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훔쳐간 자리(11)
라이너스의 고개가 사정없이 돌아갔다.
오벨리아의 손바닥이 발갛게 물들었다.
물론, 그만큼 그의 뺨은 더욱 홧홧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덜컹!
“오벨리아, 괜찮나……?!”
휴게실을 채운 마찰음 탓인지 에크하르트가 놀라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뒤돌아보지 않고 맹렬하게 라이너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벨리아에게 갑자기 얻어맞은 탓에 어안이 벙벙해진 라이너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홱 그녀를 쳐다봤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부에게도 이런 식으로 맞아 본 적 없던 라이너스였다.
그런데 자기보다 어린 여동생에게 따귀를 얻어맞았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라이너스가 쌍심지를 켜고 오벨리아의 양어깨를 잡아챘다.
“너! 이게 무슨 짓……!”
“너 같은 게!”
그러나 라이너스의 화보다 오벨리아의 분노가 더 컸다.
“너 같은 게 내 오빠라고 하지 마!”
오벨리아는 견딜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녀는 라이너스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둘째 오빠를 만나면 어떤 감정이 들지 내심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라고 할지라도 오벨리아에게는 라이너스로 인한 추억이 남아 있어서, 혹시나 그를 이해하고 싶어질까 봐.
그게 얼마나 두려웠던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두려움이 허상이었음을 깨달았다.
오벨리아가 라이너스를 오빠로 생각하든 아니든 그런 것은 전혀 상관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부모님을, 일리어스를, 카테리안느의 모든 사람을 그리고 오벨리아를 먼저 버린 것은 라이너스였다.
버림받은 자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버렸다가 제멋대로 주울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러니 라이너스는 오벨리아의 오빠가 아니었다.
“진짜든, 가짜든, 넌 될 수 없어.”
진짜와 가짜?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주제에 어딜 그런 것을 논한단 말인가!
오벨리아가 제 어깨를 붙잡은 라이너스의 두 손을 거칠게 떨쳐냈다.
그런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숱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도 더 파괴하지 못해 안달이 난 존재를 인간은 괴물이라고 불러.”
라이너스의 두 눈을 보는 순간 오벨리아는 깨달았다.
라이너스는 카테리안느 공작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일리어스까지 죽일 작정이었다.
아버지를 죽이고, 동생이 사지에 빠져도 외면하고, 오랜 세월을 알고 지낸 이들까지 모두 도륙 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아직도 피를 더 봐야만 만족하겠다는 의미였다.
“괴물 따위가, 내 오빠일 리 없잖아?”
그런 건 사람이 아니었다.
정치에 있어서 후환을 남겨 두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것은 오벨리아도 알았다.
그러나 정치를 하는 것과 모든 일을 피와 죽음으로 해결하는 것은 달랐다.
“내가 괴물이라고……? 그럼 너는……!”
라이너스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오벨리아의 어깨를 다시 낚아채려 했다.
“아악!”
그러나 어느덧 다가왔는지 라이너스의 팔을 빠르게 잡아채 꺾어 버린 에크하르트 때문에 라이너스는 오벨리아에게 털끝 하나도 닿을 수 없었다.
“넌 앞으로 똑같은 선택지가 놓여도 또 쉬운 길로 가려고 하겠지.”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가 만들어 놓은 안전한 거리 안에서 말을 이었다.
에크하르트가 막고 있는 한 라이너스는 제게 손 댈 수 없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에크하르트를 믿고 있었다.
“그게 다른 이들의 불행이든, 죽음이든.”
라이너스가 쥐었던 어깨가 욱신거렸다.
단언컨대, 오벨리아의 둘째 오빠는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굴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난 너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거야.”
“하, 죽어가는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에크하르트에게 붙잡힌 채로도 라이너스는 허세를 부리며 오벨리아를 비웃었다.
역시 라이너스는 알렉산드로가 오벨리아에게 바실리스크의 독을 건넨 것을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야 새하얘진 그녀의 머리칼을 보고 독을 먹어 죽어간다는 사실을 어떻게 눈치챘겠는가.
“큭!”
오벨리아는 라이너스의 비웃음 따위 알 바 아니었으나, 에크하르트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미간을 찡그린 에크하르트가 라이너스의 무릎 뒤쪽을 발로 차 라이너스를 무릎 꿇게 만들었다.
“뻔뻔하기 짝이 없어. 오벨리아가 죽어간다는 걸 알면서도 현 황제의 편에 붙은 놈이 진짜 오빠니 뭐니, 그딴 말을 하고 있는 건가?”
기감이 발달한 에크하르트는 휴게실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사실 라이너스가 헛소리를 할 때부터 오벨리아에게서 떼어놓고 싶었던 것을 참았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대화를 방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소리가 나자 들어와 보지 않을 수 없었지만.
라이너스가 으득, 이를 갈았다.
