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 17. 설산의 사냥꾼 (8)
* * *
[꽤나 일을 벌이는구나.]
“...!”
남색의 사슬에서 세어 나온 중저음의 말투.
나는 고민하지 않고 그대로 검을 휘둘러 사슬을 끊어내려 들었다.
카각─!
‘단단해.’
무려 공격 스텟이 12에 달한 나조차도 끊어내기 버거운 사슬.
「▼▼굴레 」
아마 저 초월의 힘에 영향이 있으리라.
“하페루아!”
“응.”
마찬가지로 사슬에 묶여 있던 그녀는 수인을 그었다.
그녀의 무형의 마법이 울려 퍼지고 우리를 묶던 굴레가 아주 잠깐 허물어졌다.
카캉!
후두둑…
“와… 빡센데.”
나는 덜덜 떨리는 검을 진정시켰다.
이곳에 온 뒤로 마주한 가장 강한 적.
박살 난 사슬은 남색의 연기를 뿜어내더니 다시 서로서로를 이어 하나의 사슬로 뭉쳤다.
본체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날아오는 사슬을 쳐낸 뒤 그대로 하페루아의 허리를 붙잡고 뒤로 빠르게 이동했다.
[행동력 1을 소모합니다.]
[이동속도가 극대화됩니다!]
평소보다 두 배는 빨라진 내 몸이 설산을 가로질렀다.
따라오는 남색의 사슬.
‘...벗어나긴 힘들 거 같은데.’
“공간 이동도 안되지?”
“응.”
그녀는 내 손에 안겨 잠시 고민하더니 허공을 일직선으로 그었다.
콰앙!
그러자 공간을 찢고 보랏빛 뿔을 지닌 거대한 괴수가 튀어나와 사슬을 내리찍었다.
기세 좋게 나온 괴수.
[흥미롭군.]
그게 다였다.
푸확!
사슬은 괴수를 눈 깜짝할 사이에 찢어발긴 후 전보다 빠른 속도로 나를 쫓아왔다.
“생각보다 강하네. 어쩌면 5등위 이상일지도 모르겠어.”
하페루아는 무덤덤한 말투로 사슬의 주인을 평가했다.
그녀는 나와 대화할 때는 가끔 어리숙하고 편한 태도를 보이지만 전투에 들어서면 항상 진지해진다.
“네가 아는 초월자야?”
“굴레라… 찾으면 찾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지금은 모르는 녀석이야.”
“그럼 계속 튀어야겠네.”
나는 행동력을 하나 더 소모했다.
사슬이 더욱 빨라졌기 때문이다.
[남은 행동력 (3 / 8)]
[...]
철컥.
사슬이 멈췄다.
나는 멈추지 않고 하페루아를 통해 시야를 대신해 바라봤다.
사슬은 더욱더 짙은 남색의 연기를 내뿜더니 하나의 사슬이 수백, 수천 개로 분리됐다.
사슬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오우.”
“아주 작정했네.”
“피할 방법은.”
“없어.”
하페루아는 담담히 선언하듯 말했다.
그녀가 이리도 담담한 때는 항상 대책이 있기 마련이었다.
“뭔가 방법이 있는 건가?”
“지금은 없는데… 곧 생길지도.”
“?”
쾅! 쾅! 쾅!
사슬이 마치 화살처럼 쏘아진다.
그중 하나는 내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방어가 15에 달했음에도 꽤나 통증을 느꼈다.
거의 3년 만에 느끼는 통증.
사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웅웅 울려 퍼졌다.
[포기해라 도망자여. 넌 결코 도망칠 수 없다.]
“거참 뉴비 배려가 없으시네.”
[너는 뉴비가 아니다.]
“뉴비 맞아요 어르신.”
스륵.
발아래로 어둠이 드리운다.
“뉴비들은 고인물들의 관심을 받기 마련이지.”
「▼▼지하 」
[...성녀!]
사슬의 울부짖음과 함께 나와 하페루아에게 수많은 사슬이 쏘아졌다.
