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 8. 귀환 (5)
* * *
행성이 창조될 무렵, 아무것도 없던 터전에 네 명의 신묘한 존재가 있었다.
그들은 아주 작은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 행성을 가꿨고, 그저 존재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던 땅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땅과 불이 몸을 구르자 자연의 굴곡이 생겼고,
물이 손을 쓸자 굴곡이 만들어낸 빈자리에 바다가 생겼으며,
바람이 숨을 불어 내자 하늘을 뒤덮는 구름이 생겼다.
가꾸어진 땅에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해 행성을 더욱더 꽃피웠다.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본 신묘한 존재들은 그중 가장 인상 깊고 마음에 들은 생명의 육체를 본따 현계에 현신(??) 하여 살아갔다.
현신한 그들의 후손은 창조주의 이름을 딴 ‘정령’이라는 종족으로 불리며, 다른 생물들처럼 행성을 가꿔나가거나 힘을 보태주는 등, 행성에 이로운 일을 도맡아 해나갔다.
그리고 자신들의 힘으로 창조되지 않은 생명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곧 ‘분리’와 ‘새로운 정령왕’의 탄생이었다.
다윤이와 채림이를 찾아갈 생각이었지만 나서기 직전에 이미 나에게 찾아왔다.
다행히 우려했던 상황은 안 벌어진 것 같다.
그뒤로 우리는 곧바로 천공의 섬으로 향했다.
문에 들어서자 평소에 조용했던 섬이 아주 시끌벅적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모인 거라 거주하는 주민들도 잔뜩 신이 났나 보다.
나는 사람들에게 적당히 인사를 해준 뒤 다들 모여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흰색과 다윤 길드의 상징인 연푸른 색으로 적당히 디자인된 회의실.
그 안에는 기다란 탁자가 놓여있고 그 주위로 푹신푹신한 의자가 있었다.
“뭐야, 또 여자를 데려왔네.”
“뭘 또 데려와야.”
“데려온 거 맞구만.”
의자에 반쯤 눕듯이 앉아있는 베린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수련을 하기전 과는 느낌이 달라졌지만, 청안과 비슷한 푸른색의 목걸이와 양 허리에 차고 있는 검붉은 두 단검이 그가 베린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보다 너 키는 안자라니?”
“...육체가 이 나이때로 고정되서 그래. 그, 그 뭐야 분리도시 가서 환골탈테 할거니깐 좀만 기다려!”
“참.”
여전하네.
너무 애가 어두워진 것 같더니 꼭 그런 건 아닌가 보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한가운데 가장 높은 상석에 앉아있는 새하얀 머리카락과 여우귀, 그리고 북실한 여우 꼬리를 가진 여자아이.
새삼 보니 우리 길드에는 꼬마가 참 많다.
“이랑.”
“...아, 왔구나 김윤.”
토옥.
자리에서 내려온 이랑은 내 주위에 다윤과 채림을 이리저리 살폈다.
“...뭔 짓을 했나 했더니, 그랬구나?”
“그랬지.”
“???”
나와 이랑의 주어 없는 대화에 채림이 의문을 가졌다.
이 대화는 이랑의 눈이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진행되는 거니까.
물론 그래도 정확한 정보까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왜 잡았는데?”
“너무 나대는 거 같길래 조용히 하라고 맴매 좀 했지.”
“...”
이랑은 피식 웃었다.
고위신한테 맴매라.
이런 표현을 쓸 만한 존재는 행성에 열 명도 채 안 될 거다.
물론 그 열 명 중 절반이 이 안에 있다.
“흐응~ 그래그래, 우리 대장님이 다 뜻이 있으시겠지.”
“당연하지.”
“...이쪽은 그것 때문에 엄청 복잡해졌는데 말이야.”
가뜩이나 어드벤처 행성의 10%가량을 점령하던 오보로스가 반죽음 상태에 빠지면서 고위신의 회의는 아주 대혼란에 빠졌다.
이러다가 고위신 끼리의 전쟁이라도일어나는 게 아닌가 걱정이다.
