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훔쳐간 자리(10)
라이너스와 그 기사들은 화마에서 살아남았다.
그런데 평범한 고용인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조리 죽었다더라.
기사가 한 말은 누가 들어도 이상했다.
어떻게 특정 인물들만 살아남고, 평범한 이들은 전부 다 죽었단 말인가!
꼭, 골라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가 봐.”
기사가 말을 모두 전하자, 에크하르트가 기사를 내보냈다.
그동안 오벨리아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에크하르트, 라이너스 오빠가……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 걸까?”
오벨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기사들은 라이너스에게 쓸모가 있어서 살아남았으며, 고용인들은 입막음을 위해 모조리 살해당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오벨리아는 자신이 알던 둘째 오빠의 모습이 전부 거짓이거나, 혹은 아예 지금의 라이너스와 이전의 라이너스가 전혀 다른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린 날에는 오벨리아가 열감기를 앓던 날 내내 그 옆에서 물수건을 갈아 주며 간호하던 그 다정한 오빠가, 고용인들의 가족하고도 허물없이 지내던 그 사람 좋은 오빠가 이렇게 변한단 말인가!
그것도 아버지를 죽이고! 평생을 봐 온 사람들까지 죽이는 이런 잔인한 짓을 하는 사람으로!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도 알았다.
오벨리아가 충격에 빠졌기에 이렇게 말하기는 했으나, 그녀의 추측은 아마도 옳을 터였다.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면…… 황제의 인가와 함께 가주의 인장 반지를 새롭게 만들 수 있지.”
하지만 역시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의 말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녀는 금세 이 사건의 본질을 짚어냈다.
“어머니가 숨겨 둔 가주의 인장 반지를 결국 못 찾은 거야.”
공작 부인은 카테리안느 저택 내에서 철저한 감시를 당하고 있었고 이미 몇 차례 몸수색까지도 겪었기 때문에, 가주의 인장 반지를 비밀스러운 곳에 숨겨 두었다.
그래서 공작 부인이 아그네스의 파티장에 가기 위해 외출할 때, 가주의 인장 반지는 카테리안느 저택에 남게 되었다.
“내가 어머니를 데려왔으니 초조했겠지. 가주의 인장 반지는 행방이 묘연하고, 공작의 부재 시 그 대리가 되는 어머니께 작위를 승계 받는 것 또한 불가능해졌으니까.”
오벨리아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추측을 말하는 동안, 에크하르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 상황이 절대 그녀에게 유쾌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증거를 인멸하는 수법이…….”
순간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를 쳐다봤다.
그녀가 차마 그의 앞에서 말을 내뱉지 못하겠는 양, 입술을 꾹 다물었다.
“힐켄테데에 행했던 짓과 비슷하지.”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는 차마 하지 못한 뒷말을 이었다.
화마와 그 장소에 있는 모든 인물의 죽음.
알렉산드로의 수법이었다.
“어쩌면 내일, 새로운 카테리안느 공작의 임명식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에크하르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오늘의 참상이 라이너스와 알렉산드로의 합작이었다면, 그들 사이에서 라이너스를 카테리안느 공작으로 삼는 일은 이미 합의된 일일 터였다.
오벨리아 또한 침음을 삼켰다.
어머니를 구했음에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날이었다.
***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예상대로 카테리안느 저택이 전소한 바로 다음 날, 알렉산드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라이너스를 카테리안느 공작으로 임명한다고 밝혔다.
그렇게 단 하루 만에 준비된 임명식에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힐켄테데 대공 부부로서 초대받았다.
“오벨리아.”
그리고 임명식이 있을 왕의 알현실로 가는 길.
에크하르트와 팔짱을 낀 채 걸어가던 오벨리아는 황궁의 복도에서 라이너스를 만났다.
라이너스가 먼저 아는 척을 할 줄은 몰라서,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라이너스가 가까워지자 자연스럽게 오벨리아의 시선이 그의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을 향했다.
그곳에는 사라진 카테리안느 가주의 반지 대신, 새로운 인장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아, 기어코…… 그 자리를 갖고자, 우리를 돌봐주었던 그 많은 이들을 죽였구나.’
오벨리아의 안에 절망과 분노가 뒤섞였다.
정말로, 라이너스는 더 이상 그녀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라이너스가 오벨리아에게 속닥거렸다.
에크하르트가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오벨리아와 라이너스의 사이에 팔을 넣어 남매의 사이를 벌려놓았다.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너라니…… 아무리 대공 전하시지만, 카테리안느 공작인 제게 이러셔도 되겠습니까.”
날 선 에크하르트의 반응에 라이너스가 피식 웃었다.
카테리안느 공작의 인장 반지를 낀 라이너스는 기묘할 정도로 당당했다.
“좋아, 해.”
“오벨리아.”
그리하여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크하르트가 만류하듯이 그녀의 팔을 가볍게 붙잡았다.
“괜찮아, 아무리 카테리안느 공작이라도 힐켄테데의 대공비를 해칠 수는 없으니까.”
“역시, 똑똑한 내 동생.”
라이너스가 또다시 픽 웃으며 오벨리아의 말에 긍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는 불안함에 쉬이 오벨리아를 놓아 주지 못했다.
