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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34화 (34/136)

34화. 생을 만드는 것(2)

“제가 만약 대공비 전하께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면, 진즉에 자작나무 같은 건 모두 베어 버리시라 말씀드렸을 겁니다.”

에크하르트가 의심했던 대로, 셀리아는 그럴 가능성이 작다고 대답했다.

에크하르트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분명 알렉산드로는 오벨리아의 정체를 확신하기 위하여 자작나무를 보낸 것일 터였다.

그녀가 건강했을 때 정도의 반응이라면 솔직히 아무도 모르게 넘어갈 수도 있었고 나무를 모조리 베어버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가 보낸 나무가 베어졌다.

자작나무로 인해 누군가에게 크게 영향이 가지만 않았다면, 노골적으로 황제와 반목할 것이 아닌 이상 굳이 그럴 이유 없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그 큰 나무들이 모조리 타운하우스 밖으로 버려졌으니 누가 봐도 눈에 띄는 행보기도 했다.

즉, 알렉산드로가 이 사실을 확인하기도 매우 쉽다는 의미였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했을 때 알렉산드로가 오벨리아에게 벌어질 일을 몰랐을 리 없었다.

그녀에게 바실리스크의 독을 전하게 한 것이 그가 아니던가.

그러니 알렉산드로는 오벨리아가 독을 마시고도 살아남았으리라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또 다시 그녀를 위협한 것이다.

“정말이지, 개자식이 따로 없어.”

에크하르트가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오벨리아는 아무리 에크하르트가 미워해야 할 여자라지만, 분노하지 않기에는 알렉산드로의 작태가 너무 인간 이하였다.

오벨리아의 뺨에는 이제 겨우 열이 가라앉은 탓에 아직도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알렉산드로가 아무리 확실한 방법을 선호한다지만, 어지간한 개자식이 아니고서야 제게 8년을 헌신한 여자를 이런 식으로 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렇게 확인하고 싶다면, 확실히 확인하게 해 주지.”

에크하르트의 검붉은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가 제 수하를 불러들여 무언가를 지시했다.

다음 날, 에크하르트는 황궁에 심어둔 자신의 수하에게 알렉산드로가 또 선황제에게 불려갔다는 사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

힐켄테데 대공이 황제에게 선물 받은 나무를 모조리 베어 황궁의 정문 앞에 쌓아 두었다더라.

아침이 되자마자 그 소문이 황궁은 물론 수도에 쫙 퍼져있었다.

“네놈, 또 무슨 짓을 한 게야!”

그리고 선황제는 그 소문을 접하자마자 제 아들을 불러들여 불호령을 내렸다.

“무슨 짓을 했길래, 힐켄테데 대공이 대놓고 너와 반목을 해! 네놈이 지금 대공과 반목할 처지냔 말이다!”

선황제의 목소리에 알렉산드로를 향한 무시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이건 황가를 향한 도전입니다! 지금 당장 힐켄테데 대공을 벌해야….”

선황제의 태도에 알렉산드로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반박했다.

그저 오벨리아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한 일이었을 뿐인데 에크하르트가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알렉산드로도 전혀 몰랐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기에 에크하르트의 처사는 지나치게 과했다.

쨍그랑!

“그래서 이프넌트 후작에 이어서 북부까지 네 적으로 돌리면, 황가가 참으로 편하겠구나!”

하지만 그것이 선황제의 성질을 더 돋운 모양이었다.

곧장 알렉산드로에게로 유리잔이 날아왔으니까.

“힐켄테데 대공은 안주인을 잘 들여서 골치 아픈 원로들까지 손아귀에 쥐었다지! 그런데 네놈은 아직도 정부를 황후 자리에 앉히겠다, 허황된 소리나 하고 있고!”

쾅! 쾅! 쾅!

선황제가 분을 못 이겨 제 의자의 팔걸이를 몇 번이고 내리쳤다.

비슷한 나이일진대, 제 아들은 이렇게 한심하게 굴고 힐켄테데 대공은 나날이 더 두각을 드러내고 있으니 속이 터졌다.

“그건….”

알렉산드로가 말끝을 흐렸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선황제의 말은 틀린 바가 없었다.

알렉산드로가 황태자이던 시절, 황가를 지지하던 가장 큰 세력은 카테리안느와 이프넌트였다.

그런데 현재 그 두 세력 모두 알렉산드로를 온전히 지지하고 있지 않으니, 이 상황에서 북부까지 적으로 돌렸다가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네놈이 황가를 우습게 만들어도 정도가 있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알렉산드로를 보며 선황제는 계속해서 분통을 터트렸다.

아무리 힐켄테데가 황가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가문이라지만, 대놓고 황가를 조롱했음에도 불구하고 찍소리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귀족들 사이에 황가가 다시 한번 비웃음거리가 될 것은 예고된 일이었다.

“그건 힐켄테데의 능력 따위가 아니라…!”

계속되는 무시와 책망에 폭발한 알렉산드로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가 황급히 다물었다.

그는 오벨리아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라면 충분히 힐켄테데의 원로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에크하르트의 능력 따위가 아니라 오벨리아의 힘이지 않은가!

알렉산드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와 에크하르트를 비교하는 선황제의 작태에 속이 들끓었다.

