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 6. 선별 (1)
* * *
월광(月光)이 대지를 비추고 유려한 검의 궤적이 눈앞에 펼쳐진다.
상대는 300레벨을 육박하는 월드 보스, 그렉.
세계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높은 경지의 용사나, 대마법사조차 쉽사리 이길 수 없는 상대.
촤악.
“...?”
단 한 번의 베기.
적은 자신이 죽은 상태라는 것도 인지 못 한 체 목이 떨어지고.
쿵─!!!
그것만으로 공방은 끝난다.
“...아직 부족해.”
윤 씨에 비하면 한참 멀었다.
김윤의 기술이. 아니, 최강자의 기술이.
그 검의 움직임을.
그 검의 궤적을.
그 검의 힘을.
‘조금이나마 흉내 낼 수 있다면.’
아마 ‘그것’도 가능하겠지.
이번에는 반드시 부술 수 있으리라.
다윤의 검이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완벽히 움직였다.
“부셨다고?”
“그렇다냐.”
채림의 견학 차원에서 레빗에게 안내를 맡겼다.
할 일도 있고 어차피 나보다는 레빗이 더 나을 것 같아서 맡기긴 했다만…
“허.”
나는 산산조각 난 목재 인형을 만졌다.
나 역시 이격 이상의 기술과 특이점을 사용하지 않으면 삼지창 없이 불가능 한 일.
하지만 채림은 해냈다.
“내가 괜한 일을 한거냥?”
“아냐.”
애초에 쓸 자격이 있다면 누구나 쓸 수 있게 마련해둔 장비들이었다.
창고에는 네르토르의 무기 외에도 쓸만한 무기들이 제법 있으니깐.
‘다윤… 이가 좀 화를 내겠지만.’
적당히 풀어주면 되겠지.
수련의 목적이 꼭 무기를 위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주인님은 가만 보면 너무 많은 사람을 챙기려 한다냐. 다윤님을 좀 더 아껴줄 필요가 있다냥.”
“다윤이를 제일 아끼고 있어.”
하페루아의 일을 돕고 성장을 위해 필요 인력들을 모으고 있지만 여전히 다윤이가 제일 우선 인건 여전하다.
내 말에 레빗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최근 6개월 가까이 만난 적도 없지 않았냥?”
“...”
“어디든 이동할 수 있으면서 한 번을 안 찾아간 이유가 뭐냥?”
...레빗은 눈치가 너무 빨라서 문제다.
어디서 저런 걸 배웠는지.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야.”
나의 목적은 적당히 살면서 꽁냥대는게 목적이 아니다.
흩뿌려진 특이점을 모아 관리자에게 대적하는 것.
그것을 실행시키기 위해서는 나와 함께하는 동료들도 필요 이상으로 강해질 필요가 있다.
단순히 강해지는 게 아닌 다른 이들은 결코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단기간 안에 성장하려면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 안 된다.
자신이 주체가 되는 환각 속에서도 그 정도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물론 그 감각과 기억이 남아있기에 시간이 단축된 거지만.’
“...이해는 한다만냥.”
레빗은 뒷말을 아꼈다.
정신적인 부분을 얘기하는 거겠지.
“걱정 마. 충분히 대처할 수 있으니깐.”
“아! 길드장님!”
소리가 나는 곳에 고개를 돌리니 채림이 손을 마구 흔들며 나와 레빗 쪽으로 다가왔다.
그새 치렁치렁하게 싸맨 걸 보니 어지간히 돌아다닌 모양이다.
나의 시선을 눈치챈 듯 채림이 멋쩍이게 웃었다.
“하하… 생각보다 엄청 넓더라고요. 구경거리도 많고 먹을 것도…”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아! 그리고 이 삼지창…”
채림은 이미 오면서 생각을 마쳤다.
돌려주자.
