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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7화 〉 18. 다른 세계의 마왕(6) (237/318)

〈 237화 〉 18. 다른 세계의 마왕(6)

* * *

***

죽어 버린 땅.

어둠으로 물든 대지는 시체가 썩어가고,피로 물든 강은 푸르렀던 과거를 잊었다.

“......끅.”

모두가 죽은 마을,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소녀는 무언가를 끌고 자신의 집 뒤로 터덜터덜 걸어간다.

잔뜩 해진 옷을 입은 소녀는 죽은 어머니의 시체를 여린 손을 묻고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랏빛과 붉은빛의 안개. 검은 밤이 흘러가는 하늘.

소녀는 빌었다.

‘제발 사악한 마왕을 엄벌할 힘을 내려주세요.’

간곡히 빌고, 또 빌었다.

***

검은 머리에 검은 대검을 든 남자가 미친 듯이 달려온다.

군단급의 수장이자 내가 처음 만난 사냥꾼 무리의 대장.

고작 한 달 정도밖에 있지 않았으나 꽤나 오래된 악연처럼 보여 기분이 묘했다.

‘이격(二?).’

검신을 타고 흐르는 빛 형태 알갱이들이 한데 모이기 시작한다.

상대는 어둠 계열의 초월자.

내 본래의 힘이나 마법의 마나를 사용하는 것보다 빛 계열 마나를 쓰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키이잉! 히아트와 빛과 메티아스의 빛이 공명하여 두개의 기다란 선을 그려냈다.

이윽고 두 개의 선은 공간을 가로질렀다.

“...! 피해라!”

심상치 않음을 느낀 믹스는 뒤쪽에 오고 있던 부하들에게 일렀지만 이미 늦었다.

설산을 ‘절단’한 두 개의 선이 믹스의 공격을 파훼시키고 뒤이어 사냥꾼을 덮쳤다.

사냥꾼들은 정확히 네 등분 나며 눈밭을 나뒹굴었다.

정예로 보이는 셋은 간신히 피했으나 그 역시 완벽하지 않아 각자 절단된 부위의 상처를 부여잡고 있었다.

[행동력이 2 소모됩니다.]

[남은 행동력 (7 / 13)]

‘이격 한 번에 행동력 2라…’

최강자의 기술답게 코스트가 굉장히 높았으나 육체의 부담을 행동력으로 치환하니 마냥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다.

“너… 유랑자 따위가 아니군. 무슨 이유로 힘을 숨기고 들어온 거지.”

믹스는 여전히 흉흉한 기운을 내뿜으며 내게 물었다.

멀쩡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역시 왼쪽 손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들어오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오게 됐어.”

“그 말을 믿으란 거냐?”

“믿는 건 네 자유지.”

욱씬.

최대한 여유롭게 말했지만 나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내가 여러 방면에서 강해진 만큼 가용할 수 있는 최강자의 힘 역시 강해졌다.

이격의 부담은 행동력으로 감당한다 하더라도 지금 내 몸에는 수많은 초월의 힘이 깃들어 있다.

특이점과 최강자 특유의 강인한 육체로 그것을 온전히 담고 있는 중이지만 완전한 초월자가 아닌 이상 ‘정신’적인 측면은 아직 불완전했다.

그래, 마치 채림이처럼 말이다.

‘힘과 격이 줄어든 탓도 있겠지.’

상대도 마찬가지 겠지만.

“성녀랑은 무슨 관계지? 왜 바벨을 내쫓고 사냥꾼을 다 죽인 거냐.”

“도망자가 사냥꾼은 죽이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그렇군.”

믹스는 더 이상의 대화가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지 대검을 뒤로 쭉 뺀다.

이윽고 양손으로 쥔 대검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쿠─구구궁!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처럼 대지가 뒤집히고 몸이 마구 흔들렸다.

‘17? 18? 어쩌면 20 일지도 모르겠어.’

단순히 공격 스텟만 따지면 그 정도다.

영향력으로 인한 스텟과 수많은 장비들을 생각하면 지금 상태로 믹스를 이기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페루아.”

펄럭.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하페루아는 보랏빛 날개를 펼치며 끌어안았다.

우리가 빠져나간 대지는 차마 무어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나는 빛을 보호막처럼 둥글게 둘러 여파를 막아냈다.

“...천검(??).”

믹스의 대검이 나를 향하고 이윽고 짙게 물든 어두운 하늘이 열리기 시작한다.

열린 하늘 속 드러난 것은 빌딩만 한 크기의 대검이었다.

“전사가 아니라 마검사였나.”

생긴 건 다 때려 부술 것 처럼 우락 부락 해놓고 정작 쓰는건 마법검이다.

나름대로의 필살기 같은데…

막으려면 막을 수 있겠다만 나 역시 피해와 행동력 소모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니 막을 사람은 내가 아니다.

「▼맹약」

“오래는 못해.”

그녀의 아래로 빈병이 낙하하고 하페루아의 손짓에 일대의 공간이 검의 진입을 멈춘다.

그극─그극. 서로 힘싸움을 시작한다.

치열한 싸움 끝에 결국 이긴 건 거대한 대검.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 장소에서 벗어난지 오래였다.

