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아그네스 카테리안느(3)
알렉산드로의 표정이 그 순간 매우 이상해졌다.
라이너스가 말을 꺼냈을 당시, 대책 없이 던진 말에 난감해졌다고 속으로 짜증을 삼켰던 알렉산드로였다.
그렇게 생각했던 발언을 선황제가 말하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신성 제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이제 아그네스를 황후로 뽑으면 아무 문제가 없게 되는데 굳이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아그네스 이멜리언을 굳이 반드시 황후로 두어야 할 이유가 있느냐?”
선황제가 오랜만에 분노에 차지 않은 얼굴로 알렉산드로를 내려다봤다.
“잘 생각해 보아라, 알렉산드로. 네가 오벨리아를 거슬려 했던 이유가 무엇이더냐.”
알렉산드로의 표정은 더욱 더 묘해졌다.
제 아버지가 이렇게 차분하게 자신을 설득하려는 것처럼 구는 모습이 매우 낯설었다.
“카테리안느가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선황제의 말에 알렉산드로가 흠칫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지금껏 아그네스가 스스로의 힘을 가지려는 움직임을 보이려 할 때마다 본능적으로 불쾌했었다.
알렉산드로는 그것을 그제야 인지했다.
“오벨리아에게 카테리안느라는 힘이 있기에 너를 이 자리까지 올려 두었지만, 동시에 네가 황태자가 되고, 황제가 되고 나니 알겠지.”
선황제는 무언가 깨달은 듯한 제 아들의 표정을 보고 그 속내를 쉬이 짐작한 듯 말을 이었다.
“너무 큰 권력을 가진 귀족 가문은 결국 황제에게 얼마나 걸림돌인지.”
그 귀족 가문이 황제를 지지하든, 오벨리아처럼 알렉산드로를 사랑하든 그런 것은 전혀 상관없었다.
세상 하늘 아래 태양은 하나뿐이었다.
귀족들이 누리는 권력은 황제가 그 작위를 주었기에 가능한 게 아니던가.
그러니 결국 권력은 오로지 황제에게로 귀결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카테리안느나 힐켄테데 같은 가문이 있는 이상 그것은 이상론에 불가했다.
그러니 거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그네스 이멜리언이 카테리안느가 되어, 카테리안느에서 다시 황후를 배출한다고 생각해 봐라.”
선황제의 침착하고 언뜻 들어 부드럽기까지 한 그 목소리가 알렉산드로의 귀에 콕콕 들어박혔다.
“지금이야 라이너스 카테리안느가 뭣도 모르고 제 손으로 카테리안느의 발등을 찍어 그 세가 줄었다지만.”
전대의 인정 없이 가주의 자리에 오른 공작.
그 가문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 저택의 전소.
그리고 꼴랑 하나 남은 카테리안느의 피.
그 모든 것이 지금의 카테리안느는 이전의 카테리안느처럼 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선황제의 말대로 라이너스가 자기 욕심에 카테리안느를 망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 다시 카테리안느에서 황후가 배출되었을 때, 이전의 세를 회복하지 말란 법이 있느냐?”
선황제의 말에 긍정하듯이, 알렉산드로는 처음으로 어떤 거부감 없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선황제의 말이 옳았다.
지금이야 카테리안느가 주춤하고 있다지만, 그 가문이 가진 모든 것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카테리안느는 여전히 부유했고 가진 게 많았다.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그것들을 토대로 언젠가는 이전의 세를 회복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카테리안느의 이름을 달 아그네스를 황후로 만든다?
말 그대로 범의 등에 날개까지 달아 주는 셈이었다.
“하나…… 폐하, 아그네스는 제 아이를 가진 데다, 아무리 카테리안느가 지금은 잠시 주춤한다지만 그 이름을 달고 겨우 황비의 자리에 올려 주는 것에 만족하겠습니까?”
카테리안느가 이전보다 약해졌어도 카테리안느는 카테리안느였다.
카테리안느가 황후 간택에 참여하겠다고 하니 다른 귀족들은 모조리 포기해 버리는 것을 보라.
그 위상이 한풀 꺾여 봤자 여전히 뻣뻣하게 치솟아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런데 애초에 있지도 않던 황비의 자리를 주는 것으로 라이너스가 만족할 것 같진 않았다.
“신성 제국이 뭐라고 하든 말든, 황비의 아이 또한 네 아이로 인정하면 될 것 아니냐. 애초에 황비의 자리는 없던 것을 만드는 것이다. 그 자리를 어떻게 취급할지, 그 자리에 어떤 권한을 부여할지는 어차피 우리의 몫이다.”
“……지금 신성 제국을 무시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알렉산드로가 놀라 물었다.
선황제가 갑자기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한 터였다.
“황후의 자리를 다른 가문에 주어 그 세를 키워.”
선황제는 아이에게 일러주듯이 조곤조곤 방법을 말해 주었다.
“그 가문과 카테리안느를 경쟁시키면서 네 손에 둘 다 쥐어라. 그리고 힐켄테데를 처리하면, 이 제국에서 감히 황제의 권위에 도전할 이가 누가 있겠느냐.”
단언컨대 알렉산드로가 진짜로 아이였던 시절에도 없었던 일이었다.
“제국을 온전히 발아래 두면, 신성 제국이 감히 우리를 어찌할 수 있을 성싶으냐.”
선황제의 두 눈에 어떤 욕망이 번뜩였다.
