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55화 서로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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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정령왕은 총 다섯이 존재한다.
그들은 정령들의 왕으로 다른 정령들과 달리 신이 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정령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속성을 가진 정령들을 지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물며 그게 고위신의 오른 정령신이라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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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왜 여기서 나와?’
가장 먼저든 생각은 의문이다.
정령왕들은 엘린시아가 세계로부터 분리된 이후, 통합 서버의 정령 도시로 이주했다.
현재 엘린시아에 남은 정령의 대부분은 중급 정령들뿐. 상급, 최상급도 몇 마리 있긴 하지만, 정령왕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정령왕은 무지막지하게 강하다. 이렇게 갇혀있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령왕이라…”
내가 만약 정령술사였다면 레빗을 대리고 있는급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령 술사가 아니다.
그저 물의 친화도가 더욱더 올라갈 뿐. 물론 그렇게 된다면 웬만한 정령보다는 훨씬 쓸만하다.
나는 보석에 손을 대었다.
“...”
역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만져보니 알겠다. 이건 위령(僞靈)이다.
즉, 껍데기 라는 소리다.
언제든지 정령왕이 정신을 이 몸으로 옮겨 활동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
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그래 계약하자. 야! 너 이리 와.”
“네!”
긴장하고 있던 물의 정령은 후다닥 나에게 달려왔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정령. 나는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해, 해요?”
“어.”
내 손과 정령의 자그마한 손이 맞닿는다.
츠으으읏….
[물의 정령, 미아와의 계약을 완료했습니다.]
[정령 스텟이 추가됩니다.]
[물 속성 공격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본래대로라면 정령의 시험이랍시고 이러쿵저러쿵 시키는 걸 해와야 한다. 하지만 미야는 나의 힘에 두려움을 느껴, 모든 절차를 무시한 체 바로 계약했다.
[주종(主從) 계약서를 구매합니다.]
“싸인.”
“네..?”
“뭐해 싸인 안 하고.”
정령은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정령과 계약자는 상하관계가 아니다.
좋게 말하면 협력자. 나쁘게 말하면 채무자 정도의 느낌.
굳이 따지자면 정령 쪽이 위라고 보는 게 더 맞다. 힘은 정령 쪽에서 빌려주기 때문이다.
“안 하면 계약을 해제하고 뭐 이걸 어떻게 할 수 밖에…”
“...하, 할게요!”
미아는 자신의 왕을 지키기 위해 계약서에 싸인했다. 계약의 내용은 대충 100년 정도 내 말을 잘 듣는다는 것.
주종 계약서는 완벽하진 않지만 기준과 그에 합당한 규칙만 잘 짜둔다면, 웬만해서는 그것을 거역할 수 없다.
지겨운듯 이 사태를 보고있던 베린이 순간 흠칫 했다.
“끝나셨습니까?”
“아직. 가장 중요한 게 남았는데.”
“아리아님은 못 건듭니다. 그건 눈앞에 있는 수인도 마찬가지 일 겁니다.”
“냥?”
맞는 말이다.
이건 정령왕의 힘으로 만들어진 파편. 힘으로 부수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레빗이 전력으로 치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이곳에 정령신이 가만히 보고있리가 없다.
나는 미야를 불렀다.
“야.”
“네?”
“들어가.”
“...네. 네?”
미야는 당황하며 몸을 뺐지만 이미 늦었다. 베린과는 다른 강제적 주종 계약서.
그것은 하루에 3번. 행동을 강제할 수 있다.
이미 미야의 몸은 보석을 향해 파고들었다. 이피아가 당황하며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왔지만 레빗이 그를 단단히 막고 있어, 그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빈 육체 속으로 들어간 미야가 몸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쩌적-!
보석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느껴진다.
저 아리아의 몸속에 미야가 있다.
“...! 미친 인간이!”
콰앙!!
이피아의 기력이 폭주한다. 그것도 잠시. 레빗에 의해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냐. 주인님을 방해하지 마라냥!”
“...그만둬! 정령왕의 분노를 사게 되면 필시 죽을 거다!”
“위령인데 무슨.”
정말 정령왕이 화날 거였으면 내가 개수작으로 부리는 순간부터 개입했을거다. 하지만 정령왕은 미야가 몸을 빼앗는 과정에서도 개입하지 않았다.
아마 여기에 둔 걸 까먹은게 아닐까?
