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 10. 이루어질 수 없는 (2)
* * *
정령 도시, 리벤디아에는 네 방향으로 나누어진 정령왕들의 개인 영역이 존재한다.
남쪽의 ‘정원’
서쪽의 ‘협곡’
동쪽의 ‘태산’
그리고 물의 정령왕, 아리아가 다스리는 북쪽의 ‘바다’가 있다.
“...그래서.”
“...”
“…”
[...]
바다 깊은 곳, 색이 희미하게 비치는 유리로 만들어진 곳에 푸른 머릿결을 가진 미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자는 옅은 자색 빛이 인상적인 진주로 만들어졌으며, 그 주위로는 흰 청색의 기둥이 신전처럼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서로 다른 종족을 가진 세 존재가 무릎을 꿇은 체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들은 어째서 제 영역에 침입한 건가요.”
“아… 침입은 아니고… 실수인데…”
무릎을 꿇은 체 머리를 긁적이는 채림은 정말로 억울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녀는 정말 억울했다.
길드장님의 말대로 바람의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계약을 완료했다.
이에 님님이와 용용이도 잘 했다며 칭찬해 주었고, 새롭게 합류한 바람의 정령인 ‘령령이’의 능력을 써보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쓰자마자 정신이 나가더니, 다시 정신을 차리니깐 바닷속에 푸른 밧줄로 온몸이 묶인 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님님이의 말로는 님님이와 용용이. 둘의 능력과 령령이의 능력이 더해져 ‘바람’에 관해 마나가 급속도로 증폭된 탓에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바람’을 제어하지 못한 채림은 정신이 나간 체 이곳으로 날아왔다고…
“...죄송합니다!! 제가 그 실수를… 해서… 힘을 제어하지 못해서…”
채림은 횡설수설했다.
정신을 차린지 좀 됐지만 아직 머리가 어지럽기도 했고, 가뜩이나 길드의 일원으로서 다 같이 진행하는 첫 임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똑같은 실수로 망쳐버렸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하얘졌다.
더군다나 다윤 길드의 일원으로서 루아와 대화를 제법 나눴던 채림은 이번 일에 꽤나 많은 자원과 인력이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단순히 1회성에 불과한 ‘소모품’들은 억 소리가 나올정도의 금액이 들어갔고,
지원받은 장비만 해도 어지간한 길드의 랭커들도 못 구하는 장비를 둘둘 두르고 있다.
지금 당장 채림에게 주어진 것만 해도 몇억은 그냥 웃돌 것이다.
‘안돼…!’
그런데 이 일이 자기 때문에 망가진다면 실망하며 전처럼 내쫓을지도 모른다.
다들 거의 처음부터 인연이 있었던 기존의 길드원과 달리, 채림은 이제 막 합류한 신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내가 수습해야 해.’
이미 일어난 일.
어떻게든 수습한다.
채림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든 순간.
밧줄을 걸래짝마냥 찢어버린 용용이가 기세를 내뿜으며 아리아를 노려봤다.
“요, 용용아?”
[...요즘 들어 너무 무시당하는 것 같단 말이지.]
콰득!
용용이의 크기가 거대해지고 날개가 쫘악─ 펴지자 바닷속 궁전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거대한 용이 강한 기세를 내뿜었지만 아리아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음? 칩입의 사유가 저를 해치기 위함이라고 봐도 될까요?”
[그런건 상관없다. 단지 내 존재 이유에 대한 규율을 지키기 위해서다.]
「▼공유 」
용용이의 거대한 앞발이 그녀를 덮기 위해 허공에 뜬다.
“규율이라… 왠지 비슷한 느낌이 드네요.”
타악.
여리한 손이 용의 거대한 앞발을 잡는다.
아니, 잡았다기보다는 그저 대었다의 가까운 정도.
[...!]
하지만 그 거체의 무게를 막기에는 충분했다.
그녀의 손끝으로 주위에 널린 바다의 물이 출렁거린다.
마치 노래하듯 울려 퍼지는 물의 흐름에 이변을 느낀 용용이는 그 즉시 아리아를 짓누르기 위해 발에 무게를 늘렸다.