그러나 이미 아래를 장악한 ‘지하’가 나와 하페루아를 삼키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파바박!
사슬은 아무것도 없는 눈밭만을 꿰뚫었다.
[젠장! 망할 년이 다 잡은걸...]
후욱.
분명 아래로 끌어당겨졌는데 현실은 위로 튕겨져 올라왔다.
나는 내 팔에 대롱대롱 달린 하페루아를 내려주었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이다음은 뭐야?”
“그거 알아, 김윤?”
위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더 큰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거야.
타악.
어둠을 가리던 불이 켜지고 수많은 사냥꾼들이 우리를 노려본다.
그리고 가장 높은 상석.
티라곤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새햐얀 옷을 입은 여인이 싱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가워요. 김윤, 그리고 하페루아.”
“이름은 용케 알았네.”
“사냥꾼이 사냥감의 정보를 모르는 게 이상하죠.”
분명 사슬은 마지막에 우리를 납치한 당하자 ‘성녀!’라고 말했다.
아마도 저 여자가 성녀겠지.
‘설산을 삼분하는 최고의 사냥꾼 중 하나.’
빛조차 들어서지 않을 어두운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새하얀 손으로 와인잔 하나를 만들었다.
와인잔의 와인은 그녀가 손을 흔들자 자동적으로 차올랐다.
“하페루아. 당신을 여기서 보니 색다르네요. 혹시 과거의 추억이라도 떠올리고 있는 건가요?”
“...그런 걸 추억이라 부르지 않는데.”
“후훗. 그것도 추억이죠. 그래도 당신에게 꽤나 유의미한 성장이 아니었나요?”
“그럴 수도 있겠네.”
하페루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저 성녀를 알고 있던 모양이다.
하페루아의 무덤덤한 태도가 별로 재미가 없는지 성녀의 타깃은 나로 옮겨졌다.
“그쪽은… 용케도 난리를 쳤네요. 난 당신이 아닌 그녀가 저지른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쪽들이야 말로 온 난리를 다치던데.”
분명 이곳에 있던 초월자 중 하나인 ‘지하’의 능력으로 끌려오긴 했다만 그거 외에도 다른 초월자들이 제법 많았다.
지난 3주간 우리가 사냥꾼을 습격한 만큼, 우리 또한 제법 많은 습격을 받았으니까.
성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진 않죠. 당신의 능력은 생각보다 더 우위에 있었으니까요. 제 친위대까지 나서야 할 정도로.”
친위대라…
나는 성녀의 옆에 있는 네 명의 초월자들을 보았다.
적어도 아까 사슬을 쓰던 남자와 비슷한 수준.
아니, 오히려 더 높은 경지에 위치한 자들도 몇몇 있었다.
느껴지는 힘의 깊이를 보아하니 서로 힘이 원래대로 돌아와도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완전함과 완전하지 않음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니까.
그녀는 와인잔을 기울여 맛을 음미했다.
“제안하나 하죠.”
“제안?”
“지금 설산에 사냥꾼이란 사냥꾼은 당신들만 쫓고있는 거. 알죠?”
그녀의 물음에 나와 하페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잡은 사냥꾼 숫자만 20명을 넘어간 시점에서 우리는 이미 유명 인사가 되었다.
사냥꾼이든 도망자든 우리를 쫓는다.
사냥꾼은 우리를 잡으면 영향력과 내가 약탈한 비싼 아이템, 포인트 등을 얻을 테고,
도망자는 다른 것들을 얻지 못하는 대신 현상금의 값을 받게 될 거다.
한마디로 우리는 걸어 다니는 황금 고블린이나 다름없다.
원래는 이리 주목을 끌 생각이 없었지만 이미 들킨 만큼 빠른 시일 내에 영향력과 더 많은 이야기를 모아야 했다.
“내가 당신들을 도와줄게요.”
“당신이?”
“네!”
성녀는 인자한 표정으로 가느다른 두 팔을 활짝 폈다.
