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 14. 거짓된 존재 (9)
* * *
눈을 떴다.
작은 씨앗에서 시작된 생명은 150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걸쳐 눈을 떴다.
자그마한 손발을 꼼지락거렸다.
낯선 감각. 동시에 익숙하기도 하다.
부스럭거림에 눈앞에 수그려 앉아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미누아. 깨어났구나.’
베덴디스.
최초로 마주한 사람.
자신의 아버지이자 나를 기나긴 시간 동안 키워낸 존재.
그렇게 나는 깨어나 새로운 세상을 두 눈으로 보았다.
20년이 지났다.
세상은 평화롭다.
가끔씩 열흘에 한번 마수들이 쳐들어 오긴 하나 그들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본인이 나서지 않더라도 금방 처리될 저급한 존재들.
자신은 주술을 사용하는 사제들이라는 이들을 이끌며 도시를 수호했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
위대한 영웅의 자식으로 태어나 그분의 역할을 이어나가는 것.
어쩌면 당연하고, 또 옳은 일이었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슴속 공허함이 느껴졌다.
무언가 맞지 않음에 격통을 겪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크렉을 만나고 도시의 대리자이자 그의 양부모인 루소니아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베덴디스와도 얘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들 역시 이 공허함의 원인과 해결책을 알려주지 못했다.
베덴디스는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분의 말은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30년이 더 흘렀다.
공허함은 더더욱 커졌다.
위대한 신, 그라티아님을 향한 믿음이 흐려진다.
어째서 일까.
‘용사가 왔다더구나. 한번 확인해 보지 않으련?’
혼란스럽던 와중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용사가 왔다는 소식을.
용사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다.
기이할 정도로 차고 넘치는 여신의 사도들 .
그다지 강하지 않은 힘.
문제를 일으키고 오만한 사고방식.
평소라면 거들떠도 안 볼 불경한 자들.
미누아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용사들을 마주하러 갔다.
자신의 기준의 미치지 못한다면 대충 안내만 해준 뒤 바로 떠나리라.
가뜩이나 머리도 복잡한데 사소한 일 따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안녕?”
하지만 미누아는 결코 대충 안내해 줄 수 없었다.
그를 보고 깨달았기에.
‘위대한 자.’
마침내 공허함을 메꿀 존재를 찾아냈다고.
“하아…”
너무 많은 시간을 기다렸다.
그를 보고 에레의 실체를 알았고,
그를 보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달았으며,
그를 보고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었다.
“어머니.”
비록 직접 해내진 못하시겠지만, 뜻은 이뤄드리겠습니다.
미누아의 지팡이가 허공을 떠올랐다.
주술의 영웅이자 자신의 창조주인 에레가 원한 것은 영웅을 억압하던 굴레의 해방이다.
‘신의 부속품에서 벗어나 하나의 온전한 주체성을 가지는 것.’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신의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신의 격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영역을 가지게 되면 주체성을 확실시 해지니까.
하지만 신의 자리는 쉽게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인 영물들을 보자면 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짧게는 삼천년, 길면 만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
예외가 있다면 로루닌의 ‘신의 의식’ 정도.
허나 영물이 아닌 이상 그 의식을 받을 수 없으니 논외로 두어야 한다.
인간은 그만한 시간을 보낼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성역 」
내로라하는 자연신, 고위신보다도 높은 수준의 격을 가진.
‘초월자’라고 불리는 존재.
신보다도 위대하며 더 이상 하나의 행성, 차원에 그치지 않고 다른 차원 너머로 향할 ‘자격’을 시험받는 자들.
에레는 그 힘을 이용하기로 했다.
「▲성역 」
「▼초월 」
그라티아의 ‘성역’과 제라드 ‘초월’을 이용해 육체를 구성했다.
두 초월자의 힘으로 어지간한 수준의 힘을 담을 뛰어난 ‘그릇’을 만들었다.
그 그릇을 온전히 차지하기 위해 주술의 힘과 자신을 닮은 육체의 모습을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주체가 될 성역의 씨앗을 인고의 시간 동안 피워내 그릇을 더욱더 튼튼히 피워낸다.
“하아… 좋군요.”
계획대로라면 50년전, 그날에 눈을 떠야 할 건 미누아가 아닌 에레였다.
크렉과 달리 미누아는 그저 150년 동안 씨앗을 자라나게 할 나무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제라드가 죽고 그라티아의 성역이 불완전 해지면서 변수가 발생했다.
그 둘의 힘으로 유지되던 주술의 보안이 약해지고 그 과정에서 베덴디스의 개입이 먹혀들었다.
결국 에레는 육체를 차지하지 못했다.
“뭐…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는 없었을 몸이니…”
“큭…”
미누아는 싸늘한 눈으로 잔뜩 망가진 크렉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에레는 사라졌다지만 미누아는 에레를 본따 만든 생명.
완전히 똑같지 않을지언정 적어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같았다.
화려한 신성을 내뿜는 그녀는 허공을 걸어 크렉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보니 어릴 적 당신과 놀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당신은 큰 육체를 이용해 항상 작은 저를 괴롭혔죠. 항상 저는 울고, 당신은 땀을 뻘뻘 흘리다 베덴디스님께 혼이 나셨죠.”
“...미안하게 됐군.”
