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진짜와 가짜(3)
아이리스 캐트샤는 커티스와 결탁해 온 이다.
그런데 일리어스는 그녀를 해치지 말라고 한다.
에크하르트는 그 두 가지 사실에 일렁이는 감정을 애써 숨긴 채 일리어스에게 물었다.
“어째서?”
“캐트샤 경이 라이너스와 알렉산드로의 연결고리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일리어스의 대답에 에크하르트가 멈칫했다.
아이리스가 일리어스와 연관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일리어스가 아니라 라이너스일 줄은 생각도 못한 터였다.
에크하르트가 눈매를 가늘게 떴다.
그의 안에 과연 일리어스의 말이 진실일까에 대한 의심이 깃들었다.
“아이리스 캐트샤를 황실 2기사단에 들인 것은 그대인 줄 안다만.”
“평민이라는 이유로 뛰어난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용병으로만 전전하는 게 아까워서 그랬을 뿐입니다. 그 후에는 얽힌 적 없어요.”
에크하르트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
‘…일리어스 오빠와 캐트샤 경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
오벨리아의 말과 일리어스의 주장은 정확히 일치했다.
그의 안에서 그제야 제가 오벨리아를 말도 안 되는 추측으로 몰아붙인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크하르트는 찰나에 떠오른 상념을 애써 부정했다.
그렇게 되면 자꾸만 그가 오벨리아에게 하는 잘못이 늘어나는 셈이니까.
“겨우, 그런 것으로… 그대의 동생을 해칠지도 모른다는데 아이리스 캐트샤를 비호한다고?”
에크하르트의 말투는 어딘가 조급했고, 이제는 노골적으로 일리어스를 추궁하는 티를 내고 있었다.
그 낌새를 모르려고 해야 모를 수가 없어서, 일리어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공 전하께서는 지금 제가 캐트샤 경과 연관이 있다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설마 내가 그대와 아이리스 캐트샤에 관한 소문을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대공 전하께서도 그간 상당한 유언비어에 시달리셨던 것으로 아는데, 정작 대공 전하께서 유언비어를 믿으시는군요.”
에크하르트가 불쾌한 얼굴로 낯을 굳혔다.
일리어스의 말이 에크하르트의 정곡을 찌른 탓이었다.
에크하르트는 사는 내내 그가 입양아라는 이유로 온갖 말들을 다 들어 왔으니까.
“대공 전하나 저 같은 위치에 있으면 평범한 행동을 해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요.”
에필로나 장로의 손녀인 레베카가 에크하르트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북부 사교계는 한동안 차기 대공비는 그녀의 자리가 아니냐며 떠들썩했었다.
이러한 여론에 에크하르트의 의사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에크하르트나 일리어스 같은 사람들은 늘 그런 숙명을 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차기 카테리안느 공작은 일리어스였다.
아직 약혼녀조차 없는 일리어스는 늘 사교계의 숱한 화젯거리였고 누구나 차기 공작 부인이 누가 될지 궁금해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아무것도 없던 평민 여자를 기사단에 들여놓았다.
사람들 대다수가 마음에 한 번쯤은 품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켜 주기에는 충분한 화제였다.
“게다가 캐트샤 경 또한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알렉산드로는 자신이 아내를 죽이려고 했다는 걸 영원토록 숨기고 싶을 테니까요.”
일리어스가 침착하게 에크하르트의 말에 대해 반박했다.
이 역시 오벨리아의 말과 비슷했다.
그녀는 알렉산드로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세상에 둘도 없는 성군인 척해 온 알렉산드로가 인제 와서 그 이미지를 버릴 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가 자신도 모르게 일리어스의 시선을 피했다.
남매는 너무 닮아 있었고, 그래서 에크하르트는는 어쩐지 오벨리아를 마주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일리어스를 쳐다볼 수 없었다.
“…그럼, 아이리스 캐트샤와 라이너스 카테리안느는 대체 무슨 사이인 거지?”
에크하르트의 어조는 더 이상 추궁이 아니었다.
그저 알고 넘어가야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질문이었다.
그제야 일리어스의 말투 또한 누그러졌다.
“라이너스가 아이리스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에크하르트가 멈칫했다.
그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그게 맞나…?”
에크하르트는 라이너스같이 혈통에 집착하는 자들을 잘 알았다.
그가 내내 그런 이들에게 시달리며 살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라이너스가 일리어스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일리어스가 카테리안느의 핏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일리어스의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걸 알면서도 라이너스가 기대를 거는 유일한 희망은 자신이 카테리안느의 친혈육이라는 것뿐이었다.
실제로 현재 카테리안느의 가신 중 라이너스에게 동조하고 있는 소수의 이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라이너스만이 유일한 카테리안느의 남은 핏줄임을 주장했다.
그렇게나 혈통 하나에 집착하면서 라이너스가 평민인 아이리스를 좋아한다니 믿지 못할 만도 했다.
“저도 그게 의외이긴 합니다만….”
일리어스가 말끝을 흐렸다.
라이너스의 선택이 아이리스라면 냉정하게 말해서 잘못된 것이었다.