그리고 오벨리아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원로들과 힘겨루기나 하고 있었을 에크하르트에게 이가 갈렸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오벨리아가 그 옆에 있지 않았더라면 북부의 힘을 온전히 손에 넣지도 못했을 작자가 콧대를 높이고 있다고 생각하니 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입 다물어! 네놈 변명 따위 더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게, 네놈이 오벨리아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사태는 없었을 것 아니냐!”

그렇지만 알렉산드로가 오벨리아를 죽이려던 방법이 바실리스크의 독이라는 사실까지는 모르는 선황제는 또 다시 제 아들을 탓했다.

그러나 그 순간 알렉산드로는 제 아버지의 말에 공감해 버리고 말았다.

적어도 그가 오벨리아를 놔 주지 않았더라면, 에크하르트가 오늘날 이토록 시건방지게 굴 수는 없었을 것 아닌가!

아그네스는 절대 오벨리아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게 오늘만큼 아쉽고 또 화가 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네놈이 하는 짓거리대로 두고 볼 수 없다.”

한참 화를 쏟아내던 선황제가 숨을 씨근덕거리며 마침내 지친 듯 소리치기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다음으로 내뱉은 말은 알렉산드로에게 거부가 허락되지 않은 명령이었다.

“당장 황후 간택령을 내려라. 그렇지 않으면 네 권위가 어찌 되든, 내가 할 테니.”

“아버지!”

알렉산드로가 다급히 선황제를 불렀다.

아무리 선황제라지만, 사실 권력은 현 황제에게 있어야 옳았다.

그런데 선황제가 황후 간택 문제에까지 끼어 버리면 현 황제의 권위는 말 그대로 우스워질 게 뻔했다.

그리고 그게 선황제가 아그네스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지금까지 제 입으로 간택령을 내리지 않은 이유였다.

“모든 건 때라는 게 있는 법이야! 이런 식으로 황실의 위상이 자꾸 깎이게 되면 나중에는 돌이키려야 돌이키기도 힘들어져!”

제 아들의 태도에도 선황제는 단호했다.

결국 그날, 알렉산드로는 선황제를 설득하지 못했다.

선황제는 그 이야기를 보란 듯 아그네스의 귀에 흘려 넣었다.

선황제가 알렉산드로에게 준 유예 기간 덕에 황후 간택령이 외부로 퍼지지는 않았으나, 그와 아그네스가 심하게 다투게 된 것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

에크하르트는 잠이 든 오벨리아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이 기가 막혔다.

열이 끓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아픈 게 겨우 꽃가루 알레르기 탓이었다니.

오벨리아의 몸은 도대체 얼마나 약해져 있는 것이란 말인가.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를 불러도 그녀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지속적인 각혈로 창백해진 안색과 미약한 숨.

바실리스크의 독으로 인해 장기에 모조리 손상이 가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야윈 몸.

밤 동안조차 안식을 얻지 못해 거뭇해진 눈가.

그 모든 게 오벨리아가 영원히 깨어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단, 복수에 방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마.’

에크하르트는 그제야 새삼스럽게 오벨리아가 복수에 관하여 지나치도록 예민하게 굴던 일들이 와닿았다.

그녀는 매일매일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느꼈을 터였다.

그러니까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날로 꺼져가는 몸이 발목을 휘감고 죽음의 늪으로 끌고 들어가는데, 어떻게 태연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심지어 오벨리아의 원수는 살아 있고 그녀는 죽음을 앞둔 상황이 아니던가.

“…내가 너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에크하르트는 어쩐지 목이 멨다.

오벨리아는 힐켄테데 사변을 방관했다.

그녀의 오빠는 그 사건에 직접 관여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여전히 오벨리아가 일리어스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했던 말을 완벽히 믿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만 이 여자가 가엾었다.

인간은 흑과 백으로 나뉠 수가 없는 존재여서, 에크하르트의 안에서 흐르는 분노는 그가 가진 다른 감정을 덮거나 가리지 못했다.

에크하르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오벨리아가 가엾다.

그녀에게 분노하면서도 온전히 미워만 할 수가 없었다.

에크하르트가 두 손을 아래로 내렸을 때, 그의 표정은 끝내 온전히 무너져 있었다.

아, 어쩌자고 이 여자에게 동정심과 연민을 품었단 말인가.

왜 또 그것이 알량한 감정 따위로 끝나질 않아서 이토록 괴로운가.

에크하르트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 안에서 일렁이는 이 감정들을 잠재우고 싶었다.

물론, 에크하르트는 그조차 실패했다.

“이아난.”

“예, 전하.”

결국 에크하르트는 입을 열어 자신의 그림자 기사를 불러냈다.

오벨리아가 죽을 운명에 놓여있는 한 그는 그녀를 절대 제대로 미워하지 못하리라.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우선 오벨리아를 살리기로 했다.

그래, 그렇게 해서 동정심과 연민을 거둬내고 온전한 분노와 미움만 남기리라.

“신성 제국으로 가라.”

에크하르트가 이아난에게 명령했다.

“가서 힐켄테데의 이름을 걸고서라도, 바실리스크의 독을 해독할 방법을 찾아와.”

어느덧 에크하르트의 표정은 굳건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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