“물론 그것 때문에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건 아닙니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두 가지의 말투를 떠올리며 그녀는 쿡쿡 웃었다.
정신을 세 개로 나누었기에 기억 역시 3할 정도만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렇게 확실하지 않은 기억은 본체와 다른 분신을 통해 전달받을 수 있었다.
「▼성역 」
‘...다른 분신이 쓰고 있군요.’
미누아는 순식간에 줄어든 힘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다 이내 손을 내렸다.
자신의 힘은 오로지 본체를 통해 발현되기에 힘을 쓸데도 전달받아 사용해야 했다.
씨앗을 가진 크렉을 상대하기 위해 본체 대부분의 능력을 끌어와 사용했지만, 이미 전투 불능을 만들었으니 더 이상 필요할 일은 없을 거다.
이미 씨앗도 회수했으니까.
미누아는 자신의 손으로 스며드는 ‘판테움’의 씨앗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난 당신이 이해 가지 않습니다.”
“...나도 네가 이해 안가. 이렇게 한순간에 다른 사람이 됐다는 게.”
“난 똑같습니다. 크렉.”
미누아는 쪼그려 앉아 크렉의 눈을 바라봤다.
“당신은 도시를 위해, 그저 부품으로 태어난 생명입니다. 당신의 충성심과 믿음은 본인의 사고를 통해 발생한 것이 아닌 만들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
“당신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어야 했습니다. 분신 하나는 당신의 구제를 거절하고 있으나 본체와 제가 당신의 구제를 원했습니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었으니까요.”
필요에 의해 탄생한 본인과 달리, 말 그대로 도시의 부품을 위해 탄생한 존재.
원대한 목표도, 누군가를 위한 껍데기도 아닌 정말 부품으로서의 역할.
미누아는 그런 크렉에게서 동질감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때문에 그를 구제해 주기로 결정했었다.
위대한 존재의 탄생 과정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자격과 그분을 따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허나 그는 격렬히 거부했다.
“어째서입니까?”
“...나는 오랫동안 그분을 모셨다.”
“네, ‘병정’으로서의 역할로요.”
“끝까지 들어. 기억을 되찾기 전에는 진심으로 크리드아님의 아들이자 루소니아님의 양아들로서 도시를 수호했다. 그게 맞는 일이었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다.”
크렉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주체가 되는 씨앗이 빠져나갔기에 생명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그는 머지않아 죽을 것이다.
허나 크렉은 웃었다.
“하지만 기억을 되찾고 나니 회의감이 들었지. 나는 정말로 영웅을 대체할 ‘병기’로서 태어난 거라고. 영웅의 아들 같은 게 아니었다고.”
“그럼 어찌…”
“하지만 루소니아님의 마음은 진심이셨다.”
웃음은 더욱 커졌다.
그와 반대로 미누아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다.
“그분이 진실을 알고 있든 알고 있지 않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분의 자식으로서 50년의 생을 보냈고, 그것에 만족한다.”
“......”
“이제 와서 모든 걸 알았다고 그분을 배신하는 건 있을 수 없지. 너도 그렇지 않나? 너에게도 아버지 같은 베덴디스님이 있을 텐데.”
“......”
“물론 나와 달리 베덴디스님은 진실을 알고 계셨지. 허나 너를 생각하는 마음은 진ㅉ─”
콰아아앙!!!
크렉이 얼굴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백의로 표정을 감춘 미누아는 바들거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뚫린 입이라고 멋대로 지껄이는군요. 난 너와 다릅니다.”
“...”
“초월이라는 신보다 위대한 힘을 지녔음에도, 당신은 여전히 인간과 다를 바가 없군요.”
“...우리… 의 주체는… 인간이다. 강한 힘을… 지녔다고… 신이되는게 아니야.”
“어리석어.”
어리석다.
무지하기 짝이 없다.
그저 주는 대로 받아먹기만 하며 뭐가 진짜인지 모르는 무지한 인간.
초월의 힘은 단순히 신 ‘따위’의 능력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 정도는 손가락만 까딱여도 찢어발길 수 있는 능력.
그라티아는 이만한 힘을 가지고도 힘의 반의반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 안일했고, 또 무지했다.
“아! 그렇군요. 또 똑같은 길을 번복할까 봐 그러는 거죠? 걱정 마세요. 위대한 분은 그런 저급한 그라티아와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분입니다. 그분은 새로운 빛으로 우리에게 온전한 자리와 자격을 선사…”
“윤 씨는 그런 거 안 해줄 텐데.”
서늘한 기운을 닮은 말에 오싹한 느낌이 들어 그 즉시 고개를 돌렸다.
하나의 달을 삼킨듯한 인영 하나가 차원의 벽을 뚫고 자신의 옆으로 살포시 내려왔다.
다윤이라 불리는 용사는 웃으며 말했다.
“윤 씨는 자격 없는 힘을 내어주지 않아요. 그러니 그만 포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럴리가요. 그분은 세 개의 빛을 모두 통제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런 분에게 그 정도 자격을 내주는 건 일도 아닙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자격은 스스로 얻어야 하는거에요.”
촤악!
“멋대로 얻었다간 통제하지 못하고 죽어버릴테니까요.”
씨앗을 회수한 다윤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몇번이나 죽을뻔 했던 자신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