쿠드득─!
더욱더 거세진 무게와 힘이 그녀를 압박하지만 아리아의 표정은 이전과 똑같았다.
그녀의 손끝에 거대한 물의 고리가 생기더니 용용이의 발을 그대로 찢어버렸다.
허공에 튀기는 검붉은 피.
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거대한 용의 거체를 바다 저 너머로 날려보냈다.
콰가가가가가!!!
쿠르륵…
거체가 지나간 자리를 메꾸듯 다시금 물이 차자 평온한 상태의 바다로 돌아왔다.
“...이제보니 전에 온 두 명과 같은 뜻을 지닌 자들이겠군요.”
‘둘?’
그러고 보니 먼저 온 선배 길드원 분들이 있었는데…
설마 실패하고 잡힌 건가?
“...”
그렇게 생각하자 심장이 더 두근거린다.
먼저 실패한 두 사람.
이제 막 신입으로 들어온 길드원의 실수.
가진 것을 모두 잃고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
악제만이 가득한 상황 같지만 반대로 이걸 해결하면 최고의 상황이기도 하다.
선배들도 구하고, 목적인 물의 정령왕 아리아도 이긴다면.
“...후우.”
정신을 잃어서 사고를 치고.
정신을 잃어서 사고를 수습할 생각을 하다니.
‘님님아.’
‘위험한 것 입니닷…! 이대로 피하는 것을...!’
‘보조 좀 해줘.’
‘안됩니닷…! 우선은 빠져서 용용이님과 함께 피신을 해야 합니닷…!’
채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상대는 그 유명한 물의 정령들의 왕이자 초월인지 뭔가를 했다는 엄청나게 쌘 강자.
무려 드래곤인 용용이를 고작 한 손으로 날려버렸다.
하지만…
“진다는 소리는 아니지!”
“...어리석군요. 방금 상황을 보지 못했나요?”
뚜벅.
아리아의 발이 한 발자국 다가서자 바다 전체가 짓누르듯이 채림을 압박했다.
채림은 마력 제어기를 살짝 풀어 짓누르는 기력을 조금 흡수했다.
“흐아…”
“...?”
“흐읏!?”
너무 많이 풀었네.
풀석.
채림의 다리가 풀리고 마나의 흐름이 급속도로 변한다.
“아, 망했─]
쿠르르르륵─!
‘바다’가 요동치듯 흔들린다. 채림을 중심으로 거대한 파도가 형성되고, 그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정령들과 해양생물이 급류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무슨 짓을...!?”
아리아는 무언가를 저지르는 침입자를 막기위해 물의 고리를 사슬처럼 변형해 내질렀다.
맹렬하게 쏘아진 사슬은 채림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고 그대로 흡수된다.
「▲▲─ 」
[흐에?]
눈을 뻔쩍 뜬 채림은 어느새 아리아의 모습처럼 푸른색에 가까운 머리카락과 청안으로 변화했다.
무의식적으로 소환한 네르토르의 삼지창을 쥐어들자 ‘바다’는 같은 기운을 가진 두 명의 주인을 구분하지 못했다.
[이 무슨…?!]
위험을 감지한 아리아는 힘의 일부를 개방해 상대를 노려본다.
삼지창을 쥐어든 그녀는 마치 물의 신(?)과도 같았다.
문제는.
[수으으으...]
[...?]
[수으으으과아아아앙...]
그녀의 능력은 물만 있는 게 아니었다.
파직.
[수광천뢰(?光?雪).]
저 머나먼 차원 너머에서 비롯된 빛이 그대로 ‘바다’로 내려오더니 바다 전체 전류로 물들였다.
[꺄아아아아아악!!!]
바다 전체를 증발하려는 듯이 막대한 전류가 ‘바다’의 영역을 잠식한다.
막을 수 없다 판단한 아리아는 급히 바다 밖으로 뛰쳐나왔다.
파드드드드드득─!!
[...미쳤군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전류로 이루어진 바다 같았다.
