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화 〉 14. 거짓된 존재 (8)
* * *
그라티아의 변화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18번째 부활 이후 그라티아의 이면은 서서히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그 수가 30번째가 넘어가자 육체의 3할가량은 빛으로 물들 정도로 변했다.
타락한 그라티아는 그라티아의 능력의 부작용과 제라드의 마기가 합쳐져 탄생한 생명.
말 그대로 그라티아의 숨겨진 이면이라는 존재는 항상 신성한 빛을 가진 ‘진짜’ 그라티아와는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가짜는 서서히 진짜가 되고, 진짜는 점점 가짜로 변질되고 있다.
[크읏?!]
이대로 둔다면 둘의 위치가 완전히 변하는 상황.
그라티아의 축복을 받아야 하는 나로서는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이야기다.
‘진짜’가 된 가짜 그라티아에게 받으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들어가라.’
하나는 고위신의 자격을 가진 행성 내의 얼마 안 되는 초월자.
다른 하나는 몬스터의 굴레를 가진 월드 보스.
그중 내가 원하는 건 초월자의 자격을 가진 그라티아다.
초월자의 힘 자체는 일정 수준 이상의 영혼과 육체만 있다면 충분히 전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자격’은 아니다.
스스로 초월해 고유 능력을 일깨우는 건 오로지 본인의 힘으로 터득해야 한다.
가짜가 아무리 진짜의 능력을 가진다 한들, 진짜가 될 수 없는 노릇이다.
‘그걸 녀석도 알고 있겠지.’
파지직!!
알고 있으니 가짜를 진짜로 만드는 대신 날 선택한 거다.
이미 반 초월자를 뛰어넘은 내가 진짜 그라티아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
그 증거로 그라티아의 이면은 더 이상 빛으로 변하지 않고 진짜 그라티아의 빛은 계속해서 내 쪽으로 흘러들어오고 있다.
[무, 무슨 짓을…!]
“나한테 감사해라. 그라티아.”
[뭐?]
“나중에 축복 좀 빵빵하게 넣어주고.”
심장에 꽂힌 그라티아의 장검에 의해 잠시 이성을 되찾은 그녀를 향해 검을 완전히 쑤셔 넣었다.
「▲성역 」
파드드드드득!!
성역의 파편이 깃든 검이 그녀의 불안정한 힘을 메꾼다.
「▼공유 」
그와 동시에 검을 통해 정보가 들어온다.
현재 나누어진 그라티아의 힘은 총 7개.
그중 네 개는 도시, 나머지 세 개는 각각 장검, 환각, 심장 속에 있다.
‘뭔 자신이 있길래 이렇게 힘을 분배했지?’
초월자의 힘은 마구잡이로 뿌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든 힘이 그렇듯 총량이 있는 법이고 그것은 ‘초월’의 격을 넘은 초월자에게도 해당된다.
나 역시 하페루아를 통해 쓰는 공유나 저장 같은 능력을 맘대로 사용할 수 없다.
애초에 이 힘들은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초월자가 가지고 온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당연히 본체의 능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
그런데 그라티아는 자신의 모든 힘을 7개로 나누어 뿌렸다.
물론 자신의 심장에 깃든 파편이 가장 크긴 하지만 아무리 힘을 나누어 주더라도 절반가량은 가지고 있는 게 정상적이다.
그러나 그라티아가 현재 가지고 있는 힘의 총량은 고작 3할 정도.
그것도 간신히 장검을 꽂아 넣어 복구시킨 게 그 정도다.
‘힘이 빠져나간다. 이미 도시에서 파편을 이용해 뭔가 하고 있어서 그런거 겠지.’
점점 더 내 쪽으로 성역의 힘이 차오른다.
파편을 그라티아쪽으로 돌려보냈음에도 그게 뭐가 상관이냐는듯이 계속해서 들어온다.
나는 그것들을 공유를 통해 다시 그녀에게 흘려보냈다.
파편의 조각들이 서서히 채워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라티아를 보고 말했다.
“무슨 생각으로 파편을 나눈 거냐.”
[......히딘은 도시에 있나?]
“그래. 네 부하들 중 하나인 거 같은데. 함부로 능력을 나누어 주면 쓰나.”
[면목이 없구나...]
꾸역꾸역 차오르던 어둠을 막아낸 그라티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라티아는 그제야 나누어진 파편들의 정보를 받기 위해 능력을 사용했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두 개… 말고는 파악이 안되는구나. 용사여. 혹시 그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나. 사례는 일이 끝나면 섭섭지 않게 해주겠다. 원한다면 나의 사도로 임명─]
“사도는 됐고. 그리고 사도 때문에 이 난리가 났는데 뭔.”
[...뭐라 변명할 여지가 없구나.]
그녀는 허탈한 웃음을 내지었다.
단순히 힘만 내주면 알아서 따를 거라고 믿었는데 정작 저리 배신당했으니까.
하지만 후회한 체 가만히 있는다고 달라질 건 없다.
그라티아의 날개가 펄럭였다.
금방이라도 날아가 배신자들을 짓눌러 버릴 생각.
나는 그녀를 멈춰세웠다.
[왜 그러지? 혹시 대가를 미리 주길 원하나? 하지만 지금 받는 것보다 모든 일이 끝나고 받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고. 무턱대고 가다 너 죽어.”
[뭐?]
살짝 기분이 상한듯한 그라티아가 날 노려봤다.