이미 과분할 정도로 많은 걸 받았고, 자신의 능력을 알고도 팀으로 넣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비록 시험이라는 걸 통과하긴 했다만 그런 분에게 이런 것까지 받고 싶지는 않았다.
삼지창을 본 김윤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그거? 네가 써.”
“돌려… 네?”
저,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이 비싼걸?
“어차피 네가 그걸 들고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무슨 일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보고 김윤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혹시 결혼은 좋아하니?”
“...제가 결혼하라고요?”
“이기면.”
대망의 대전식이 시작되는 날.
커다란 광장 단상에는 음파 확대 마법이 걸린 마이크가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수많은 관객들과 참가자들이 오늘의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이라니… 게다가 여자?!”
“왜. 리나는 예쁘고 돈도 많고 공주에...”
나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채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 옆에 붙었다.
사람들이 워낙 많은 탓에 떨어지지 않게 찰싹 붙은 채림은 어쩐지 긴장된다는 듯이 말했다.
“첫 임무네요.”
“그래.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
“근데 여기 공주가 엄청 강하다던데.”
“강한데 약해져서 괜찮아.”
만일 나와 싸우기 전의 리나였다면 나를 제외한 이곳의 그 누구도 리나를 이기지 못했을거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특수한 능력에 삼지창까지 보유한 채림이라면 충분히 리나를 이길 수 있다.
“근데 진짜 결혼해야 돼요? 저는 남자 좋아하는데.”
“아니, 그냥 이기기만 하면 돼.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해줄 테니깐.”
“끄응…”
채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식의 임무는 처음 일테니 꽤나 긴장했겠지.
“나왔다.”
주위가 전보다 더 소란스러워지더니 단상 위로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미인이 올라왔다.
뚜벅. 뚜벅.
척.
“반갑습니다. 아델리나의 주민 여러분, 그리고 외부인 여러분. 아데르 리나입니다.”
리나는 짧게 목례를 했다.
그녀의 미모와 압도되는 분위기에 관객들이 일순 소음을 감추고 조용해졌다.
‘...이전 상태였으면 숨소리 하나 안 났겠군.’
그만큼 리나는 분위기를 압도하는 기력을 내뿜고 있었다.
“벌써 6번째 대전식이네요. 이번에는 부디 저를 이길 분이. 아니, 조금이라도 칼을 겨눌 수 있는 분이 나타났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말하는 리나의 싱긋 웃는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역시 기감은 안 죽었네.
그 뒤로 리나는 형식적인 얘기들을 들여놓았다.
대전식은 리나를 차지하기 위한 도전자들의 대회이기도 하지만 이곳 주민들의 축제이기도 하다.
최후의 20명이 남을 때까지 도시는 축제를 즐길 것이고, 20명이 남으면 다른 이들은 관객석에서 대결을 감상할 수 있다.
‘사실상 대전의 이유는 관광사업에 있기도 하지.’
대전식이 진행되는 그 짧은 기간 동안 벌어들이는 금액이 반년의 수입과 맞먹을 정도니...
“자! 그럼 즐길 분은 즐기시고. 바로 첫 번째 선별을 시작하도록 하죠.”
따악─
두 손가락이 교차되는 소리과 함께 어느새 채림을 비롯한 30명 정도의 사람이 어두 컴컴한 곳으로 이동했다.
“뭐, 뭐죠?”
“흠…”
어두 컴컴한 공간.
블럭을 쌓아 올린 듯 차곡차곡 세워진 타워.
각 층에 위치한 숨겨진 보상들.
마지막 최후층의 위치한 마수까지.
“여긴 하펠론을 따라 한 거야.”
“하… 펠론 이요?”
“응. 마왕의 탑을 상상해 만든거지.”
마왕의 탑, 하펠론.
마왕이 직접 세운 99층의 탑으로 각층마다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들이 있고 숨겨진 보상이 존재한다.
탑은 항상 어두 컴컴하며 수많은 함정이 존재하고, 최후의 올라가면 마왕이 있는…
“그런 곳! 맞죠?”
