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 용사와 악마
* * *
악마.
마왕의 수하들이자 마기(??)를 타고난 종족.
특유의 어둡고 짙은 기운으로 인해 다수의 종족 들로 부터 안 좋은 시선과 인식을 받았고, 그것은 다수의 종족을 적으로 돌리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인식을 고쳐내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위대한 마왕(?王), 제르노스의 신하들이기에.
제르노스의 능력을 타고난 이들은 자신을 공격하는 이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마왕의 뜻에 그들은 자신의 무기와 힘을 이용해 외부의 종족을 공격했다.
그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것은 인간.
가장 저열하고 신체조건이 열악한 인간이 악마와 맞서 싸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뒤에 여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신, 엘레노아.
그녀가 내린 신성(??)은 모든 인간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오직 그녀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인간.
용사만이 여신의 능력을 받았고 자연스레 그들은 악마와 대적했다.
그렇게 벌어진 싸움은 수백, 수천 년을 흐르는 동안 계속 이뤄진다.
끌나지 않을 것 같던 싸움은 외부의 누군가로 인해 멈췄다.
그리고 다시 시작됐다.
좀 더 확실히 색채가 정해진 체.
악마들의 최후의 보루이자, 새로운 마왕의 성인 ‘하펠론.’
거대한 위용과 짙은 마기로 인해 마족이 아니라면 숨 하나 쉬기 어려운 곳이지만 나는 멀쩡했다.
하펠론은 99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탑이다. 수많은 층 중 77층 가장 깊은 곳의 방에 들어가면 거대한 서재가 시야에 들어오는데, 3번째 책장의 17번째 줄, 9번째 칸의 책을 꺼내면 숨겨진 방이 드러난다.
뚜벅. 뚜벅.
방으로 향하는 칠흑과도 같은 통로를 지나고 나면 알 수 없는 장막에 둘러진다.
“늦어.”
“이 정도면 일찍 온 거야.”
“...하여간.”
쯧.
그녀의 혀찬 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마왕성의 이인자, 마왕의 딸 하페루아.
“매번 오기도 힘든데 그냥 네가 오면 안 되냐?”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어?! 여기가 그년의 눈을 가리는 곳이야. 다른 곳은 위험해.”
“관리자만 눈만 눈이니. 이미 마족들도 다 아는데 모른척하는 거, 너도 알지?”
“...다 닥치라고 했으니 문제없어.”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용사와 악마.
여신과 마왕.
적혀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둘의 만남은 1년 전부터 계속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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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세계의 동기화가 되기 이전.
“네가 말한 대로 여유 시간도 줬고, 시간도 이 대화가 끝나면 지날 테니 앞으로의 자세한 계획들을 알려줄게.”
“어.”
새로운 세계의 마왕의 성이자 이전의 나조차 입성하지 못했던 하펠론.
그곳에 나와 하페루아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녀와 나와 연결된 맹약이 그 둘의 신뢰를 점차 높이고 있었다.
“우선 우리의 목적은 이 세계의 관리자를 끌어내리는 거야.”
“그래. 그게 어떻게 하는 건데?”
“관리자는 초월적이고 무소불위의 존재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자신이 관리하는 게임에서만 통용돼.”
하페루아는 얇은 왼손을 뻗어 여러 개의 푸른 창을 띄워냈다.
푸른 창 속에는 어드벤처의 관련된 수많은 정보들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월드 어드벤처만의 내용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다른 게임과 관련된 내용도 제법 있었다.
그리고 그 게임은...
“모두 박탈당하거나 스스로 관리 자격을 내려놓은 사안들이지.”
하페루아는 다시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봤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건 이레귤러. 즉 특이점이야.”
“특이점이란 게 정확히 뭔데.”
“게임 차원을 구성하는 요소. 네가 예상하고 실제로 사용했던 대로 코드라고 생각하면 돼. 코드로 잠시나마 관리자의 권한들을 조금 씩 쓰는거지.”
그렇게 말한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주위로 푸른색의 별이 떠오르더니 이내 붉은색의 모래가 되었다. 그러고는 분홍색의 토끼로 변했다.
토끼는 다시 지팡이가 되었고, 지팡이는 다시 와인잔이 되었다.
“발현...”
“발현… 뭐 비슷한 이름이네.”
“너도 이레귤러라는 건가?”
“반 정도만.”
그녀는 손에 들린 와인잔에 와인을 담았다.
“나는 특이점을 깨닫고 다른 차원으로 추방되어 초월 했어. 만약 내가 정상적인 초월자로 거듭나 이레귤러가 되었다면 관리자년 따위는 상대도 안 됐을 거야.”
애써 담은 와인잔은 바닥에 떨어졌다.
쨍끄랑~
깨진 와인잔에서 흘러나온 와인은 바닥을 무질서하게 퍼져나갔다.
“관리자가 너를 완전한 상태가 아니게 만들었다 이거야?”
“그래. 생각보다 똑똑하구나 김윤?”
“...”
똑똑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제라드의 말을 들은 이후로 꼴사납게 느껴졌다.
하페루아는 내 눈을 빤히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의 나는 깨진 와인잔이야. 그리고 와인은 나와 이 세계에 퍼져있지. 내가 그녀에게 대적하려면 퍼진 와인들을 회수해야 돼.”