라이너스가 혈통으로 자신의 계승권을 주장하고 공작 위에 오르고 싶었다면, 그는 현재 자신을 지지하는 자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카테리안느의 혈통이기에 라이너스를 밀어 주는 자들이 귀족이 아닌 공작 부인을 받아들이겠는가?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리스에게서 예비 공작 부인이 가져야 할 반지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일리어스의 말은 그 정해진 답에 대하여 라이너스가 얼마나 어리석게 굴고 있는가를 증명했다.
에크하르트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멍청하군.”
일리어스도 차마 에크하르트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예비 공작 부인이 가져야 할 반지는 가문의 가보이며 대대로 물려 내려온 것이었다.
그것을 관리하는 것은 공작 부인의 권리이자 의무였다.
그러니 누가 공작 부인의 권한을 침범하고자 하지 않았다면, 일리어스가 말한 반지는 얌전히 카테리안느 가문의 보관실에 있어야만 했다.
일리어스는 현재 저택을 나와 있는 데다, 그가 어머니의 뜻을 거슬렀을 리도 없으니 결국 범인은 라이너스뿐인 셈이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정말이지 어리석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귀족 사회에서 계승 절차가 지켜졌느냐 아니냐는 아주 중요했다.
그들이 세워 둔 자격을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권력.
그게 귀족들이 평민들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가문의 가주가 인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가문을 가진다는 건 하극상이었다.
귀족들이 그런 현상을 반길 리 없었다.
황족 간에 황위 싸움으로 서로 죽고 죽일지라도 황제의 인정만큼은 받으려고 하는 까닭이기도 했다.
피지배층에 그들도 지배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절대 심어주지 않기 위해서.
그러니까 라이너스가 카테리안느 공작으로 귀족 사회에 제대로 녹아들려면, 그는 적어도 제 어머니의 인정만큼은 받아야 했다.
그런데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과도 이토록 반목하고 있으니, 정말이지 에크하르트의 말대로 멍청한 셈이었다.
“그럼 그대 말대로 아이리스 캐트샤는 좀 더 지켜보는 게 좋겠어.”
에크하르트가 마침내 일리어스의 말에 동조했다.
라이너스가 아이리스에게 마음을 두었다면, 현재 라이너스의 입장 상 그 마음 자체가 약점이었다.
상대가 약점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 약점을 굳이 없앨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아이리스 캐트샤가 사라지면 라이너스 카테리안느와 현 황제 간에 새로운 연결고리가 생길 테니, 그걸 찾아내는 것보다는 지금이 덜 번거롭겠지.”
에크하르트가 이어 말을 덧붙였다.
“보아하니 황실 2기사단에서 그대에게 정보를 조달해 주는 이도 있는 것 같고. 그이도 들키지 않는 게 좋겠지.”
“그렇습니다.”
멈칫한 일리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너스가 아이리스에게 반지를 가져다 준 것은 일리어스가 저택을 나온 뒤, 최근 일이다.
일리어스에게 심어 둔 그의 편이 없었다면 알아낼 수 있을 리 없는 정보였다.
괜히 대공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에크하르트는 짧은 대화로 그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대가 황실 2기사단에서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지?”
에크하르트가 확인하듯이 물었다.
그는 일리어스를 따르는 자가 한둘이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지금 같이 예민한 시기에 정보를 빼내려면 혼자 잘해서는 힘들었다.
에크하르트는 아마 기사단의 다수가 일리어스의 첩자를 가려 주는 방패가 되어 주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절반 조금 안됩니다.”
“그대, 수완이 좋군.”
에크하르트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일리어스가 황실 2기사단에서 손을 뗀 지도 꽤 지난 데다 상황도 그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도 절반 정도가 일리어스를 따른다는 건 그의 수완이 좋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오벨리아가 꾸준히 기사단에 신경을 써 준 덕이지요.”
“오벨리아가?”
“저는 상관없었지만, 제가 알렉산드로에게 기사단의 주도권을 넘겨 주려는 걸 상당히 미안하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기사단을 종종 찾아가서 제 이름으로 기사들을 챙겼더군요.”
덕분에 일리어스는 가끔 기사단을 찾아가도 뒤로 물러난 기사단장이라 하여 푸대접받는 일 따위 없었다.
기본적으로 일리어스의 능력이 좋아 기사들이 잘 따르기도 했으나, 오벨리아가 제 오빠를 잊지 않고 챙긴 것 또한 큰 몫을 했으리라.
“…그랬단 말이지.”
에크하르트가 기분이 묘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를 제 아래에 두고 부려먹을 때부터 알기는 했으나, 오벨리아는 정말이지 사람 다루는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대공비의 자리에서 오벨리아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겠다고.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일리어스의 질문에 에크하르트가 한발 늦게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그대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에크하르트는 해야 할 일에 밀려 방금 잠시 들었던 생각 따위 개의치 않고 잊어버렸다.
“그대를 따르는 기사들에게 한동안 아그네스 이멜리언의 편이 되어 달라고 할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