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진짜와 가짜(2)
일리어스의 대답은 싱거웠다.
“우리에게도 그러셨듯이… 라이너스도 아주 많이 사랑하셨으니까.”
그러나 그보다 적합한 대답은 없었다.
오벨리아가 할 말을 잃었다.
차라리 그들의 부모가 가문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서라면 자식도 버릴 수 있는 이들이었다면 나았을 것이다.
차라리 그들의 부모가 뛰어난 자식만 차별하여 예뻐하는 이들이었다면.
차라리 그들의 부모가 자식들이 제 뜻대로 안 된다고 쉬이 실망하고, 자식들을 적당히 사랑하는 이들이었다면.
그랬다면 카테리안느 공작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카테리안느 부부에게 뛰어난 첫째와 막내 사이에 낀 비교적 평범한 둘째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부부는 정말이지 세 아이를 너무나 똑같이, 너무나 많이 사랑했다.
그래서 그들은 라이너스에게 자꾸만 기회를 주었고, 자꾸만 믿어 주려 하였다.
결국, 카테리안느 공작은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고 믿었기에 죽은 것이었다.
“아무리 하려던 일을 망쳤다지만, 어떻게, 아버지를….”
아버지가 라이너스를 너무 사랑했다는 사실이 오벨리아의 목을 턱 메게 했다.
애초에 황태자와 카테리안느의 아들이 비밀리에 사병을 모으려는 걸 알아내고 심지어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지금의 선황제이자 당시의 황제가 알았더라면, 알렉산드로와 라이너스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하는 일을 막기만 하고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것은 방해임과 동시에 보호였다.
그러니 알았을 것이다.
사병을 모으려는 그들의 수작을 막은 게 카테리안느 공작이라는 사실을.
그래, 라이너스는 자신이 공작 자리에 오르는 데 가장 큰 방해물을 제거한 것이다.
그게 설령 아버지일지라도.
“어떻게…!”
오벨리아가 숨을 토해내듯 분노하여 소리쳤다.
알렉산드로를 너무 사랑해서 8년을 헌신한 오벨리아였다.
그래서 어떻게든 믿어주려던 아들로 인해 죽임을 당한 아버지가 너무나 가여웠다.
사랑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사람답게 사는 이라면, 그 어리석음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에 대한, 그 사랑을 누리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니까.
짐승도 저를 예뻐하는 자는 알지 않은가.
라이너스나 알렉산드로나 정말이지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들이었다.
“…나보고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했지.”
오벨리아의 모습에 일리어스도 목이 멘 듯,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라이너스가 공작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인물이 카테리안느 공작이었다면, 그 다음 가는 인물은 일리어스였다.
아버지를 죽인 라이너스가 질투하던 제 형 또한 못 죽일 리 없었다.
그런데 일리어스는 제거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거나 누군가 돕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라이너스를 믿고 싶으셨지만, 그 녀석이 할 짓들에 대한 방비도 해 두셨던 모양이야.”
일리어스 또한 눈물을 참느라 아파져 오는 목을 가다듬고 애써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라이너스가 공작가에 무슨 짓을 하기 전에, 이미 만들어 두셨던 탈출 경로를 알려 주시더라.”
카테리안느 부인은 저택에 남기를 선택했다.
누군가 하나는 라이너스에게서 공작가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했으나, 일리어스는 다른 이유가 있음을 알았다.
한시라도 바삐 피신해야 하는 첫째 아들에게 카테리안느 부인은 짐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네가 살아남아야 오벨리아도 챙길 수 있다는 말을 듣지만 않았더라면, 일리어스는 절대 어머니를 홀로 두고 저택을 탈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벨리아, 너를 도와줄 사람들도 미리 황궁에 심어 두셨고.”
일리어스의 말에 오벨리아의 몸이 크게 흠칫했다.
그녀는 문득 폐궁이 불타던 날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나… 마리아가 폐궁에 숨어든 덕에 살아남았어. 그때는 마리아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지만 어떻게 홀로 숨어들어서 몇 시간 동안 들키지 않았나 했는데….”
그제야 얼추 아귀가 맞았다.
황궁 기사 중에 카테리안느 공작 부부가 심어 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마리아를 비밀리에 도왔기에, 마리아가 오벨리아에게 당도할 수 있었다.
“아… 아….”
결국 오벨리아를 살린 것은 마리아와 그녀의 부모님이었다.
일리어스를 만났을 때부터 쏟아내고 싶던 눈물이 오벨리아의 뺨을 타고 기어코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작은 주먹이 제 가슴을 마구 쳐댔다.
카테리안느 부부는 둘째 아들을 사랑했으나, 첫째 아들과 막내딸도 지켜야만 했다.
사랑하는 둘째 아들이 혹시나 극악무도한 짓을 할까 싶으면서도 차마 첫째와 막내의 안위를 두고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라이너스가 일리어스에게 무슨 짓을 하여 카테리안느가 흔들리게 되면, 오벨리아의 뒷배가 휘청거리는 셈이다.
그러면 그녀의 황궁 생활은 자연스레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일리어스를 피신시킬 탈출구도 마련해 놓고, 카테리안느에서 신경을 써 주지 못해도 황궁에서 오벨리아가 따로 부릴 수 있는 사람들도 만들어 둔 것이다.
