… 이렇게 열이 오르는데 이게 어떻게 단순히 알레르기 반응이란 말인가! 게다가 정말 알레르기라면 약을 먹이면 될 일을, 왜 열을 못 내리고 있지?”

에크하르트가 드물게 흥분하여 소리쳤다.

의원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자, 억지로 진정한 그가 주변 사람들을 모두 물린 뒤 재차 물었다.

“셀리아, 아는 것을 모두 말해라.”

셀리아는 북부에서부터 에크하르트를 따르던 의원으로, 그 외에 오벨리아의 몸 상태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아닙니다만…, 대공비 전하께서는 바실리스크의 독에 중독된 상태이시기 때문에 조금만 신체의 균형이 깨져도 위태로우실 수 있습니다.”

에크하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그놈의 바실리스크의 독.

그는 또 다시 그날, 오벨리아가 독을 마시도록 두었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럼 약은 어떻게 된 거지?”

진짜 알레르기라면, 그에 상응하는 약을 먹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의원이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단 것은 무슨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이미 한 차례 약을 썼으나 소용이 없는 것을 보아 알레르기의 원인이 계속해서 오벨리아 님을 자극하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현재 오벨리아 님께서 가진 알레르기가 무엇인지 검사 중입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알레르기만 해도 수십 가지였다.

그러니 오벨리아가 정신을 차리고 직접 말해 주지 않는 이상, 검사를 통해 알아내는 데는 시간이 상당히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먹는 것은 아닐 거다. 북부에서도 오벨리아가 특별히 못 먹는다고 말한 것은 없으니까.”

“예, 그럼 음식 쪽은 제외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음식이 아니라면 딱히 특정 동물과 접촉하신 적도 없고…. 밭은 숨이나 충혈 된 눈과 같이 나타나는 증상을 보면 꼭 꽃가루 알레르기 같은데….”

“정원의 꽃들이 문제가 된단 말인가?”

“아니요. 사실 의원이어도 모르는 자들이 있습니다만, 꽃가루 알레르기란 사실 이름만 그렇지 꽃보다는 참나무나 자작나무 같은 것들이 원인….”

“뭐?”

그 순간 에크하르트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지난날, 알렉산드로가 선물한 정원수가 자작나무였기 때문이다.

“이 쓰레기 같은 작자가…!”

사건의 전모를 알아차린 에크하르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는 곧장 고용인들을 불러들였다.

“당장 황제가 가져다 놓은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다 버려!”

에크하르트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사나웠다.

***

배우는 건 돈이다.

의술은 특히나 더더욱 그랬다.

그러니 의원 중에서도 귀족들을 모시는 자들은 평민들이 평생 부를 엄두조차 못 내는 시대다.

그렇기에 꽃가루 알레르기라고 하면 다들 민들레 정도나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오벨리아 또한 그 원인이 자작나무일 줄은 몰랐다.

그녀가 건강했을 적에는 알레르기 반응이라고 해 봐야 봄에 잔기침이 나거나 눈이 충혈 되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마저도 약을 먹으면 쉽게 괜찮아졌다.

그러니 굳이 굳이 의사에게 진지하게 진찰을 받을 필요도, 알레르기의 깊은 원인을 찾아볼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괜찮으십니다.”

오벨리아의 상태를 다시 한 번 진찰한 뒤, 셀리아가 마침내 말했다.

정원의 나무를 모조리 제거하고 나서야 괜찮아진 오벨리아의 상태에 에크하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자신이 짐작했던 것을 셀리아에게 물었다.

“셀리아, 혹시 자작나무가 꽃가루 알레르기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 만한 의원이 오벨리아 같은 건강 상태를 가진 이에게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났을 때 심각해지란 것을 모를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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