[우선 벗어나세요. 당신들은 믹스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려고 했어.”

‘삼격’을 쓰면 잡을 거 같긴 한데…

그걸 쓰려면 아예 특이점으로 육체의 한계를 뚫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특이점은 절대 들키면 안 되고.

하페루아의 이마 문양이 번뜩이고 나와 그녀의 몸이 흐려진다.

일시적으로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능력.

‘저장’에 담긴 무수히 많은 능력 중 하나였다.

“어딜 벗어나려고!”

후웅!

대검을 돌려잡은 믹스는 부메랑처럼 대검을 날렸다.

핑그르르 돌아가던 대검은 나의 보호막은 깨트렸지만 흑백의 보호막에 의해 막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성녀!”

[가세요!]

행동력을 하나 더 소모해서 빠르게 이동한다.

녹색의 드래곤을 탄 마법사가 수십 개의 마법진을 구사하며 우리의 앞을 막지만.

“일격.”

콰아아아!!

연푸른 에테르의 검기가 드래곤의 상하체를 분리하고 이윽고 날아온 투명한 가시가 남자의 심장을 꿰뚫는다.

“일격은 쓸 수 있지.”

─시끄럽고 빨리 달려.

우리는 거처에서 벗어났다.

***

“무사히 벗어났군요.”

아르테이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믹스가 감시인원을 죽이고 추적을 해올 것이라는 건 예측했으나, 김윤에게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행히 김윤과 하페루아는 생각 이상으로 강했고 믹스를 제외한 대부분을 전투불가 상태로 만들었다.

‘저희를 제외한 남은 사냥꾼은 20명 남짓. 이쪽의 영향력이 5할이 넘었으니…’

드디어 ‘협상’할만한 조건이 갖춰졌다.

벤시에게는 당장에라도 게임을 중단시킨다 협박하긴 했으나 아르테이라는 게임을 중단시킬 생각이 없었다.

게임이 종료되면 새 개임이 시작되고 벤시는 ‘패치’라는 명목으로 자신과 아군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바꿀것이다.

오히려 그녀가 바라는 건 게임의 유지다.

이미 영향력을 50% 이상 확보한 상태이기에 따로 모으지 않는다면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단 하나의 압도적인 세력은 새로 들어오는 사냥꾼을 계속해서 죽이고, 도망자들은 따로 모아 사냥을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된다면 자연스레 게임을 이용하는 초월자들이 줄어들고 벤시는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다.

그래 이렇게 말이다.

[똑똑?]

“네, 또 무슨 일이십니까?”

성녀의 주위로 친위대가 하나 둘 모여들었다.

고작 넷 정도였지만 그 무게감은 관리자라도 결코 가벼이 볼 존재들이 아니었다.

[...우리 애, 얘기 좀 할까요…?]

“좋네요. 얘기.”

[...다시 말하지만 넘겨주는 건 안됩니다.]

“그럼 전 할 얘기가 없습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로자리오가 빛을 발하고 불멸을 가진 친위대는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가면을 쓴 남자는 지하의 무구들을 꺼내 친위대에게 건네주었다.

그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광군왕’이 있는 곳으로.

통신 너머로 깊은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바벨’은 내 게임의 핵심이야. 입니다. 어떻게 넘게 주냐. 줍니까.]

“그냥 편하게 해도 됩니다. 언니.”

[지랄하지마아아아아아!!!]

와장창!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설산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외침에 동식물이 죽어나가고 낮은 수준의 도망자는 귀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졌지만 그녀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피를 토하는 음성이 성녀의 귓가를 꿰뚫었다.

[야! 너 진짜 죽고 싶어?!]

“죽일 수 있다면야.”

[...왜 그래. 네가 너한테 뭔 큰 잘못을 한 거니? 응? 응?!]

아르테이라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태도 개선도, 더 큰 억압도 아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바벨’ 그 자체였다.

벤시가 구속한 바벨의 ‘영혼 소유권’.

그것이 아르테이라의 첫 번째 목표이자 마지막 목표였다.

처음부터 아르테이라는 소유권의 이전을 요청했으나 당연히 받아주지 않았다.

[아… 진짜! 어떻게 넘겨주냐고! 바벨은 설산의 사냥꾼 그 자체인데!]

이미 게임 자체에 바벨은 핵심 보스가 되었다.

모든 스토리와 게임의 설계. 진행 난이도, 세력 구도...

그 모든 것이 바벨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바벨이 빠지면 설산의 사냥꾼은 그냥 산 탐방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아르테이라는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립니까. 바벨이 핵심이라니.”

[진짜 욕 나오게 할래? 당연히 바벨이 핵심이지 무슨 개소─]

“지금 러너의 주인이 누구죠?”

[...?]

“영향력이 25%가 넘은 사람은 또 누구고요?”

모든 도망자들의 핵심인 러너의 주인.

영향력이 25%가 넘은 설산의 핵심 주역.

‘군단급의 수장과도 대적이 가능한 ‘유이’한 도망자.’

“하나 더, 있잖아요?”

성녀의 입꼬리가 쭈욱 올라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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