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화 〉 17. 설산의 사냥꾼 (7)
* * *
달의 산을 걸었다.
노란색의 월광(月光)이 비추는 산맥과 산위에 걸린 거대한 보름달.
그곳에 내가 있었다.
아니, 내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월광 검사.
달빛과도 같은 검술, 월광식의 창시자이자 검의 최강이 된 존재.
산을 가르고자 하면 산이 두개로 나뉘고,
바다를 가르고자 하면 바다가 두면으로 나뉘어진다.
마침내 끊임없이 두드린 벽이 허물어지고 하나의 차원을 넘어 다른 세계로 넘어갈 자격을 얻었다.
[...이럴 수가.]
그러나 그는 좌절했다.
과거, 자신의 검술을 단 두 초식으로 굴복시키고 유유히 사라진 강자.
그의 발끝조차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는 좌절하고, 또 절망했다.
“...?”
낯선 천장.
다윤은 벌떡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다소 혼란스러웠던 그녀는 아직까지 몽롱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곤 침착하게 이전의 일을 떠올렸다.
분명 아스트라라는 초월자의 혹한에 온 몸이 얼어버릴 듯한 한기를 느꼈다.
그때 윤 씨가 구해주었고 신경전을 벌이다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 뒤로 기억이 없다.
‘...윤 씨는 어디 갔지?’
어쩌면 윤 씨나 하페루아와도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얼른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읏!”
쿠당탕!
이질적인 몸 상태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평소의 날아다닐 듯이 가벼운 몸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막중한 무게가 자신을 누르듯 몸을 움직이기가 버거웠다.
‘약해졌어…’
항상 몸에 가득 차던 마력이,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홀리에린의 무트라의 시험 때보다도 더 쪼그라든 것 같다.
다윤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다시 침대에 앉았다.
“...하아. 뭐가 어떻게 된─”
“언니?”
“...!”
와악!
다윤은 침대 아래서 불쑥 튀어나온 아이에 깜짝 놀라 뒤로 자빠졌다.
그런 모습을 본 이아의 뿔이 귀가 쫑긋거리듯 움직였다.
“깨어나셨네요.”
“누, 누구야? 여긴 어디고.”
“잘생긴 오빠랑 이쁜 언니는 잠깐 나갔어요. 퀘스트 하러요.”
“어?”
“비샨 언니랑 주환 오빠는 야생동물 좀 잡으러 간다고 했어요. 당근만 먹어서 물린다나 뭐라나.”
다윤은 멍하니 이아를 바라봤다.
자신이 물어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제 말만 하는 녀석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생각을 바로잡았다.
“...설마 그 잘생긴 오빠가 윤 씨니?”
“윤 씨?”
이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몰라요. 근데 잘생겼어요.”
“...그럼 윤 씨가 맞을 텐데.”
“히히. 언니도 예뻤어요. 저처럼 뿔을 가지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밤하늘의 별처럼 예뻤어요.”
“설마 붉은색 뿔이니?”
“네. 눈도 빨겠어요.”
그럼 그 악마, 하페루아가 맞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 악마는 정말 예쁘니까.
“언제 돌아오신데?”
다윤이 그리 묻자 이아는 고개를 수그리고 아기자기한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하나… 둘… 숫자를 세던 이아는 다윤의 앞으로 살아남은 세 손가락을 내밀었다.
“삼일?”
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삼십 일?”
“네.”
“...그 외에 다른 남긴 말은 없었니?”
“이거.”
이아는 작은 쪽지를 하나 내밀었다.
아무런 내용이 없는 흰색의 백지였으나 다윤은 익숙한 듯 조막 만한 월광의 마력을 운용했다.
그러자 마력이 종이에 깃들고 노란빛의 문자가 드러났다.
─깨어났구나. 다행이다.
우선 바로 얘기를 꺼내서 미안하지만 계획이 좀 틀어졌어. 아스트라가 무슨 수를 부린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다른 게임으로 와있는 상황이야.
‘윤 씨는 여전하네.’
다윤은 미소 지으며 쪽지를 마저 읽었다.
─이곳은 ‘설산의 사냥꾼’이라는 게임이야. 자세한 설명은 ‘시스템 창’을 통해 확인하면 알 수 있을 거야.
“시스템 창?”
우웅!
다윤의 앞에 나타난 반투명한 푸른빛의 창.
내용을 훑은 다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해서 당장은 성장이 중요한 시기야. 나랑 하페루아는 퀘스트를 깨기 위해 잠시 나왔어. 그동안 너도 퀘스트를 깨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게 좋아.
ps. 혹시 뭐 필요하면 사지 말고 나한테 말해. 내가 사줄 테니까.
“...알았어요. 그리하죠.”
나도 뭔가 가닥을 잡은 것 같으니까.
다윤은 어색한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그러곤 월광의 검을 소환했다.
월광검이라기엔 그냥 철 막대기 수준으로 약해진 검.
그러나 아무 상관이 없다.
‘나뭇가지더라도 누가 드냐에 따라 명검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해요 언니. 밖에 엄청 위험해요."
"응. 조심할게."
그녀는 천천히 문을 나섰다.
[탐험! 설산의 미지의 보물을 탐색하자! 를 클리어했습니다.]
[15 Point, 미지의 보물 상자 1개를 획득했습니다.]
살얼음이 가득 낀 얼음 동굴.
그 안에서 보물을 찾은 나는 새햐얀 상자 하나를 받았다.
지난 3일간 열심히 동굴을 탐색한 끝에 간신히 찾은 상자.
“뭐가 있으려나.”
“추가 포인트나 도망자용 장비를 줄 확률이 높겠지.”
