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 21. 무명 (1)
* * *
***
나와 다윤은 뭉게구름이 가린 결계를 뚫고 들어왔다.
고원을 감싼 구름들은 평범한 구름이 아닌 다른 이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결계의 일종이다.
제아무리 고위신이라고 해도 허락받지 못한 이는 접근할 수 없을 정도.
당연한 말이지만 초월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조용하네요.”
보라색의 마력의 실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일정 간격마다 회백색의 기둥이 양옆에 나란히 서 있었고 바닥은 돌로 되어 있었다.
기둥에 비치는 주황빛의 햇빛은 날이 밝아오고 있음을 알렸다.
빠르게 진입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실은 계속 이어져 있고 설령 도망간다고 해도 충분히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복도에 끝에 다다르니 위쪽이 둥근 거대한 문이 보였다.
굳게 닫힌 문.
잠깐 문고리를 당겨봤지만 열리지 않는다.
“부술까요?”
“잠만.”
나는 부수는 대신 가볍게 두 번 노크했다.
다윤이 고개를 까딱였으나 이내 의문을 접었다.
끼익…
문이 스스로 열렸기 때문이다.
“친절하네.”
“...올 걸 알고 있었나 본데요?”
“예상은 했겠지.”
정말 이 일의 끝이 무명이라면 내 주변을 조사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린을 노린 것은 단순히 힘을 얻기 위함이나 우연 따위가 아니겠지.
처음부터 내가 이 일에 개입할 것을 알고 한 행동이다.
‘어쩌면 내가 목표일지도.’
나는 아공간에서 세 가지의 무기를 꺼냈다.
네르토르의 삼지창.
도깨비의 봉.
가에데의 지팡이.
서로 어울리지도, 어우러지지도 않은 무기들.
하지만 자연의 주인인 고위신의 무기들이라는 점에서 가장 큰 공통점이 있다.
참고로 삼지창은 채림에게서 받아왔다.
삼지창이 주요 무기이긴 하나 지금의 채림은 무명의 힘을 흡수해 꽤나 강해진 상태니 크게 위협이 되진 않을 거다.
어두운 공간. 원탁의 테이블 위에는 작은 초 하나가 올려져 방을 빛내고 있었다.
뒤쪽을 살피니 사람 하나 지나갈 만큼의 작은 공간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아래로 쭉 뻗어진 기다란 원형의 계단이 펼쳐져 있다.
스아아아…
아래쪽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기운이 무기들과 스며들고 공명한다.
해골의 입이 덜그럭덜그럭 열리고 봉은 불안정한 화염을 내뿜는다.
삼지창은 파직 파직 거리며 번개를 내었다.
아래에서 작은 말소리가 들린다.
[용사…?]
“지주(??) 자환.”
타악.
아직 남은 수십 계단을 단번에 내려온 나는 주변을 살폈다.
땅의 주인답게 어두컴컴 한 공간.
나는 여신의 빛을 좌에서 우로. 한 바퀴 돌려 주위를 밝혔다.
그러자 오랜 세월을 나타내는듯한 여러 동물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에는 양의 모습을 한 자환의 모습 역시 보인다.
어느새 내려온 다윤 역시 주변 벽화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여신의 빛. 당신은 용사가 확실하군요. 무슨일로 오신 겁니까? 그건 가에데의 지팡이 일 텐데요.]
“무명은 어딨지?”
[...무명, 말입니까?]
짧은 머리에 머리 위로 작은 양의 뿔을 가진 녀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모르는듯한 눈치.
무명이라면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다.
[모르겠군요. 허나 당신이 찾는 사람이 제가 아는 자는 맞을 것 같습니다. 왜 그 자를 찾으십니까.]
“걔가 내 동료의 부모를 죽였거든.”
죽이진 않았다.
채림을 통해 하페루아에게 전해 들으니 이린은 죽지 않고 힘을 추출 당하고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자연도 대부분 빼앗겨 격과 힘이 많이 떨어진 상태로.
만일 좀 만 더 추출 당했다면 당했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뻔했다.
그 모습을 본 이랑이 이성을 잃고 날뛰었으나 채림이 빠르게 제압해 또 다른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여파로 채림도 정신이 다시 나가버렸지만, 죽지 않았으니 됐어.’
“물론 그 이유뿐 만은 아니야. 놈에게 받아낼 것도 있고.”
[...그렇군요.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저의 이야기를 잠시 해도 되겠습니까?]
자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숙인 그는 벽에 천천히 다가가 벽화를 쓸며 말했다.
[그는 저희에게 삶의 이유와 변화를 내어주셨습니다. 고위신으로서의 삶은 꽤나 만족스러웠으나 그것은 영원히 유지되지 않았지요.]
벽화속 동물들은 뛰어난 존재들로서 넓은 자연을 다스리고, 또 발전시켰다.
그러나 벽화의 길이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들은 무료함과 실망감에 젖어갔다.
세상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
벽화의 하늘은 삐뚤빼뚤한 선으로 막혀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색연필로 잔뜩 칠해놓은 듯한 선.