안 쓰는 물건 취급하듯이 구석에 박아두고 잊고 있었을지도.
[물의 정령, 미야의 기력이 급상승합니다!]
[정령 스텟이 상승합니다!]
[정령 스텟이 상승합니다!]
[정령 스텟이 상승합니다!]
[정령 스텟이 상승...]
스텟이 쭉쭉 오르는 게 느껴진다. 이걸 보면 참 아쉽다.
‘내가 정령술사였다면...’
하지만 최강자를 후회하진 않는다. 최강자는 다른 모든 직업을 통틀어서 가장 강하니깐.
[정령 스텟 250]
[물 속성 친화력이 급상승합니다!]
자박.
보석이 완전히 파괴되고 미야가 걸어온다. 육체는 완전히 바뀌었다. 다른 이들이 본다면 물의 정령왕, 아리아로 보겠지만. 나는 안다.
저것은 미야라는 것을.
“제 영혼이… 제 몸이… 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원래대로라면 미야의 격이 정령왕보다 훨씬 낮기에, 아리아의 몸에 들어가자마자 영혼이 동화되어 사라졌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몸의 주인인 아리아는 부재중. 게다가 나의 계약에 얽혀있어 미야의 존재가 뚜렷해졌다. 이러한 조건들이 있었기에 완전히 육체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용사.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구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말. 주황이는 아니다.
쩌엉..!!!
원기둥 형태의 창백한 빛이 내려온다.
“윤 씨!”
다윤이 급하게 뛰어온다.
“주인님!”
레빗도 마찬가지. 이 창백한 빛을 그대로 맞으면 나는 필히 죽을 것이다.
스릉-
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홀리에린의 초월자, 그라티아의 장검을.
-...!
장검은 빛을 흡수했다. 흡수된 빛은 그라티아의 빛으로 변화되어 더욱 찬란한 빛으로 변모했다.
“에너지를 줘서 고맙네. 신성력은 함부로 못 구하는 건데.”
-어떻게 그만한 빛을…
나는 장난스럽게 검을 어깨에 걸친 체 하늘을 올려다 봤다.
“애초에 용사를 빛으로 죽일 생각을 하는 게 더 이상한거 아닌가?”
-...
정령신 히아트는 빛의 정령신이다.
과거에는 물, 불, 바람, 대지, 어둠.
다섯가지 속성의 정령중 하나였지만, 신이되면서 새로운 속성을 얻은 것이다.
그의 힘은 악(惡)에 강하다. 그것은 용사인 나도 마찬가지다.
물론 히아트의 빛이, 여신이 용사에게 나눠준 빛보다 더 강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를 대항할 만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괜히 몇십억 하는 무기가 아니지.’
“어때. 더 해볼래? 빛이 안 통하면 현신해서 물리력으로 싸워도 상관없고.”
물론 진짜 물리력으로 싸우면 내가 지겠지만.
-너는… 정말 용사가 맞는가?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지. 판단은 창조신이 하는 거지.”
-...
하늘을 창백하게 매우던 신(神)은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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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궁 쿠궁…
엘린시아의 왕성이 흔들렸다. 따듯한 차를 마시던 이랑은 흔들리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신께서 힘을 쓰시는 모양인데. 곧 괜찮아질 겁니다.”
“그래.”
호록.
엘린시아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그마한 여자아이를 바라봤다.
‘여우신 이린의 자식 이랑…’
그녀도 알고 있는 존재였다. 과거 이곳에 와서 한번 깽판을 부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형제자매를 광인(狂人)처럼 패던 걸 떠올리면…
찻잔을 잡고 있던 손이 조금씩 떨렸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탁.
“그래서.. 용사의 동료로 이곳에 오셨다고요.”
“응. 나름 괜찮은 녀석이야. 행동은 차갑게 할지라도 심성은 따뜻한 녀석이지.”
“그런가요…”
엘린시아는 이피아의 반응을 떠올렸다. 분명 그는 겁을 잔뜩 먹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랑이 말하는 걸 들어보면 그는 용사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한다.
그는 통찰력과 결단력이 있고, 약자를 생각하며, 불의에 저항하고, 동료들을 아끼며, 그들을 지킬만한 힘까지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얘기만 들어보면 성인(性人)도 이런 성인이 따로 없다.
원래부터 만나볼 생각이었지만, 더욱더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분이 정령과의 계약을 원한다고 들었어요.”