비록 힘이 쪼개졌다지만 그녀의 육신과 영혼의 격은 이미 1등위에 달한 수준.
제 아무리 파편을 가지고 있다 한들 반 초월자 정도야 어렵지 않게 이겨낼 수 있다.
나는 빈 허공을 툭툭 건드렸다.
와자작! 하늘이 유리처럼 깨지고 그 너머로는 불타오르는 밤하늘의 홀리에린이 보였다.
수많은 빛과 어둠의 기둥들이 별처럼 땅으로 추락했다.
[도시가..?!]
“지금 도시를 기반으로 뭔가를 벌이고 있다. 아마도 미노아인지 미누아인지 하는 녀석이겠지.”
[......]
그라티아는 제법 충격을 먹은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말을 이었다.
“지금 도시는 이미 장악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주인 자체가 바뀌었을지도 모르지. 지금 그 상태로 갔다가 제라드 때처럼 제대로 접근도 하지 못할 거다.”
지금의 그라티아는 훨씬 약하니 접근하자마자 그대로 녹아내릴지도.
그녀는 내 말에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다 문득 나를 돌아봤다.
[네, 네가 도와주면 되지 않느냐! 너는 나의 이면을 잡아내고, 내 날개를 절단한 저 여자보다 훨씬 강한 네가 도와준다면...]
“아, 나는 못 도와줘.”
[뭐?]
“다 썼거든.”
그녀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이다.
방금 전 그라티아 장검을 꽂아 넣음으로써 현재 쓸 수 있는 모든 특이점을 다 사용했다.
이 이상은 불가능하다.
원래는 항상 여유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반지가 안 나오고 장검으로 파편을 옮기는 게 꽤나 많은 코스트를 소모했다.
정말 바닥까지 긁어모아 사용한 거라 초월자의 힘은 고수하고 정보창도 4번이 한계다.
“이미 검을 비롯해 파편까지 꽂아 준 것만으로 충분하지.”
[그럼 네 동료들이라도...]
“다윤이는 환각에 가서 할 일이 있어.”
특이점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유일하게 차원의 벽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은 다윤이 밖에 없다.
네메린느는 불가능 한건 아니지만 본신으로 온게 아닌 위령인 계약 상태이기에 차원을 가를 만큼에 힘은 있지 않다.
히아트는 애초에 검이라 내가 쓰지 않으면 혼자서 가를 수 없고.
다윤은 환각으로 넘어가 파편을 가진 크렉을 데려와야 한다.
[그럼 정령왕이라도...]
[난 안된다. 그라티아.]
네메린느는 녹색의 눈을 번뜩이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난 계약자에 묶인 몸. 위령 상태기에 너의 싸움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네.]
[정령왕인 너라면 가능하지 않나? 네가 굳이 싸우지 않더라도 정령들의 도움을 받으면...]
[정령들은 리벤디아 내에 있지 않으면 힘이 쭉 빠진다. 와봤자 고기 방패만 될 뿐이지.]
리벤디아의 정령과 바깥 차원의 정령의 수준은 차원을 달리하니까.
친구나 가족 같은 사이는 아니지만 같은 시간대를 살아온 네메린느의 차가운 태도를 본 그라티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뭘 어떡하라는 거냐.]
“흐음…”
나는 깨진 하늘 속 홀리에린을 바라보았다.
불타오르는 도시 중앙에는 거대한 백의 나무가 눈에 보일 정도로 쑥쑥 자라나고 있다.
어느새 그라티아의 거체 보다도 거대해진 나무는 더 이상 나무라 부르기 힘들 정도로 그 크기가 커졌다.
‘...나무가 아니라 산이라고 봐도 되겠네.’
신성한 나무, 이그드라실은 도시의 절반을 잡아먹었다.
아직 판테움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곧 판테움도 나무에 먹힐게 분명했다.
“굳이 상대 입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
[뭐?]
나는 피식 웃었다.
“오게 만들면 되지.”
“흐음…?”
이그드라실의 중앙.
신의 아이, 히딘의 몸속에 깃든 씨앗의 힘을 조금씩 빼내던 미누아는 표정을 찌푸렸다.
미누아는 효율적이고 빠른 속도로 일을 진행해야 했기에 몸을 세 개로 나누었다.
하나는 환각 속 크렉의 파편 회수.
다른 하나는 판테움쪽과 둥지의 파편 회수.
본체는 이그드라실에서 분신들을 통제하며 힘을 받아오고 있었다.
내가 알아서 합니다. 미누아.
...나도 내가 알아서 해. 미누아.
‘...말을 안 듣는군요.’
문제는 분신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초월의 격을 가지지 않은 미누아는 수많은 파편의 힘을 통제할 수 없었고, 그것에 대한 대비책으로 몸을 분리시켰다.
하나가 안된다면 여럿으로 그 힘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문제는 몸만 나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어쩔 수 없이 정신까지 나눈 것이 화가 되었다.
어차피 크렉이 도시의 힘만 계속 쓰면 되는 부분 아닙니까?
얘네 둘이 싸움이 끝나야 개입하든 하지.
“...알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파편들을 회수해 와주세요.”
네.
응.
쯧.
미누아를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역시 예상대로 용사는 신격화를 거부했다.
당연할 거라 생각했다.
용사는 여신의 사도이고 이 자격을 받는다는 것은 곧 여신에 대한 배반이니까.
하지만 미누아는 단순히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확신했다.
그에게는 여신에 대한 믿음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당신이 원치 않아도, 당신의 저의 신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하기로 정했으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