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 14. 거짓된 존재 (10)
* * *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고 파열음을 낸다.
빠른 속도로 적을 꿰뚫으려는 레이피어는 허공에서 튀어나오는 흑색의 단검에 의해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그에 레이피어를 잡고 있던 루소니아 역시 튕겨져 허공을 날았다.
‘단검이 무슨 무게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튀어나오는 흑색의 단검은 매우 얇았다.
저걸 들어보면 무게가 느껴질까? 정도의 수준.
그런데 단검에 닿기만 해도 천근의 바위를 부딪친 것 마냥 레이피어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흐음… 이렇게 하는 게 맞아?”
이제껏 묵묵히 공격에 임하던 용사가 입을 열었다.
격하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전혀 영향받지 않는다는 듯 어깨에 앉아있던 정령은 고개를 까딱였다.
“부족하긴 한데… 나쁘진 않아.”
“좋다는 뜻이야?”
“쓸만하다는 거지.”
“...”
강하다.
마치 200년 전 미면의 7~9층에서 만난 악마를 상대하는 기분이다.
아니, 그보다 더했다.
지금의 루소니아는 과거보다 훨씬 강해졌다.
수련도 꾸준히 해왔고 죽음을 맞이한 영웅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씨앗이라 불리는 그분의 파편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강해졌음에도 손 하나 써보지 못하고 밀리고 있다.
악마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어둠과 격에 오싹함을 느꼈다.
“오해를 풀기는 힘들 것 같고… 그냥 빨리 끝내줄─”
「▲성역 」
투쾅!
“미누아?”
“...?”
루소니아는 둘 사이를 뚫고 갑작스레 튀어나온 미누아를 보았다.
뭔가 평소랑은 다른 느낌에 이질감을 느꼈으나 이내 결정을 내리듯 다시 용사에게 집중했다.
“잘 됐어. 당장 저 타락한 용사를 막아야 해. 내가 앞에 설 테니깐 네가 주술로 보조를...”
“그럴 필요가 있어?”
“뭐?”
루소니아는 귀를 의심했다.
미누아가 반말이라니.
상대를 항상 존중하며 상대가 5살도 안되는 어린아이더라도 존대를 하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어째서 저런 건방진 말투를 쓴단 말인가.
미누아의 손은 어느새 루소니아의 심장을 꿰뚫었다.
“커억…”
“참, 그라티아도 취향이 악랄하다니까.”
쿵!
“씨앗을 심장에 심어두면 안 죽이고는 빼낼 수 없잖아?”
후~ 생각보다 너무 약해졌잖아? 내가 강한 건가?
미누아는 흥얼거리며 씨앗이 깃든 심장을 통째로 씹어 삼켰다.
빛의 사제라고도 불리는 존재라기에는 너무나도 사악한 모습.
베린은 인상을 찌푸리며 단검을 쏘아보냈다.
“흐흥~ 그쪽도 초월을 한 용사네.”
파박! 흑색의 단검은 판테움의 땅을 뚫고 올라온 백의 뿌리에 붙잡혔다.
치이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뿌리가 녹아내렸지만 상관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솟아내 단검을 붙잡으려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검은 완전히 활동을 멈추었다.
피를 잔뜩 뒤집어쓴 미누아는 큭큭 웃었다.
그 모습에 베린은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징벌’을 할 이유와 명분이 있는가.
과거 수련 대신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용사들을 잡았다.
항상 정확한 정보를 받고 징벌하기로 마음을 먹었음에도 직접 마주해 대상을 한 번 더 판단했다.
정보를 알아오는 데 있어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네츠리 루아.
그런 그녀의 정보는 대부분 맞았고 실제로 마주한 모든 이들 역시 자신의 죄를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베린은 늘 당사자를 만나 진위 여부를 재확인했다.
혹여나 죄가 없는 자를 죽일까 봐.
김윤을 비롯한 동료들이 말한 생명의 ‘가치’를 잃어버릴까 봐.
“왜 그런 거야.”
“응? 뭐가?”
천진난만하게 대답하는 미누아.
과연 일전에 보았던 그 여자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랬기에 더더욱 자세히 알아야 했다.
“누군가 시킨 건가? 아니면 일부러 그런 건가.”
“...흐음? 둘 다?”
“둘 다?”
베린의 물음에 입술 근처로 내려온 피를 핥은 미누아는 방긋 웃었다.
“본체가 나한테 임무를 맡겼으니 시킨 게 맞고. 내가 씨앗을 먹고 싶었으니 일부로 그런 것도 맞지.”
“왜 먹고 싶었는데?”
“그야, 먹으면 기분 좋잖아?”
미누아는 황홀한 듯이 몸서리쳤다.
“초월의 조각이라는 건 정말 대단해. 그저 몸에 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능감을 느껴. 모든 걸 할 수 있을 거 같고 실제로 그럴 수도 있지.”
“...그래?”
“응. 너도 그렇지 않아? 아니, 너는 좀 더 많이 느끼려나?”
“그럴지도 모르지.”
베린은 단검을 쥐었다.
결정했다.
─죽일 거야?
‘응.’
더 물어볼 필요도 없다.
눈앞의 여자는 기준을 충족하고도 남았다.
─나 안 도와줄 건데?
세피드는 그리 말했다.
계약 정령인 다크를 대신해 그 자리를 차지한 세피드는 성장과 싸움에 대한 조언은 해주지만 직접 나서진 않았다.
그녀가 해주는 건 계약으로 인한 힘의 지원만 있을 뿐.
‘상관 없어.’
「▲흑화 」
베린의 단검이 빛조차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진다.