어느 쪽이든 그다지 좋은 건 아니겠지만~
하페루아는 그리 말하며 별 기대를 안한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나와 하페루아는 퀘스트의 보상을 위해 돌아다니는 게 아니었다.
‘이야기.’
나와 일행이 이러저러한 퀘스트와 사건을 통해 성장했다! 라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관리자의 마음에 들만한 이야기를 말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쌓으면 쌓을수록 내가 올릴 수 있는 스텟의 수치가 더 올라가겠지.
[미지의 보물 상자를 오픈합니다!]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요란하네.’
수백, 수천을 산 존재라기에 너무나도 경박한 모습.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 두구 두구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 !경 관리자 1회 소원권을 획득했습니다! 축! ■
“...소원권?”
어느새 묵빛의 티켓 하나가 손에 들려있었다.
보랏빛의 전자 고양이 마크가 그려진.
■ 특수! / 관리자 1회 소원권.
┏ 효과: 우리의 귀여운 관리자 벤시에게 1회 소원을 빌 수 있습니다! 원하는 그 어떤 소원이든 빌어보세요! (실현이 가능한 소원만 이루어 드립니다.)
┗ 구매가: ???
■ ※ 불펌 금지!
[소원을 빌겠습니까?]
“미친.”
“미친?!”
덥석.
눈이 동그래진 하페루아는 오른손에 들린 티켓을 덥석 잡았다.
“나, 나줘!”
“하페루아?”
“빨리!”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굉장히 흥분한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내어주지 않고 손을 뻗어 티켓을 올렸다.
정말 이성적으로 원한다면 마법을 쓰든 맹약으로 강제적으로 빼앗든 할 텐데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떻게든 손을 위로 뻗고 있었다.
“망할 디드락한테 받을 게 있어!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ㄴ─ 우웁!”
“진정 좀 해.”
오른손으로 티켓을 들고 왼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참 평소에는 냉철하고 몇십 수 앞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굴더니 나랑 옆에 있을 때는 이상하게 사람이 망가진다.
‘사람이 아닌가.’
아무튼.
한참을 발광하던 무려 3시간을 난리 치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흐흐…”
“하페루아?”
“...그래, 다 지난 일이지. 그 망할 디드락도, 니츠리야도, 에르투스도.”
실실 웃던 하페루아는 표정을 싹 고치고 다시 거만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진정 좀 됐니.”
“...난 멀쩡해. 잠깐 옛날 생각 좀 났던 거뿐이지.”
그녀는 팔짱을 끼며 최대한 태연한 척을 했지만 내 눈에는 아직도 미련이 남은 게 선명히 보였다.
“줄까?”
“...됐네요. 너 써. 그리고 지금 쓰진 말고.”
“왜?”
“지금 써봤자 좋은 거 없으니까. 받을 수 있는 거야 우리가 눈치 안 보고 쓸 수 있는 포인트나 특수 장비 같은 게 전부야.”
“음…”
“여기서 내보내 달라는 것도 들어줄 거 같긴 한데, 우리가 그냥 들어온 게 아니잖아?”
맞다.
우리는 초월의 격을 완전히 하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대로의 세계는 아니지만 원래 힘들면 힘들수록, 어려우면 더 어려울수록 더 보상이 커지는 법이다.
그런 의미로 우리는 이곳을 완전히 공략해야 했다.
“게다가 쓰면 아마 너 혼자 돌아가질 거야. 김다윤이나 다른 차원으로 들어간 베린도 못 돌아오겠지.”
“그럴 순 없지.”
“그래. 우선 넣어두고 다음 기회를 노리자.”
“...후회 안 해?”
나는 동굴을 빠져나가는 하페루아를 보며 티켓을 흔들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다지 필요 없는 소원.
그러나 과거 많은 것을 잃었던 하페루아에게는 중요한 소원이 될 수도 있다.
그녀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전혀.”
“...”
“초월자를 무시하지 마. 마음만 먹으면 그릇된 감정 정도는 얼마든지 가라앉힐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아까 왜 그런 추태를…”
“...닥쳐, 김윤.”
3주.
나와 하페루아가 10번의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영향력을 7%나 모은 시간이다.
얼음 동굴 퀘스트와 달리 다른 보상들은 처음 예상대로 좋은 아이템을 주지 않았다.
100 포인트 이하의 장비들이나 포인트, 식량이 전부.
그러나 영향력을 모은 건 꽤나 대단한 성과였다.
[당신의 설산의 영향력은 10.5% 입니다.]
[설산이 당신을 흥미롭게 바라봅니다.]
[모든 스텟이 4 상승합니다.]
[최대 행동력이 3 증가했습니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빨리 영향력을 모을 수 없다.
영향력은 이야기의 값이니 그만한 이야기를 치르지 않으면 얻을 수 없으니까.
“...미친 도망자 새끼가…”
그런데 나는 해냈다.
인근 소규모 사냥꾼 무리를 무려 5군데나 토벌하면서.
[위험 수치 ※●●●●●●! (사냥꾼들이 당신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 ]
[‘군단’급 사냥꾼 무리 둘이 당신을 쫓고 있습니다!]
[사냥꾼 중 일부가 당신에게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현상금 / 3,700 Point (▲600 / 전날 대비)]
“해적왕이 된 기분이네.”
내 목에 스텟 12개 값어치가 걸려있다.
나는 피식 웃으며 하페루아를 돌아봤다.
그녀는 내가 벌인 흔적을 지워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도망자들도 나를 팔아넘기겠는걸.”
“당연하지. 너만 잡으면 평생을 안전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저걸 방어 스텟에 투자하면 12개다.
그 정도만 해도 초월자들이 백날 때려봤자 흠집도 안날 거다.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찰나.
[꽤나 일을 벌이는구나.]
“...!”
하늘을 찢고 내려온 남색의 사슬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