알렉산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말았다.
아, 그 순간 알렉산드로는 깨달았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저와 제 아비는 닮아 있음을.
선황제도 실은 바랐던 것이다.
힐켄테데가, 카테리안느가, 신성 제국이 감히 그들에게 뭐라 하지 못하는, 론체스터 황제만의 절대 권력이 완성되는 그 날을.
그리하여 선황제는 지금 그 기회를 보았고 알렉산드로에게 잡길 종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설마, 이렇게 좋은 기회를 아그네스 이멜리언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허사로 만들 참은 아니겠지?”
알렉산드로가 깨달음을 곱씹느라 대답이 없자, 선황제가 언제 부드럽게 말했냐는 듯 날 선 어조로 제 아들을 추궁했다.
그제야 알렉산드로의 주의가 이 대화로 돌아왔다.
“……그건.”
알렉산드로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선황제의 제안이 매우 끌렸다.
그러나 단번에 대답하면 어쩐지 자신이 쓰레기가 된 것 같지 않은가.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를 사랑했다.
이미 황후의 자리를 주기로 약속했다.
인제 와서 아그네스가 황비의 자리에 만족할 것 같진 않았다.
심지어, 아그네스는 그런 쪽으로 욕심이 많은 편이 아니던가.
“……멍청한 놈!”
알렉산드로의 망설임에 언제 아버지처럼 굴었느냐는 듯이 선황제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그네스 이멜리언이 카테리안느의 권력을 가지게 돼도, 지금처럼 네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할 것 같으냐!”
알렉산드로가 멈칫했다.
그의 안에 의심이 무럭무럭 싹이 텄다.
“환경이 변하면 인간도 변하는 법이다. 네놈부터가 그러지 않았느냐!”
선황제가 떠올리라는 듯 알렉산드로를 채근했다.
아무것도 없는 7황자였던 알렉산드로는 처음에 오벨리아가 주는 것들만으로도 감격했었다.
그러나 그는 종래에 오벨리아를 완전히 밀어내고 여기까지 왔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를 믿을 수가 없어졌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도 변하지 말란 법이 없었으니까.
“……폐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알렉산드로가 황후 간택에 후보 3명을 추천하라고 했다고?”
황궁에서 하는 회의에 다녀온 에크하르트가 전한 말에 오벨리아가 되물었다.
오벨리아가 에스더 백작에게 미리 언질해 둔 덕에, 에스더 백작을 구심점으로 몇몇 가신들과 원로들은 일부러 아그네스의 입적을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그네스가 황후가 되어야만 휘청이는 카테리안느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다녔다.
그리하여 아그네스의 입적 절차는 수월하게 흘러갔고, 이제 얼마 뒷면 그녀는 카테리안느가 될 터였다.
아그네스 카테리안느.
그 성하나면 황후 자리에 오르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닌데 굳이 왜 간택 후보로 3명을 부르라는 선택을 했는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상한 일이다. 만약 아그네스 이멜리언을 정당한 황후 간택 경쟁의 승자인 척 포장하고 싶었다면, 황제파의 귀족들을 추천 목록 속에 넣었을 거다. 그런데…….”
에크하르트가 황실에서 빼내 온 서류를 오벨리아에게 건넸다.
황후 간택 후보에 오른 이름들은 전부 중립파의 여식들이었다.
“이건 마치…….”
그 이름들을 보던 오벨리아가 놀랐다.
“꼭, 아그네스한테 황후 자리를 주지 않으려는 것만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황후 간택 후보에 오른 영애들은 모두 춤부터 음악, 자수 등 다양한 재주를 익힌 자들이었다.
아그네스더러 이들에게서 살아남아 황후가 되라니.
차라리 대놓고 황후를 시키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치졸한 일이 아닌가.
“무언가 이상해서 내 수하들을 여기저기에 보내 봤는데- 알렉산드로가 이 서류에 이름을 올린 중립파 귀족들을 만나러 다니더군.”
“……설마.”
오벨리아가 한 가지 가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아그네스를 황후의 자리에 올리지 않고, 다른 가문 영애를 황후의 자리에 올려 그들의 충성을 받아낼 셈인건가?”
오벨리아는 자신이 내뱉은 말의 실현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알렉산드로가 아그네스를 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알렉산드로가 인제 와서 자신의 아이를 포기할 리 없었다.
“아이를 황태자의 자리에 올리려면 그 부모가 정실이어야 할 텐데…….”
“……그래서 말인데, 혹시 선황제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것이 있나? 어제 알렉산드로가 선황제를 만나고 왔다더군. 그 이후에 중립파 귀족들을 찾기 시작한 거고.”
선황제.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오벨리아는 라이너스가 지난번 임명식 때 주장했던 말을 떠올렸다.
“……설마, 황비 자리를 진짜로 만들려는 건가?”
오벨리아가 아는 선황제라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선황제는 권력을 완벽히 잡을 수 있을 이 좋은 기회를 날려 먹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그네스에게는 황비 자리를 주고, 다른 이에게 황후 자리를 줘서 두 가문을 서로 경쟁하게 만들려는 거였어. 그럴수록 황권은 절대 권력이 되어갈 테니까.”
점차 말을 내뱉을수록 오벨리아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하게 되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게 된 그녀의 두 눈이 번뜩였다.
선황제든, 알렉산드로든, 절대로 그 뜻을 이룰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