어둠은 단검을 지나 베린을, 베린을 지나 미누아를 집어삼키고 그 주위를 잡아먹었다.
과거 환각 속 ‘암신’의 경지에 오른 베린이 사용했던 기술이 시전 된다.
흑암 공간검(?? ???).
“두 개는 구했고…”
나는 수많은 마법의 결(?)을 조정하며 파편의 위치와 배열을 조정했다.
티각. 티각. 톱니바퀴가 돌아가듯이 무질서하게 배치된 파편은 서서히 그 균열을 수복하고 불안정한 이면을 안정화 시킨다.
안정화된 이면은 죽어 부활하기 직전인 그라티아의 이면을 회복시켰다.
이제는 정확히 반반의 거조가 된 이면.
백조가 아니라 흑백조네.
[어, 언제다 되는것이냐…]
“좀만 기다려봐.”
이면과 마찬가지로 흑백조의 몸을 가진 그라티아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듯 손을 벌벌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아이들이 아직 도시에 있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도시 쪽에 있는 파편은 총 3개.
우리 쪽에서 2개를 더 확보했으니 기존에 가지고 있던 2개를 포함해 총 4개가 되었다.
파편의 크기를 생각하면 대충 총량의 크기는 3대7 정도.
‘도시 이전’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수치다.
[무, 문제가 많을 것이다. 애초에 홀리에린은 나의 몸과도 같다. 게다가 오랫동안 계획한 백(白)의 나무와 성지가 있으니 그 구속력은 배에 달한다.]
그라티아는 오목조목 문제점을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성역, 도시 이전은 가능보단 불가능에 더 가깝다.
성역은 그라티아의 고유 능력의 주체이자 핵심.
당연히 성역은 오래, 그리고 많은 힘을 축적될수록 그 효율은 높아지고 격 자체가 상승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있으면 자연스레 본연의 능력 역시 상승한다.
어찌 보면 일반적인 자연신과 비슷한 능력이다.
자연신이 자연의 영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강해지는 거라면,
그라티아는 영역이 발전하면 발전하수록 강해지니까.
당연히 그 효율은 그라티아쪽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자연신처럼 쉽게 영역을 재설정하거나 넓힐 수 없다.
수준 이상의 초월의 격을 감당할 수 없는 건 자연도 마찬가지니까.
[게다가 저쪽에는 아이들이...]
사실 가장 큰 문제라 할 수 있는 건 역시 그라티아의 자식들이다.
초월의 자격과 격이 유전이 되진 않지만 그래도 적성과 힘 정도는 가지고 있다.
특정한 고유의 힘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육체.
게다가 자신의 파편까지 내어줬다면 그 영향력은 배가 됐을 거다.
“...하아.”
한숨이 나온다.
이곳의 초월자의 대부분의 특징이다.
너무 자신의 힘을 무지하다.
게임이라는 틀안에 갇혀있다 보니 자신의 힘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한다.
다른 차원에서 온 초월자들은 그들의 힘과 위치를 잘 알고 있기에 정말 소량의 힘만을 운용한다.
하지만 행성에서 나고 자란 초월자들은 관리자에 의해 게임에 갇혀 나갈 수 없는 몸이 되었고, 벽을 넘을 수 없는 초월자는 자신을 행성의 고위신들과 동일하게 여겼다.
“어차피 안 죽여. 아니, 못 죽인다고 봐야겠네”
[어째서?]
“녀석이 원하는 건 나니까.”
몸속에 들어오는 힘을 갈무리했다.
공유를 통해 다시 그라티아에게 보내는 양보다 내게 축적되는 양이 더욱 커진다.
단단한 층을 구성한 성역의 힘은 지반을 쌓듯 고정되어 초월자를 위한 등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누아는 스스로는 초월의 격을 가지지 못해 나를 이용하고 있어. 내가 초월자로서 사도로 임명해 주길 바라고 있겠지. 적어도 계획이 완성되면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사도가 될거야.”
[...내 아이들을 이용해서 말인가?]
“응.”
그라티아의 자식들은 그라티아와 상당히 유사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 힘을 잘 이용한다면 온전한 능력을 사용할 수 없을지언정 ‘힘의 흐름’ 정도는 조절할 수 있다.
미누아는 나를 두 초월자의 힘으로 새로운 초월자를 탄생시키고 그 과정의 흐름을 가져와 자신을 강제적으로 사도화 시킬 생각이다.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
“아, 됐다.”
부웅!
마침내 두 그라티아를 연결하던 성역의 힘이 일시에 이면을 가득 채웠다.
「▲성역 」
홀리에린의 뻗어있던 수많은 성역과 초월의 힘이 이면으로 빠르게 스며들고 그 중심에 있던 이면의 탑은 쿠궁! 소리와 함께 무너져내렸다.
그렇게 무너진 탑이 있던 자리에는 빛과 어둠의 기둥들이 길게 뻗은 신전이 솟아났다.
신전은 쑥쑥 자라듯 솟아나다 어느새 이면의 꼭대기 층이 있던 위치까지 올라왔다.
[된건가?]
“네가 알아야지. 네 힘인데.”
[...뭐, 어느 정도는 안정화가 이루어지긴 했다만 절반은 내것이 아니라... 헌데 정말 이런다고 미누아가 홀리에린을 두고 올 리가─]
“왔다.”
뭐?
그라티아가 말을 내뱉었지만 나는 이제는 거의 안정화된 이면의 하늘을 보았다.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구멍.
그 하늘을 뚫고 흑백색의 빛을 뿌리는 미누아가 튀어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