이랑은 머리를 짚으며 물었다.
“악마 공주는?”
“몰라. 온다고 하는데 안 올 수도 있어.”
하페루아는 워낙 제멋대로라 1년간에 여정에서도 모습을 비췄다 안 비췄다를 반복했다.
이번에는 다 모인거라 올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마지막은…
“콜트.”
“...예.”
“넌…”
콜트를 보았다.
전보다 커진 체격과 왼팔에는 굉장한 마력이 느껴지는 강철 의수가 있었고, 그의 눈은 푸른색의 창들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옷은 도시의 시장님답게 딱 어울리는 비즈니스 적인 옷을 입고 있었다.
“왼팔은 어따 팔아먹고?”
“전에 보스몹 레이드 좀 하다가 날렸습니다. 그래서 기왕 복구하는 김에 새로 달았죠.”
“...?”
재생이라는 좋은 능력이 넘쳐나는데 굳이?
허나 변신로봇은 남자의 로망.
분명 저 의수는 언제든 기갑 슈트로 변화할 수 있는 장치일 것이기에 이해해 주기로 했다.
“그보다… 이젠 안드로이드라고 보기도 힘들겠네.”
콜트의 옆에 조용히 서있는 여성형 안드로이드.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지고 마법 공학적인 옷을 입은 로봇은, 한 눈에 봐도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언뜻 보면 단순히 욕망을 채우는 용도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대(?) 초월자용 병기, 베타.
콜트는 초월자의 영역에 들어서지 못했으나 청린과의 연구, 그리고 우리가 습득한 초월자의 힘의 원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어 초월자를 상대할 만한 힘을 갖추었다.
마왕은 초월자이기도 하니 저 정도면 과거 미르틱에서 보았던 대 마왕용 병기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근데 저걸 안드로이드로 만들었지.’
기왕 만드는 김에 트랜스X머 처럼 거대 로봇으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않은 게 참 아쉬웠다.
내 표정을 본 콜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초월자라는 힘은 특수한 능력이라 변신 로봇 같은 형태가 오히려 힘을 깎아먹습니다. 내구성이 문제가 있긴 해도 효과를 발하는 데 있어서 안드로이드 형태가 더 낫습니다.”
“근데 저건 네 욕망의 집합체잖아.”
“...”
“괜찮아. 뭐 원하면 뭔들 못하겠니.”
그 뒷감당은 네가 책임져야 하겠지만.
과연 저걸 홍린이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일지 너무 궁금했다.
“말하면 안 됩니다.”
“아~ 안 말해. 내가 그렇게 쩨쩨한 사람이 아니야.”
“진짜죠.”
“그럼!”
콜트를 계약으로 부리고 있긴 하지만 노예… 아니 동료의 사생활 정도는 지켜줄 수 있다.
일에도 도움이 되고.
“아! 대화가 길었지?”
“네? 아, 아뇨.”
김윤의 물음에 멀뚱멀뚱히 있던 채림은 손사래를 쳤다.
아무리 새로운 길드원이 되었지만 언뜻 들은 바로는 굉장히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고 들었다.
그런데 대화에 못 낀다고 간만의 재회를 깨뜨릴 정도로 채림은 눈치 없지 않았다.
‘다들 엄청 강해 보이기도 하고…’
처음에 길드장님, 그 다음에 다윤 언니를 보았을 때 둘이 독보적으로 강한 사람들이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흐음… 어려 보이네.”
“네가 더 어려 보여 베린.”
“윽! 너도 마찬가지거든 이랑!”
“흐응~ 난 일부로 어리게 만든 거지 얼마든 나이 들게 할 수 있어. 너같이 평생 꼬맹이로 남는 것과 다르게.”
“이게...”
“베타, 드리트리아는?”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아니었다.
길드원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했다.
능력도 너무 가지각색이었고 그동안 만났던 그 어떤 집단보다도 더욱 강력했다.
그 고위신이라고 불리는 것보다 훨씬 강한 이들이 무려 다섯…
“냥?”
아니, 여섯.
“이번 회의의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왔다냐.”