무력하게 당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치가 떨렸다.
그렇지만 라이너스는 이제 막 카테리안느 공작이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소리를 쳐서 사람을 부르면 에크하르트에게서는 벗어나겠지만, 벌써부터 카테리안느가 힐켄테데에 지고 있음을 알리는 것밖에 안 됐다.
그렇지 않아도 카테리안느가 최근 들어 잃은 것들이 많아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제 카테리안느도 끝이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그러니 이런 모습을 남들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내가 망하면!”
그렇지만 마냥 참고 있자니 속이 터졌다.
라이너스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나 혼자 망할 거 같아?”
라이너스의 목소리에 빈정거림과 자신만만함이 깃들었다.
그는 오벨리아가 카테리안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카테리안느도 그럼 끝이야! 알아?!”
그래서 라이너스는 기꺼이 카테리안느를 인질로 오벨리아를 협박했다.
“알아.”
그렇지만 라이너스가 오벨리아를 전부 아는 것은 아니었다.
“……뭐?”
의외로 담담한 오벨리아의 대답에 당황한 라이너스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가 저런 식으로 태연하게 나올 줄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난 카테리안느를 사랑해.”
카테리안느는 오벨리아의 근간이요, 오벨리아의 자부심 중 하나였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지독히도 사랑했고 지독히도 그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테리안느의 존속이 너 따위로 유지되어야만 한다면, 나는 차라리 카테리안느일지라도 파멸시키겠어.”
그러나 라이너스를 카테리안느 공작 자리에 둘 수는 없었다.
그와 같은 존재가 가지기에는 그것이 너무나 커다란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괴물이 권력을 가지면, 인간들이 불행해지는 법이거든.”
특히나 그런 상황이 오면 힘없는 자들이 가장 먼저 불행에 내쳐질 터였다.
라이너스와 알렉산드로에 의해 힘없는 카테리안느의 고용인들이 모두 그 목숨을 잃었듯이.
오벨리아는 이 나라의 권력을 누려 온 사람으로서, 이 나라의 약자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라이너스를 방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네가 망가트릴 카테리안느는 내가 사랑한 카테리안느가 아니야.”
오벨리아가 아는 카테리안느의 힘은 약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벨리아의 부모가 그녀에게 그렇게 가르쳤고, 그것은 오벨리아의 피와 살이 되었다.
그녀를 이루는 카테리안느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카테리안느가 오벨리아의 자부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생각은 안 해?”
두 입술을 꾹 다물었던 라이너스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발악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오벨리아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적대하는 모습을 보이니, 라이너스는 은연중 무서움이 일었다.
“카테리안느가 무너지면 어머니도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라이너스는 어머니를 들먹였다.
평생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으로 살아온 제 어머니를.
“넌 어쩌면 우리와 가족이 아니었던 걸지도 모르겠어.”
그러나 오벨리아는 라이너스의 말에 비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무슨 뜻이야?”
“넌 나에 대해서도, 어머니에 대해서도 모르잖아.”
같은 지붕 아래 같은 것을 먹고 산다고 다 가족은 아니었다.
오벨리아는 오늘 그것을 깨달았다.
만약 제 딸이 카테리안느를 너무 사랑하여 그것이 망가지며 많은 존재를 파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두겠다고 한다면, 직접 카테리안느를 파괴할 사람.
그게 오벨리아가 아는 그녀의 어머니였다.
오벨리아와 그녀의 어머니가 갖는 자부심은 카테리안느라는 이름이 가져다주는 것들이 아니라, 카테리안느가 지켜 온 것들에 있었으므로.
“가자, 에크하르트.”
그러나 그것을 라이너스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는 오벨리아가 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
오벨리아의 말이 떨어지자, 에크하르트가 손쉽게 라이너스를 놓아 주었다.
물론, 라이너스를 앞쪽으로 내팽개쳐 넘어지게 한 것은 의도한 바였다.
“윽!”
바닥에 이마를 찧은 라이너스가 신음했다.
그러나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휴게실을 나와 버렸다.
“아아아아아악!”
닫힌 휴게실 문 틈새로 분노에 찬 라이너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어찌됐든, 결국 현재 카테리안느에 남아 있는 것은 라이너스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에게도 라이너스가 카테리안느 공작 작위를 받는 것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정계의 주요 귀족들이 나열해 있는 알현실의 한가운데에, 라이너스는 알렉산드로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라이너스 카테리안느를 론체스터 제국의 카테리안느 공작으로 임명한다.”
알렉산드로가 황제의 보검으로 라이너스의 양어깨를 한 번씩 가볍게 건드렸다.
임명식은 그것으로 아주 손쉽게 끝이 났다.
“폐하, 카테리안느 공작으로서 처음으로 주청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라이너스는 거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오벨리아를 한 번 노려본 라이너스가 말을 이었다.
“아그네스 이멜리언을 황비의 자리에 올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