때문에 신들은 더 높은 경지에 오르지 못하고 살아갔다.
그들은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높은 곳에 올랐기에, 더 높은 경지가 눈에 보임에도 올라갈 수 없음에 탄식을 자아냈다.
벽화는 이어진다.
세상이 개변하듯 땅이 뒤집히고 해가 떠오른다.
‘새로운 시즌.’
마왕과 수하들이 급격히 강해지고 우리가 새롭게 시작한 그때.
어째서인지 세상을 가로막은 선은 많이 흐려졌다.
그 사이를 비집고 많은 이들이 더 높은 경지에 올라섰다.
대표적인 것이 정령들. 정령왕이다.
이전에도 선에 가깝게 도달한 넷의 정령들은 마침내 하늘을 가로막은 선을 넘고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
위대한 존재를 본 신들은 생각했다.
[이제야 말로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을 가로막은 벽이 허물어지고 마침내 한 단계 높은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고 말이죠.]
하지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세상이 겹쳐지고 개변해도 여전히 고위신들은 신으로만 남아있었다.
가끔 그라티아같은 특이한 개체가 있긴 했으나 그라티아 역시 정령들과 같은 세대의 존재.
그보다 덜 살고, 또 위대하지 않은 이들은 벽을 넘지 못했다.
벽화는 계속 이어진다.
고위신 중 뛰어난 자들이 모여 회의를 진행한다. 가운데에 있는 양의 형상을 띤 자환이 보인다.
회의는 계속 진행된다.
의견은 좁혀지지 않는다.
언성이 심해지고 서로 서로의 균열이 지속된다.
그들을 막거나 견제할 악, 마왕은 움직이지 않는다.
대적자인 여신 역시 그러했다.
그렇게 얼마나 이어졌을까.
툭.
벽화가 끊겨있다.
‘5명.’
회의의 주축이 되던 다섯의 고위신이 가진 물건에 누군가 손을 대는 것을 끝으로.
그 뒤로는 벽화가 아닌 말 그래도 낙서로 가득해 알아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 전부였다.
“뭘 말하고 싶은 거야?”
[간단합니다. 이 물건들은 그분의 힘을 받은 것이지만 그분의 힘만 들어있는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결국 그의 목적은 고위신들의 힘 따위가 아니라는 거죠.]
스윽.
자환은 품 속에서 갈색의 무기를 꺼냈다.
오래된 나무와 거친 흙으로 이루어져 끝 쪽이 둥글게 휘어있는 검.
고위신이자 초월자의 무기라기에는 다소 평범해 보였다.
자환은 공손하게 검을 두 손으로 잡아 내게 건넸다.
‘주환의 위검(?).’
네르토르의 삼지창과 비슷한 스펙을 가진 검이다.
평소라면 굉장히 좋은 검이네 하며 다른 길드원들에게 주었을 무기.
하지만 동일한 것이 4개가 있으니 슬슬 감이 온다.
‘이것들은 본래 하나 였다는 것을.’
[저는 오래전 부터 초월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본래라면 저는 다른 물건의 주인들처럼 죽어 다른 초월자에게 흡수됐어야 하죠.]
[하지만 저는 살았습니다. 그는 저를 초월의 길로 안내했습니다. 하지만 벽 위에는 또 벽이 있더군요.]
자환의 갈색의 눈이 나를 바라본다.
저 눈빛은 잘 안다.
용사로서 활동하면 늘 마주하는 눈빛들 이니까.
'구원을 바라는.'
[비록 그의 도움을 받았지만 저는 누가 되었든 상관없습니다. 지금에 저에게는 또 다른 벽을 넘을 재량이 없으니 다른 이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부디 이 안배를 이용해 벽을 허물어주시길.
***
콜트와 베타는 미르틱에 도착했다.
미르틱의 주요 전력이자 핵심은 청룡의 여의주.
당연히 그것을 쉽게 내어주진 않을 테지만 청린과 홍린은 김윤을 따르는 만큼 적당히 사정을 설명하면 내어줄 거다.
‘뭐 안되면 무력이라도 동원해야지.’
비록 완전하진 않지만 지금의 베타는 과거의 베타보다 십 수배 강해졌다.
여신이나 마왕급의 강자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베타를 막을 수 없을 거다.
“우선… 만나긴 만나야지…”
기왕이면 스승인 청린을 만나야 하겠지만.
베타를 데리고 홍린을 만나는 건 무리가 있다.
그런데…
─마스터, 미르틱의 흐름이 이상합니다.
“...뭔가 이상하긴 하군.”
본래라면 여의주에 의해 완벽히 통제되어야 할 마력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다.
하늘을 뒤덮던 보호막은 치직 거리기를 반복했고 마을 주민들은 의문스러움에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되겠어. 먼저 여의주를 회수한다.”
정령왕의 말대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면 이곳 역시 위험에 처할 확률이 제법 높았다.
그렇게 과거 청린의 가게 이자 현 미르틱의 중앙 관리소에 들어선 순간.
─마스터! 위험…!
─광자 에너지 흡수를 시작…
관리소가 폭발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