물대신 전류가 흐르는 바다.
[으읏...]
그녀는 덜덜 떨리는 팔을 보았다. 새까맣게 탄 왼팔.
잠시나마 막아내려 했던 것이 이런 상처로 남았다.
만일 계속 막아내려 했다면 필시 죽었으리라.
“아.”
풀렸다.
신격화(??化)가 풀렸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다.
본래의 힘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그릇’이 엉망이거나,
아니면 그 힘을 구성하는 격(?)을 상실했거나.
아마…
“후자겠지.”
그릇은 멀쩡하다.
남은 건 자신의 힘까지 몽땅 흡수해내고 자신의 영역인 ‘바다’를 지배하에 둔 저 어린 인간.
“...정령왕의 이름까지 흡수한 건 처음 보는데.”
이만한 능력을 사용하는 데에 리스크가 없을 리가 없다.
아마도 시간제한 같은 게 있겠지.
파드드득!!
‘...스치기만 해도 죽겠지.’
지금의 아리아는 ‘물의 정령왕’이 아니다.
그저 오랜 시간을 살아, 많은 격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가진 생명체 일뿐.
아마도 이곳에서 죽는다면 필시 부활하지 못하리라.
게다가 이대로 가만히 있다면 그 녀석이 나를 어떻게 할지도 모른다.
아리아는 전류로 된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간신히 남은 힘을 짜내 공간을 열고 탈출했다.
.
.
.
─대(?) 초월자 전용 모드 수정…
─이상 감지. 위험 저항 프로토콜 실행…
─광자 에너지 흡수 시작…
─에너지 저장률 (100 / 297%)...
─에너지 저장률 (100 / 451%)...
─에너지 저장률 (100 / 829%)...
“그쪽이 불의 정령왕?”
이랑과 다윤은 무려 5일간의 탐색 끝에 이그네아를 만날 수 있었다.
꽤나 준수한 체격과 불같이 타오를 것 같은 머리. 그리고 붉은 눈.
딱 봐도 불의 정령왕처럼 생긴 외형이었다.
[그쪽이 시험을 받으러온 외부인이지?]
“네.”
“어.”
이그네아는 자신을 찾아온 둘을 힐끔 보았다.
한 명은 달빛을 닮은 검사.
꽤나 깊은 기력이 느껴지는 게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꽤나 고생을 할만한 수준이었다.
특히 하나같이 고위신들의 이름이 덕지덕지 붙은 무구들로 무장하고 있는 것이, 그녀가 꽤나 높은 수준의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넌… 이린의 자식이구나.]
“맞아.”
정령왕인 자신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온 몇 안 되는 행성의 고위신, 이린.
과거 행성의 30%를 지배하에 두었던 그녀의 위엄은 정령왕조차 의식할 정도의 강자였었다.
[이린은 뭐하고 지내나?]
“별일 없어. 그냥 계시지.”
이랑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과거에는 이린과 같은 시대를 살아온 신들에게 존대를 했지만 현재 이랑은 ‘이린’의 대행을 하고 있는 상황.
따라서 존대를 할 이유가 없었다.
[흐음… 역시 제 어미를 닮았군.]
이그네아의 중얼거림에 이랑은 별 반응 없이 수긍했다.
엄마를 닮았다는 것은 좋은 의미니까.
“저희는 시험을 받으러 왔어요.”
다윤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불의 정령왕님의 시험을 받을 수 있을까요?”
[시험? 그래. 주지.]
“?”
“?”
이그네아의 너무나도 당연한 말에 다윤과 이랑은 의문을 느꼈다.
아무리 힘들게 찾긴 했지만 이렇게 바로 준다고?
[어디 보자… 너희 둘은 통과야.]
“네?!”
[뭘 그리 봐. 나를 찾은 것만 해도 대단한 거지.]
“???”
이, 이렇게 쉬운 거였나?
다윤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그네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보상은...]
“...”
[그쪽이 받을 거지?]
이그네아가 고개를 돌린 곳.
그곳에는 김윤과 그 일행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재밌네.”
김윤은 피식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