비록 카테리안느 부부가 신은 아니어서, 알렉산드로에게 정부가 있고 그래서 오벨리아를 죽이려고 한 것과 라이너스가 카테리안느 공작과 일리어스의 목숨까지 노릴 것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들은 정말이지, 세 아이 모두를 사랑했다.
두 아이가 한 아이를 미워하지 않길 바랐기에 사실대로 모두 말할 수도 없었으나, 한 아이가 두 아이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부단히 애쓸 만큼.
너무 많이.
라이너스가 그런 사람임을 알면서도 왜 그냥 두었느냐고 감히 원망할 수도 없었다.
카테리안느 부부는 사랑하는 자식들 사이에서 누구도 포기하지 못했을 뿐이었고, 그래서 모두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었다.
오벨리아는 마차 안에서 하염없이 무너졌다.
오늘따라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었다.
***
오벨리아의 울음은 보는 이들이 고통스러울 만큼 아팠다.
그리하여 다들 말리지 못했다.
그 결과 그녀는 열이 올라 버렸다.
허약한 몸이 펑펑 눈물을 쏟아내고 나니 또 힘이 부친 탓이었다.
그래서 오벨리아에게는 강제로 휴식이 주어졌다.
일리어스와 에드먼드가 적극적으로 나서 휴식을 주장했고 에크하르트 또한 딱히 별다른 저지를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얌전히 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 남자만 남자, 일리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힐켄테데의 대공 전하께서 왜 제 동생과 함께 계신 것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에크하르트가 눈매를 가늘게 떴다.
물론, 오빠로서는 제 여동생이 낯선 남자와 함께 있으니 걱정될 만도 했다.
그러나 대답하기 전에, 에크하르트는 일리어스에게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내 질문에 대답하면 나도 알려 주도록 하지.”
에크하르트가 다리를 꼬며 오만한 태도로 쇼파에 기댔다.
그는 전형적인 북부인의 체구를 가진 데다, 그중에서도 기골이 장대한 편이라 그 행동만으로도 위압감이 넘쳐 보였다.
일리어스 또한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하긴, 에크하르트야 어린 날부터 전장에 서온 사람이었으니 차이가 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말씀하십시오.”
그러나 일리어스는 전혀 기죽지 않은 채로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기 카테리안느 공작으로 자란 그였다.
일리어스는 온화했으나 담대했다.
다만 쉽게 고개를 끄덕인 것은 에크하르트의 태도가 강경하여 어차피 재차 질문해도 답을 줄 것 같지 않으니, 제가 먼저 대답을 내놓을 생각이었을 뿐이다.
“아이리스 캐트샤가 힐켄테데 성에 침입하여 오벨리아를 해하려고 했다. 어째서인지 알고 있나?”
물론, 에크하르트의 말은 거짓이었다.
아이리스가 해치려던 것은 커티스였고, 그마저도 힐켄테데의 이들에게 들켜 커티스의 입막음을 하기 위함이었다.
커티스가 해를 끼치려던 것은 에크하르트였으니 결국 오벨리아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가 그런 거짓말을 한 이유가 있었다.
“이게 뭔지 알겠지.”
에크하르트가 일리어스의 앞에 황실 제 2기사단의 배지를 내려놓았다.
뱃지에 둘린 은으로 된 테두리는 부기사단장을 의미했다.
아이리스가 커티스와의 접촉 중 힐켄테데의 기사들에게 들키자, 급하게 몸을 피하느라 떨어트린 것이었다.
“현재 황실 2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 누구인지쯤은, 마냥 손 놓고 있지 않았다면 알 테고.”
에크하르트가 일리어스를 몰아붙였다.
황실 기사단의 배지는 황실에서 특수 제작되는 것인 데다가 이를 소유하는 기사 특유의 고유 번호가 새겨져 있었다.
그 번호는 오직 본인과 각 기사단의 기사단장밖에 모르는 것이었으니 사실상 복제도 불가능했다.
즉, 그가 아이리스를 만난 적이 없다면 이 배지를 손에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아이리스가 배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그녀가 상당히 다급한 상황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수도는 론체스터 제국에서 치안이 가장 발전한 곳이었고, 황성이나 귀족들이 주로 다니는 거리는 지나치게 평온하여 기사들이 검을 뽑을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황실의 부기사단장씩이나 되는 자가 겪을 다급한 상황이 뭐가 있겠는가.
예컨대, 어딘가에 침입했다가 걸리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 모든 것이 겹쳐 에크하르트의 주장은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
일리어스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 어떠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아이리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녀가 일리어스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의 침묵은 간혹 긍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법이었다.
티 나지 않게 에크하르트의 눈매 끝이 날카로워졌다.
“아이리스 캐트샤가 현 황제의 사람이라면 반드시 제거해야만 해. 오벨리아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증인이 될 테니까.”
에크하르트가 이어서 일리어스를 몰아붙이려 추궁하듯 말했다.
그의 단호한 말투가 지금 당장이라도 제 수하들을 시켜 아이리스를 죽일 것만 같았다.
“지금 캐트샤 경에게 손대시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평정을 잃지 않던 일리어스가 순간 작게나마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