“아? 어. 맞아. 녀석이 정령 친화력을 원하거든.”
“사실 그분이…”
엘린시아는 이랑에게 남편에게 들은 얘기를 해줬다. 김윤이 최상급 정령을 내놓으라는 이야기.
한참 얘기를 듣던 이랑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해한 거 아니야?”
“네?”
“내가 아는 김윤은 제멋대로 내놓으라고 하는 녀석이 아니거든.”
이랑은 김윤과 3개월 동안 로루닌에서 함께 생활했다. 반파된 로루닌을 재건하면서 토끼와 거북이 종족이 김윤의 동상을 세우려 했으나, 김윤은 질색하며 그것을 거절했다.
그 외에도 여러 재화나 자신의 이득이 될만한 부분을 잔뜩 얻어 갈 수 있음에도, 그는 자신의 몫 만큼만 받아 갔다.
물론 동상은 있다.
김윤은 그것이 자신의 동상인지 꿈에도 모를테 지만.
이랑은 쿡쿡 웃었다.
“아무튼 김윤은 그럴 녀석이 아니야. 아마, 너의 남편과 일이 있었고. 그에 대한 보상을 원하는 거겠지. 녀석은 일에 대한 보상은 확실히 받으려고 하거든.”
“아…”
“남편이 처음에 뭐라 하고 나갔는데?”
“그...용사를 만나러 간다고 들었어요. 그 뒤로...”
“그럼 맞겠네.”
이랑은 차를 마셨다. 기왕이면 눈을 통해 진실을 알고 싶지만, 정령신이 신경 쓰여서 함부로 사용을 안 하고 있다.
애초에 신경 쓰지 않은 일은 파악할 수도 없고.
“이곳도 오래됐네.”
“네. 다 히아트님의 덕분이죠.”
“흐음…”
이랑은 엘린시아를 바라봤다.
오랫동안 하이엘프들의 왕으로 군림한 엘린시아는 강하다. 그 강함은 엘린시아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들의 왕국의 내로라하는 기사, 마법사 보다도 훨씬 강하다.
‘이진이나 이루보다도 더 강해겠네.’
당연한 소리다. 오래 살아온 만큼 배움도 많았을 거고 수련도 많이 했을 테니깐. 그런 그녀보다 강한 것이 바로 그녀의 남편.
그는 전직 용사로 용사의 특수성과 오랫동안 이 세계에서 살아온 만큼 훨씬 강할 것이다.
하지만...
“김윤에 비하면…”
“네?”
“아니야.”
비교할 걸 비교해야겠지. 김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폭발적으로 강해지고 있다. 그 속도는 이랑 본인조차도 두려울 정도다.
처음 만난 김윤과 지금의 김윤은 얼마나 강해졌는가.
또 그 이후의 미래는 얼마나 강해질 것인가.
더 무서운 것은 그가 가진 지식이다. 그는 로루닌의 신들을 자신의 손바닥에 부리듯이 행동을 끌어냈으니깐.
무엇보다도 그가 가진 고양이 신, 레빗.
기원진 없이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이랑은 승부욕에 가까운 의문이 들었다.
“그...정령은 꼭…”
“아, 알았어. 말은 해둘게.”
“히아트님의 뜻대로 정령은 반드시 본인의 의지와 시험을 받아-”
엘린시아의 말이 멈췄다. 그녀의 눈에 아리아의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다.
“?”
이랑 역시 그녀의 반응의 뒤를 돌았다. 성인 남성의 팔뚝만 한 크기의 여자. 푸른빛의 머릿결이 허리까지 내려왔고, 그 색에 걸맞은 눈이 반짝였으며, 몸을 아우르는 물의 기운이 정령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저거. 정령왕 아니야?”
“아,아리아님! 이곳에 오셨습니까?”
엘린시아는 왕으로서의 품위를 지키지도 않은체, 후다닥 뛰어가 정령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엘프들에게 있어서 정령왕은 창조신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정령은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네? 왜 사과를 하십니까? 정령왕님이 어째서...”
“전 아리아님이 아니에요. 저는 그저…”
“안녕. 엘린시아님.”
“누구…”
“내 계약한 정령은 어떤가 물어보러 왔는데.. 잘 계약한 거 같네.”
“에, 엑?”
엘린시아는 머릿속이 순간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