그러니깐 정리를 해보자면 내가 그동안 여럿 만나온 특이점들은 전부 하페루아로 부터 비롯되었고 그것들을 모아야 한다는 소리 같다.
“잘 이해했네.”
“나는?”
“응?”
“나도 너한테 비롯된 건가?”
내가 특이점을 얻은 것.
그것은 처음의 특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레어 특성인 ‘숨겨둔 힘.’
평범한 능력이었지만 세계가 암전 되기 전, 특성은 나에게 특이점을 내려주었다.
하페루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너의 특이점은 너 스스로에게서 비롯 된거야. 그게 너를 필요로 하는 이유고.”
그녀의 손길이 화면을 향하자 수십 개의 위치가 떠올랐다.
인물, 물건, 괴물, 자연 등 다양한 곳을 위치하고 있었다.
“앞으로 할 일이 많아.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반드시 약속할게.”
화면을 향하는 손길이 나를 향한다. 손과 손이 마주하자 그녀의 눈빛이 변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녀의 눈빛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와인은 언제 다 차냐.”
“아직.”
하페루아와 나.
둘의 사이는 계속됐다. 그간 창조석을 모으기도 했고, 특이점을 가진 사람을 만나 직접 그 힘을 회수하기도 했다.
더불어 초월자가 나타났을 때는 그들이 가진 본래의 힘을 가져가기도 했다.
초월자는 강하지만 게임에 들어온 이상 한계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들은 ‘부속품’으로 들어온 게 아닌 단순한 참여자로 들어온 것이기에.
힘의 사용에 제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와인잔은?”
“...멀쩡해.”
그녀는 옅게 웃었다.
잠깐 웃던 그녀는 으으─ 거리며 나에게 정보의 창을 내어주었다.
“너랑 있으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거 같다니깐.”
“내가 뭘 했다고……”
나는 말을 흐리며 정보들을 보았다.
“...아델리나?”
“인간들이 세운 왕국이야. 정확히는 특이점의 파편을 가진 인간이 있는 곳이지.”
“흐음…”
“늘 해서 알지? 언제나 일은 빠르고 확실하게.”
“들키지 않게, 뒷수습은 확실히.”
이미 수십 번은 했는데 모를 리가.
“그래. 잘 아네.”
하페루아는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내 앞에 다가섰다.
더 이상 홀리진 않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몸과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그녀는 피식 웃었다.
“우리 윤이가 매번 잘해주니깐… 이번에도 잘 수거해 오면... 음. 전처럼 키스라도 해줄까?”
“다윤이가 있는데 내가 왜.”
“.......”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하는게 아니라 네가 사정사정해야 해줄까 말…”
콰앙!
어느새 내 몸은 하펠론 밖을 날았다.
시원하게 구멍이 뚫린 탑에는 얼굴이 붉어진 악마가 소리쳤다.
“꺼져! 개자식아!”
“거참.”
1년이 지나고 나 역시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졌지만 여전히 하페루아는 강했다.
‘다시 싸우면 이길 수 있으려나…’
“또 지셨군요.”
“아, 레비아냐?”
누워있는 내 위로 적색의 악마가 보였다.
최상위 악마이자 혼돈의 악마, 레비아.
대상을 자신의 혼돈 속에 가둬 심상을 붕괴시키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무자비한 악마로 악마족의 간부 중 하나다.
물론 녀석과 나는 이렇게 마주했음에도 싸우지 않고 있다.
“벌써 89번째 패배 아닙니까?”
“...그걸 왜 세고 있냐.”
“악마성에 용사가 왔는데 가만히 있으면 악마가 아니겠죠.”
무질서하게 배열된 적색의 머리카락은 즐겁다는 듯이 흔들렸다.
내가 하페루아를 만나러 다닌지 1년.
아무리 조용조용히 다닌다고 해도 이미 알만한 녀석들은 죄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하페루아와 만나는게 단순히 ‘싸움’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도대체 공주님이랑 뭘 하시는 겁니까?”
“신경 꺼. 토벌되기 전에.”
“하하… 무섭군요. 공주님과 싸워서 매번 살아남는 용사라…”
나는 머쓱하게 웃는 레비아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있어. 너희한테 피해줄 건 없으니깐.”
“뭐… 전 그렇다 쳐도 다들 최상위 악마들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개중에는 공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간부들도 몇 있어서요.”
“그래봤자. 제라드랑 로드리아는 죽었고 드레투라는 봉인, 리비엔은 실종인데. 남은게 오코스랑 부데비르? 이런 놈들뿐인데 뭘.”
별로 신경은 안 쓴다.
이미 위협적인 최상위 악마는 죽이거나 전투 불가 상태로 만들었고 남은 놈들은 그닥 위협적이지도 않다.
그나마 위협적인 레비아는 하페루아의 뜻을 따르고 있으니깐.
“흠, 그렇군요. 참 보면 신기하긴 합니다.”
“뭘?”
“용사와 악마가 이렇게 친숙하게 지낸다는 게. 저희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나중 가면 자연스러워 질거야.”
하페루아의 계획만 잘 이뤄진다면.
그렇게 돼서 나와 그녀가 그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좀 더 재밌어지겠지.’
나는 그날을 상상하며 아델리나 왕국으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