고양이의 상의… 가 아니라 진짜 고양이 귀잖아!
전과 달리 정체를 숨기지 않은 레빗이 기다란 화이트보드를 아공간 속에서 꺼내 모두가 바라보는 앞에 탁! 두었다.
그녀는 메이드복 대신 흰색의 와이셔츠에 안경을 끼고 치마를 입은 체 앞에 나섰다.
“어, 어?”
불이 꺼지고 어느새 시작된 회의.
모두가 자리에 앉아있자 멍청히 서있던 채림은 다윤의 손에 이끌려 옆자리의 푹신한 의자에 앉혀졌다.
너무 푹신해서 그대로 누워 잠도 잘 수 있을 것 같은 의자.
그러나 잠은 절대 자면 안 된다.
레빗이 허락을 구하듯 맨 뒷자리 가운데 있는 김윤에게 시선을 두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가를 받은 레빗은 기다란 막대를 소환해 화이트보드를 툭 건드렸다.
‘와아...’
그러자 가독성이 너무나도 뛰어난 글자와 지도, 그래프들이 떠올랐다.
“천공의 섬의 발전 현황이다냐.”
막대가 그래프와 지도를 가리킨다.
“조성 및 산업시설의 발전은 작년 대비 792% 상승했다냐. 보안과 자원 생산은 570% 상승 했고냥.”
“많이도 해놨네.”
“당연하지.”
“어차피 루아가 한거 아니야?”
“내가 한 게 루아가 한 거지.”
이랑과 김윤은 그리 대화를 나눴다.
발표(?)중에 사람을 놔두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눴지만, 정작 그 대상인 레빗은 아무런 불만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저런 대화가 즐거운 듯 그녀의 입꼬리가 쭈욱 올라가 있었다.
“다음은 장비와 골드 보유 상황이다냐.”
이번에는 막대가 수많은 장비들과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 정도의 많은 금액을 가리켰다.
‘아니 공이 몇개야…?’
“3성급 미만 레전드리 장비가 163개. 3성급 이상 레전드리 장비는 27개다냐. 그 외에 유니크 장비는 너무 많아서 10번 창고까지 다 박아뒀는데 이제는 너무 많아서 버리는 방안을 생각 중이다냐.”
“아공간에 넣으면 안 되나?”
“말을 정정한다냐. ‘필요’가 없어서 넣을 가치가 없다냐.”
베린의 물음에 레빗은 그리 말했고 다른 이들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채림은 의문을 넘어 황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유니크 장비를 버린다고?’
그간 창고에 넘쳐나는 레전드리 아이템을 많이 보긴 했다만 그래도 유니크의 값어치가 떨어진 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채림이 두르고 있는 것만 해도 값비싼 유니크 장비가 대다수였으니까.
대체 이곳은 얼마나 부자인 걸까?
아직 보지 못한게 너무 많았던 채림은 마나 조절됨에도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필요가 없다면 저희쪽에서 개발 재료로 사용해도 될까요?
손을 든 베타는 그리 말했다.
베타는 안드로이드이지만 고도의 인공지능과 초월자의 능력을 구현한 코드가 섞였기에 하나의 인격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말에 레빗의 시선이 다시 김윤에게 향하자 그는 여느때 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한다냐. 단, 5번 창고까지만 쓰고 네츠리 루아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유하고 사용하라냐.”
─알겠습니다. 레빗.
“...”
“다음은 길드에 쌓인 골드다냐. 이건 각 길드원들의 개인 자산, 은행 시스템에 넣지 않은 돈을 제외한 길드 자산이다냐.”
“...대박.”
처음으로 터져 나온 육성.
아까까지만 해도 자세히 확인할 수 없었던 금액이 한눈에 들어왔다.
“골드는 총 780,096,231,811. 대략 780억 골드다냐.”
“많이 줄었네.”
“작년 대비 그리 줄지는 않았다냐. 화폐 인플레이션의 방지를 위해 돈은 최대한 풀지 않는 것으로…”
“...”
여긴 도대체 뭐 하는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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