“...아니.”
“엑? 그럼요?”
나는 채림을 뒤로 보호한 채 상황을 보았다.
아직까지 다들 눈치만 보고 있는 도전자들.
뭐, 덤벼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하펠론은 그런 구시대적인 건물이 아니거든.”
나도 처음에 갔을 때는 제법 놀랐다. 그곳은 각 층마다 문지기 같은 것도 없고, 어두컴컴하지도 않으며, 수많은 함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펠론은…
“하펠론은 그냥 마왕 타워야. 마왕과 그 부하가 사는 회사 정도.”
“??”
진짜다.
사무직처럼 서류를 들고 끙끙 고생하는 하급 악마.
마법으로 열심히 타워를 깔끔히 청소하는 중급 인큐버스.
깔끔하고 중후한 분위기에 조명을 바꿔 다는 상급 악마…
숨겨진 공간을 제외하고 타워 그 어디에도 음침하고 음습한 분위기는 없다.
당연히 이유는 하페루아인데…
‘왜?’
‘뭘 왜야. 김윤. 그런 건 몇백 년 전이나 그랬던 거고. 그때도 좀 깔끔했지만 아무튼, 문명이 발전했는데 구시대적인 건물 형태를 유지할 필요는 없잖아?’
‘...’
‘좀 더 깔끔하고 확실히 체계가 갖춰진 게 좋지.’
“...뭔가 환상이 깨진 것 같네요.”
내 설명을 들은 채림은 산타의 정체를 알아버린 아이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하도 보다 보니 익숙해지더라.”
“아하…? 근데 보다 보니라뇨? 마왕의 성을 자주 가셨어요?”
“아, 그건…”
쿵!
커다란 소음과 함께 어두운 공간을 막고 있던 한쪽 벽이 열렸다.
열린 벽에는 하얀 광채를 내뿜는 자그마한 로봇이 튀어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 대전식의 안내를 맡은 BESS입니다.
“비스스?”
모여있던 사람 중 누가 그렇게 말했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음 그럼 비스킷으로 부르도록 하자.
─이곳은 마왕의 성, 하펠론의 구조를 따라 만든 선별 공간입니다.
삐릭.
우리의 앞으로 홀로그램 형식의 맵 지도가 펼쳐졌다.
현재 위치와 층의 개수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지도.
‘얘기는 듣긴 했지만 아델리나가 열심히 준비하긴 했네.’
이런 기기들을 준비할 정도면 돈을 꽤나 쓴 모양이다.
─여러분은 앞으로 탑을 정복해 나갈때마다 지도의 가려진 부분이 채워질 것입니다.
─탑 곳곳에는 숨겨진 마수와 함정이 다수 존재합니다. 그로 인해 일정량의 대미지를 입으면 자동 탈락됩니다.
─이곳에서의 싸움은 합법이며 어떠한 피해를 입더라도 저희 쪽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만일 지금이라도 포기하실 분들은 저 문으로 나가주십시오.
덜컹!
로봇의 광채가 조금 움직이자 우리 뒤편으로 자그마한 문이 열렸다.
그러나 저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없군요. 추가 설명을 이어나가겠습니다.
─타워의 최상층에 도달하거나, 타워 곳곳에 숨겨진 합격 아이템을 사용하면 선별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선별 합격인원은 50명입니다.
비스킷이 몸채를 돌렸다.
─그럼 다들 무운을 빕니다.
“...”
“...”
비스킷이 사라진 자리.
적막이 잠시 맴돌고 이내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대부분이 자리를 떴다
남은 건 우리 둘뿐.
“저희도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전에.”
웅─
나는 지도를 켰다.
지급받은 지도가 아닌 하페루아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준비해둔 지도.
모든 정보와 위치가 전부 드러난 지도를 본 채림은 기겁하듯 놀랐다.
“쉽게 쉽게 가자고.”
나는 채림과 함께 58층, 보상의 방으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