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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110화 (110/136)

110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5)

“형님, 그렇지 않아도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라이너스가 일리어스에게 갑작스레 친근하게 굴었다.

“언제쯤 저택으로 돌아오실 예정이신지요?”

라이너스의 뻔뻔함은 늘 도를 넘어섰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리어스에게 자신의 저택으로 들어오라 말했다.

“나보고 네 저택으로 돌아오라고?”

일리어스는 순간 기가 막혔으나, 카테리안느의 정식 후계자답게 그것을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아버지도 돌아가셨는데, 제가 형님과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이너스의 말에 순간, 오벨리아와 일리어스, 그리고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아무리 철면피라지만 제가 죽인 아버지를 들먹이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벨리아는 감히 자신들의 앞에서 카테리안느 공작 행세를 하고 있는 라이너스의 따귀라도 올려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꾹 눌러 참은 것은 여기서 일을 그르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그렇지 않아도 돌아가려고 했어.”

분노를 부르는 라이너스의 행동에 잠시 침묵했던 일리어스가 돌연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손을 펴서 내밀었다.

“가주의 인장이 없었을 테니, 일 처리도 제대로 못 했을 거 아냐?”

“무슨……!”

라이너스의 두 눈이 순간 홉떠졌다.

일리어스의 손에는 사라진 줄 알았던 가주의 인장이 끼워져 있었던 탓이다.

라이너스의 두 눈이 일리어스에 손에 박혔다.

그토록 찾아도 없던 가주의 인장이 일리어스에 손에 있다니!

순간 라이너스가 이성을 잃고 일리어스의 손을 홱 낚아챘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여기서 카테리안느 가문의 본래 인장이 나타났다는 건, 그간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라이너스에게 인장을 일부러 주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으니까.

“이게…… 이게 어떻게, 여기에……!”

라이너스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의 얼굴에 혼란과 분노가 가득했다.

카테리안느 공작이 이미 일리어스에게 가주의 인장을 건네주었던 것인가?

사실인지 아닌지 모를 것에 대한 의심이 라이너스의 화를 부추겼다.

“내가 주었다.”

그리고 그런 라이너스의 분노에 기름을 들이부은 것은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었다.

“카테리안느 공작께서 돌아가셨으니, 그 후계인 일리어스에게 인장을 주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니?”

“어머니!”

라이너스가 이성을 잃고 소리를 내질렀다.

자신이 가주의 인장이 어디 있냐며 그토록 애원하고 원해도 들어주지 않던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아니었나.

그런데 일리어스에게는 이렇게 홀라당 넘겨줘 버리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하구나, 라이너스.”

일리어스가 여전히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의아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너는 항상 내가 카테리안느 공작위에 오르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건…….”

잔뜩 흥분해 있던 라이너스가 말을 잃었다.

그가 아무리 감정 통제를 오벨리아나 일리어스보다 못한다고 할지라도, 여기서 사실은 제 형을 축하하던 일 따위 모두 거짓이었다고 말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런 내가 정당하게 가주의 인장을 물려받았는데, 너는 왜 그것에 대하여 분노하는 거 같아 보일까?”

“……형님이, 오해하신 겁니다. 저는…… 저는, 그런…….”

라이너스가 뒤늦게야 자신이 지나치게 이성을 잃었었다는 것을 깨달아 두 입술을 꾹 눌러 다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벨리아의 티룸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너무 많은 이들에게 안 좋은 꼴을 보여 버렸다.

라이너스의 얼굴 위로 낭패 어린 기색이 짙어졌다.

그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저는 그저 이미 새 인장이 만들어졌으니, 공작가의 일 처리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애초에 가문에 대대로 물려 내려온 가문의 인장이 남아 있었는데, 새 인장이 왜 필요하니?”

그러나 라이너스의 변명은 먹히지 않았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끝까지 그를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설마…… 돌아가신 네 아버지가 물려준 인장보다 새로 만든 그 인장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라이너스.”

라이너스가 이를 악물며 제 어머니를 노려봤다.

그러나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겨우 라이너스의 그런 태도에 주춤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더없이 냉엄한 태도로 불효한 제 둘째 아들을 쳐다봤다.

“……정말, 너무 하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라이너스가 비련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슬픈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와 형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저 홀로 카테리안느 공작가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저를 내칠 생각이십니까?”

어쨌든 라이너스는 공작자리에 올랐다.

그런 그를 자리에서 끌어내린다는 건 자칫하면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과 일리어스가 매정하고 지독해 보일 수 있었다.

라이너스는 그 점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와 내가 가족에게 그렇게까지 하겠느냐.”

라이너스의 두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일리어스가 곧장 그의 말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리어스의 말에는 분명 뼈가 들어 있었다.

