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65화 (65/136)

65화. 아그네스 카테리안느(4)

카테리안느 저택이 완전히 전소된 일은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의 귀에도 들어갔다.

하긴, 수도 한복판의 대저택이 불타 버렸는데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비아, 라이너스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니?”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오벨리아를 불러 사건의 진상을 물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모든 사실을 어머니에게 전했다.

라이너스가 오래도록 카테리안느를 모셔 온 고용인들에게 어떻게 했는지까지 전부.

그녀의 어머니는 어리석지 않았으니, 결국에는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괴물을 키웠구나.”

진실.

그것은 대체로 잔혹함을 띄우고 있었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은 라이너스가 저지른 만행 앞에서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 홀로 있고 싶구나, 비아.”

오벨리아는 실의에 빠진 제 어머니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상대가 원해야 가능한 것으로, 그녀는 어머니의 방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방문을 닫으며 오벨리아가 순간 휘청거렸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은 탓이었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은 괜찮으신 건가?”

언제 나타난 것인지,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를 잡아 부축했다.

그에게서 제 어머니의 걱정을 들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지라 그녀는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안 괜찮으시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까.”

오벨리아가 애써 몸을 똑바로 세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현기증 후에 힘이 빠진 몸은 홀로서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오벨리아의 건강은 착실히 나빠지고 있어서, 이런 가벼운 현기증에 정신이 바로 드는 것도 이제는 시간이 걸렸다.

“실례하지.”

“……에크하르트!”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를 안아 들었다.

그녀가 놀라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시녀에게 들었다. 어제는 현기증이 난다고 했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며.”

에크하르트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걱정임이 분명했다.

“……내 시녀한테 날 감시하라고 한 거야?”

오벨리아가 괜스레 까칠한 말을 꺼냈다.

물론, 그녀는 에크하르트의 의도가 그런 게 아님을 알았다.

오벨리아의 수명이 채 1년조차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이후로, 그는 은연 중 그녀를 유리 인형처럼 다루었다.

그러니 걱정되어 가만히 두지를 못하는 것뿐이었다.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겠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추궁 같은 말에도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래서 그녀는 말을 잃고 말았다.

오벨리아는 언젠가부터 자꾸 그에게 자신의 건강 상태를 숨기게 되었다.

에크하르트가 자신을 이런 식으로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가 시녀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손님이 찾아왔다. 계속 거기 주저앉아 있게 둘 수는 없으니, 싫어도 조금만 참아라.”

오벨리아가 한숨을 삼켰다.

정말이지, 차라리 싫었다면 나았을지도 몰랐다.

“……누가 찾아온 거야?”

그렇지만 에크하르트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오벨리아는 반사적으로 말을 돌리고 말았다.

“신성 제국 사람.”

“에드먼드가 연락을 취한 사람이 벌써 도착했다고?”

오벨리아는 선황제의 수작을 눈치챈 후, 에드먼드를 통해 신성 제국에 연락을 취했다.

선황제와 알렉산드로는 우선 아그네스를 황비로 들인 뒤에, 나중에 어쩌라는 식으로 신성 제국에 통보할 생각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신성 제국에서 사신이 와 있으면 그런 식으로 날치기로 황비 자리를 만들지는 못할 터였다.

그래서 신성 제국에 연락을 넣은 것인데, 아무리 에드먼드가 신성 제국에 연이 있다지만 어떻게 일주일도 되지 않아 사람이 도착했다는 말인가.

오벨리아는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론체스터로 오던 중이었다더군.”

에크하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오늘 신성 제국에서 온 손님은 며칠 전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건강을 위해서 에드먼드에게 부탁하여 부른 사람이었다.

에드먼드의 위치가 위치다 보니, 우연히 신성 제국의 사신이 될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사람이 왔을 뿐이었다.

“……그래?”

오벨리아가 미심쩍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에크하르트를 바라봤다.

그러나 애초에 에크하르트가 에드먼드를 부를 때부터 타운하우스의 비밀 통로를 이용해 들였기 때문에 그녀가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게다가 에드먼드 또한 오벨리아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그녀가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입을 꾹 다물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신성 제국에서 온 자가 그곳에서도 저명한 신관이라더군. 온 김에 진찰을 받아 보는 게 좋겠어.”

에크하르트가 응접실 문 앞에 오벨리아를 내려 주며 말했다.

“……이게 우연이야?”

에크하르트가 덧붙인 말에 오벨리아의 의심은 다시 고개를 들고 말았다.