“괜찮아, 다녀올게.”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의 손등을 도닥였다.
그녀의 팔을 놓는 그의 손에 미련이 가득했다.
오벨리아는 그것을 모른 채, 라이너스와 자리를 옮겼다.
***
황궁의 외궁은 특별히 출입을 금지 당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귀족이든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에, 곳곳에 휴게실이 존재했다.
오벨리아와 라이너스가 들어온 곳은 그런 휴게실 중에 하나였다.
“말해.”
오벨리아는 휴게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가길 종용했다.
라이너스와 오래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우리 동생, 안 본 사이에 매우 까칠해졌네.”
오벨리아의 날 선 반응에도 라이너스는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는 카테리안느 공작의 인장 반지를 제 손에 끼웠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마침내 완벽한 승자라도 된 양 굴고 있었다.
“알렉산드로가 날 죽일 걸 알면서도 방관하고, 제 욕심에 아버지까지 죽인 패륜아한테 내가 곱게 대해야 할 이유라도 있을까?”
그럴수록 오벨리아의 목소리는 더더욱 싸늘해졌다.
패륜아.
그 단어에 마침내 능글맞게 굴던 라이너스의 표정이 굳었다.
“말조심해, 오벨리아. 아버지는 마차 사고로 돌아가셨어.”
“그 마차 사고를 누가 만들어냈는지 내가 빤히 알고 있는데,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 모양이야.”
“증거라도 있어? 괜한 사람 모함하는 거 아냐.”
라이너스는 역시 자신은 아버지의 죽음에 전혀 관련 없다는 것처럼 발뺌했다.
오벨리아의 얼굴이 점점 혐오와 분노로 물들었다.
“어쩌다가…… 오빠가 이렇게까지 망가졌을까.”
그리고 동시에 아주 약간의 동정심도 들었다.
인간이 어떻게 해야 저렇게 최악을 찍을지, 오벨리아로서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내 동생이 아까부터 너무 말을 막 하는 거 같은데?”
라이너스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오벨리아에게 다가섰다.
자신이 왜 동정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망가지다니. 난 승리자야. 드디어 내가 이 자리에 올랐다고.”
“다 잃고 그 자리 하나 얻어서 즐거워?”
오벨리아가 진심으로 물었다.
그리고 순간 라이너스의 말문은 턱 막혀 버렸다.
그를 키워 준 부모, 그와 함께 자란 혈육, 그가 먹고 자고 뛰놀며 누볐던 저택, 그를 돌봐주었던 모든 사람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라이너스의 손에 남은 것은 오로지 카테리안느 공작 작위뿐이었다.
잠시 침묵했던 라이너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그럼, 당연히 행복하지. 내가 이 자리를 얼마나 가지고 싶었는데!”
그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가지고 싶어했던 공작 작위가 아니던가.
그는 행복했다.
행복해야만 했다.
“……그렇다니 더는 할 말이 없네.”
오벨리아는 그 모습을 고스란히 두 눈에 담았다.
이게 그녀가 라이너스를 오빠로서 보는 마지막이었다.
앞으로는 라이너스는 절대 오벨리아의 오빠가 되지 못할 테니까.
“그 행복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오벨리아가 망설임 없이 라이너스에게서 돌아섰다.
사람이 무언가에 미쳐 버리면 그로 인해 자신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는 법이었다.
“잠깐, 기다려.”
라이너스가 오벨리아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 손길에 혹시라도 제 여동생에게 해를 입힐까, 늘 조심스럽던 오빠는 더 이상 없었다.
탁.
오벨리아가 저를 잡은 손을 거칠게 쳐냈다.
세게 쥐어 잡힌 손목이 욱신거렸다.
“너, 일리어스가 어디 있는지 알지?”
그러건 말건 라이너스는 훌쩍 오벨리아에게로 다가섰다.
그의 그림자가 그녀에게 드리웠다.
시한부가 된 후 더욱 마른 오벨리아와 대조적인 라이너스의 체구는 의도한 듯 위협적이었다.
그의 두 눈동자가 섬뜩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그거 때문에 나랑 이야기하자고 했구나.”
그러나 오벨리아는 그런 라이너스의 모습이 두렵기는커녕,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동생이 죽을 뻔한 것을 방관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조장한 주제에 그 동생 앞에서 당당하더라니, 기껏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 모양이었다.
애초에 라이너스가 학살을 자행한 순간부터 그에 대한 기대는 모두 접어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벨리아는 다시금 입 안이 써졌다.
“넌 알 거야. 그렇지? 일리어스는 너를 예뻐했잖아. 네가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라이너스가 오벨리아의 양어깨를 두 손으로 덥석 잡았다.
그가 고개를 느릿하게 옆으로 기울이며 미소했다.
“우리 예쁜 동생, 사실 일리어스는 가짜잖아. 네 진짜 오빠는 나뿐이야. 오빠 말 잘 들어야지.”
감히 누가 누굴 두고 가짜라고 폄하하며, 감히 누가 누구에게 진짜라는 주장하는 것인가.
진짜와 가짜.
어깨에 가해지는 힘에 의한 통증.
그 순간 오벨리아의 안에서 불쑥 화가 치밀었다.
쫘악.
그리고 요란한 소리가 휴게실 안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