보통은 가족에게 그렇게까지 하지 않지만, 가족에게 그보다 더한 짓들을 저지른 것이 라이너스였기 때문이다.

“그저 한동안은 네가 가주로서의 업무에 적응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돕고 싶어서 그런단다. 마침, 인장도 두 개니 못할 건 없지 않니.”

조곤조곤 설명하는 일리어스는 겉보기에는 더없이 사려 깊고 좋은 형이었다.

일리어스의 말은 즉, 공작의 자리에는 라이너스가 앉아 있되 자신이 고문의 역할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사실, 라이너스는 후계자가 아니었기에 가주의 업무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 일리어스의 말이 아주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일리어스와 라이너스가 동시에 가문 중대사를 결정할 때 가신들이 누구를 따를지는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라이너스가 이를 악물었다.

일리어스의 제안을 욕이라도 내뱉어 주고 거절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지금 그들을 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라이너스가 망설이는 틈을 타, 일리어스가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의 손을 붙잡았다.

“어머니도 저와 함께 라이너스의 저택으로 가시지요. 혹시라도 라이너스에게 서운한 게 있으셨다면 저를 봐서라도 봐주시고요.”

일리어스의 행동에 라이너스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사람들이 다음날부터 일리어스에 대해 어떻게 떠들지 뻔했기 때문이다.

원래 자신의 자리였던 공작위를 빼앗기고도 오히려 그로 인해 틀어진 동생과 어머니를 다시 이어 주기까지 하려는 상냥한 일리어스 카테리안느.

사람들은 일리어스를 그렇게 평할 것이고, 언제나 그랬듯 일리어스는 사교계에서 또 다시 좋은 평판을 가져갈 터였다.

그리고 오벨리아는 그런 라이너스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일리어스의 평판이 올라가거나 깎인다고 하여 라이너스이 평판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사사건건 질투하는 모습이 그랬다.

아마도 그만큼이나 둘째 오빠를 믿었기 때문일 테지만, 라이너스의 저런 모습을 이전에는 대체 왜 몰랐나 싶을 지경이었다.

“일리어스, 네가 정 그렇게 말한다면야…….”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일리어스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후, 곧바로 라이너스를 쳐다봤다.

자신이 이렇게 한 풀 꺾어 줬는데 너는 그렇게 계속 고집을 부리고 있을 거냐는 시선이었다.

물론, 이 역시도 라이너스는 고집이고 나발이고 그 시선 따위 모른 척하고 싶었다.

카테리안느 일가의 대치를 구경하고 있는 관중들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저야 형님이 도와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죠.”

결국, 라이너스는 일리어스의 말을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은 라이너스가 원하는 대로 새로운 카테리안느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물론 그 외의 것들은 단 하나도 라이너스가 원하던 게 아니었지만 말이다.

***

일이 수월하게 풀린 후, 오벨리아는 힐켄테데의 타운하우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오벨리아의 앞에 누군가의 손이 내밀어졌다.

당연히도 그 사내는 에크하르트였다.

“기분이 좋은가 보군.”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아 마차에서 내려주었다.

오벨리아가 괜스레 그를 타박했다.

“매번 이러지 좀 말라니까.”

에크하르트는 어느 순간부터 오벨리아가 불면 날아갈까,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마차의 발받침을 밟고 내리는 그 순간조차 혹시나 그녀가 발을 헛디딜까 봐 이렇게 오벨리아를 들어서 내려주고는 했다.

“일은 잘 풀렸고?”

그간 익숙해져서인지, 역시나 에크하르트는 오늘도 능청스레 오벨리아의 타박을 넘겼다.

“예정대로 됐어.”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은 카테리안느 공작의 사후, 가주의 인장을 자신의 드레스 안감과 겉감 사이에 꿰매 숨겼다.

아무리 라이너스가 여기저기 이 잡듯 뒤졌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 수많은 드레스의 안감과 겉감을 뜯어 볼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애초에 드레스의 구조 같은 것을 그가 알 리도 없었으니, 생각조차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럼 더 기분 좋아질 일만 남았겠군.”

만족스러워 보이는 오벨리아의 얼굴을 보며 에크하르트가 미소했다.

그의 말에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에크하르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그가 오벨리아에게로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닥였다.

“오벨리아, 네가 기다리던 사람이 지금 네 응접실에 도착해 있다.”

에크하르트의 말에 순간 오벨리아의 두 눈이 커졌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가 응접실에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심해라, 오벨리아.”

“이 정도로 안 넘어져.”

오벨리아의 걸음이 자신도 모르게 빨라졌다.

에크하르트가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어느덧 응접실에 도착한 그녀가 확 문을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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