그녀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사냥꾼 킬러.’
지금껏 나를 마주한 사냥꾼들은 하나같이 같은 퀘스트를 받았다.
나는 이 설산에서 ‘가장 흥미로운’ 참여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흥미로운 참여자를 관리자가 가만 놔둘 리가 없다.
퀘스트의 보상은 당연히 많은 포인트와 영향력.
내 행보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보상의 값은 점점 더 상승하고 있었다.
“혹시 내 값어치가 올라가길 기대하고 있는 건가?”
내가 사냥꾼들을 죽이면 죽일수록 값어치는 점점 더 상승한다.
만일 한계 없이 쭉쭉 올라가다 보면 ‘군단’급 사냥꾼 무리와도 비견될 정도로 성장할 거다.
그리된다면 그때의 나를 잡는 보상은 지금보다 차원이 다를 거라 확신했다.
성녀의 새까만 눈동자가 초승달을 그렸다.
“설마요. 그런 뻔한 이야기를 벤시 언니가 좋아할 리가 없죠.”
“...그렇다면?”
“파멸.”
세 개로 나누어진 와인잔의 파도가 거대한 한 면에 의해 그대로 뒤덮였다.
“나를 제외한 사냥꾼 모두의 파멸.”
당신이 나의 사냥개가 되어줘야겠어요.
성녀의 입꼬리가 쭈욱 올라갔다.
[따라와라...]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해골은 나와 하페루아를 안내했다.
성녀의 명령으로 안내를 하고 있는 친위대 중 하나였다.
「▼▼불멸 」
그리고 상당히 매력적인 초월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불멸.’
저 초월의 힘을 가지고 있는 한 적어도 같은 수준, 혹은 한 두 단계 높은 초월자는 무슨 수를 쓰든 눈앞에 이자를 죽일 수 없을 거다.
[위대한 아르테이라님 께서는 너희들에게 축복을 내리셨다.]
“축복?”
[그분의 권능의 조각이라고도 할 수 있지...]
해골은 어두운 동굴을 지나 뼈다귀 손을 치켜 올렸다.
동굴의 벽돌이 하나씩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원형의 문을 만들었다.
그 안에는 휘황찬란한 무기들이 잔뜩 있었다.
내가 천공의 섬에 만들어둔 무기고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
“오…”
“쿼아의 창. 이걸 여기서 보네.”
하페루아는 붉은빛의 창을 냉큼 집어 들었다.
거대한 에너지가 꽉꽉 압축되어 들어있는 창은 초월의 힘보다도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적색 거성을 통째로 압축시켜 만든 위대한 무구지.]
“흐흥~ 요즘은 무기 관리는 잘 안 하나 봐. 예전 같으면 이런 무기 유통 자체를 막을텐데.”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탓이지. 무구를 내려놔라 하페루아. 너희들에게 줄 건 그게 아니다.]
하페루아는 살짝 아쉽다는 듯 창을 내려놓았다.
나는 그 사이 무구 창고를 둘러보았다.
아까 본 쿼아의 창만큼의 강한 무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내가 가진 찬란한 빛이나 메티아스의 장검보다는 훨씬 좋았다.
‘역시 반쪽짜리 초월자론 무린가.’
이 무기들은 게임에서 제 성능의 1%도 내지 못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꽤나 강력한 기운을 내뿜었다.
해골은 잡동사니가 쌓인 구석을 뒤지더니 백색과 흑색이 묘하게 섞여있는 두 개의 팔찌를 가지고 왔다.
“이건 뭐야?”
[아르테이라님의 권능의 열쇠다. 차고만 있어도 너희들의 신변은 안전해질 거다.]
“반대로 우리 신변이 성녀의 손안에 들어오고?”
[...그래서. 받지 않을 텐가?]
해골은 보랏빛의 낫을 들었다.
받지 않는다면 강제로 끼워버릴 것처럼 살기를 내뿜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받지.”
나와 하페루아는 팔찌를 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