신성 제국의 신관들은 의원 중에서도 의술이 특출난 자들만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이들을 만나는 건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신관이 우연히 론체스터 제국으로 오던 중이었다니.

어떻게 고스란히 믿고 있을 수 있겠는가.

“우연이라니까.”

에크하르트가 그 의심을 모른 척 응접실의 문을 열고 오벨리아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당장 손님이 와 있으니 어쩔 수 없어, 그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힐켄테데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들어오자, 신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에게 인사하던 신관은 그대로 멈칫하고 말았다.

신관의 시선이 에크하르트에게 그대로 박혀 있었다.

“왜 그러지?”

그 시선을 느낀 에크하르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신관이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인사했다.

“아…… 아닙니다. 힐켄테데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저는 신성 제국의 체임벌린 백작이자 신관, 사일러스입니다. 에드먼드와는 신성 제국에서 함께 어울리는 친구 사이였지요.”

“에크하르트 힐켄테데다.”

“오벨리아 힐켄테데라고 하네.”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 또한 사일러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이 인사를 하는 중에도, 사일러스는 어쩐지 에크하르트를 힐끔거리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에크하르트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결국 오벨리아가 사일러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재차 멈칫한 사일러스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사실, 힐켄테데 대공 전하께서 제가 아는 분과 많이 닮으신 것 같아서요. 돌아가신 분이고, 신성 제국에서 쭉 사신 분이니 대공 전하와 연관이 있으실 리가 없지만요.”

사일러스는 이 주제를 빨리 마무리 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더는 묻지 말라는 듯 딱 잘라 말했다.

“그런가.”

에크하르트는 사일러스의 말에 크게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사일러스에 말에 자신도 모르게 찻잔을 들던 손을 움찔했다.

“내 아내의 건강 상태를 봐주었으면 해. 대신, 이프넌트 후작에게는 비밀로 한 채로.”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진찰에 신경이 집중된 탓에 그녀의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의원은 본디 환자의 신상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 법이지요.”

에드먼드와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던 사일러스는 에크하르트의 요청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잠시 생각에 빠졌던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의 팔을 붙잡았다.

“에크하르트, 진찰은 체임벌린 신관에게 개인적으로 받고 싶은데.”

“……체임벌린 신관과 따로?”

에크하르트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매번 자신의 건강 상태를 타인에게 알리지 않고 싶어 했던 것을 떠올리며 금세 긍정했다.

“그래, 알겠다. 잘 부탁한다, 체임벌린 백작.”

“예, 성심껏 대공비 전하를 치료하겠습니다.”

에크하르트는 오히려 오벨리아가 진찰을 거부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럼, 진찰을 보겠습니다.”

문이 닫히고 난 후 사일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벨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진찰을 시작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체임벌린 신관, 물어볼 게 있는데.”

“……아, 예.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사일러스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혹시라도 오벨리아가 자신과 에드먼드가 미리 이야기를 나눈 후에 그녀를 진찰하러 온 것이라는 사실을 들킬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아까, 에크하르트를 닮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 좀 더 자세히 해 줄 수 있겠나?”

그러나 오벨리아가 꺼낸 말은 사일러스의 걱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예? 그건 어째서…….”

사일러스가 난감한 기색을 지우지 않은 채로 말했다.

“사실 그분에 대해서는 깊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일러스의 그런 태도에 오벨리아는 오히려 더 집요하게 그에게 질문을 건넸다.

“어째서? 혹시 그 사람의 신분이 애매하기 때문인가?”

사일러스가 눈에 띄게 몸을 움찔했다.

오벨리아가 그를 몰아붙이듯 말을 이었다.

“혹시, 신성 제국 고위 귀족가의 숨겨진 존재라던가…….”

사일러스는 백작이고 신관이었다.

그의 위치 또한 신성 제국에서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그런데도 사일러스가 언급하기 조심스럽다면 백작가 이상의 지위를 가진 사람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오벨리아가 알기로, 신성 제국의 고위 귀족 중에서 에크하르트와 닮은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고위 귀족과 관련은 있되, 공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터부시해야 하는 사이이리라.

“그걸 어떻게…….”

사일러스는 매우 놀란 기색이었다.

그가 애써 숨기려고 한 것도 의미 없이 오벨리아의 추측은 아주 정확했다.

사일러스의 반응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꽉 구겨 쥐었다.

오벨리아는 선황제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어쩌면, 에크하르트의 핏줄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