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 21. 무명 (2)
* * *
***
하페루아는 생각에 잠겼다.
하펠론으로 돌아온 그녀는 수백, 수천 개의 창을 띠우고 수많은 정보와 자료의 산에 묻혀 있었다.
무명을 찾기 위해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무명은 위험하다.
단순히 힘이나 위치 같은 것에 대한 위험이 아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지금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고 문자 그대로 ‘계획’이라고만 칭했지만 무명이 자신들에게 깊게 연관된다면 반드시 알아차릴 것이다.
알게 된다면… 어쩌면 계획을 방해하려 들 수도 있다.
‘빚을 지어두긴 했지만. 위험해…’
오래된 계획이다.
차원 너머로 추방당할 때부터 세워둔 계획.
절대 실패해서도, 실패 되어서도 안된다.
실패한다면 두 번 다시 도전할 수 없다.
“......”
하페루아는 수천의 창을 잠시 바라보다 모두 지운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
***
지주의 검을 회수한 후 곧장 미르틱으로 왔다.
가지러 오기로 한 콜트의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착한 미르틱은 생 지옥을 연상케 했다.
“미친.”
저 가운데의 남색의 여의주가 광대한 에테르를 퍼트렸고 그 주위는 전부 녹아나갔다.
건물, 땅, 사람, 무기 등등…
모든 것이 녹아 여의주를 반경으로 거대한 구를 그리듯 땅이 파져있었다.
도시는 멀쩡한 건물이 하나도 없었으며 강렬한 기운에 노출된 사람들은 바닥을 기며 허덕이고 있었다.
도시를 뒤덮던 보호막은 진작에 파괴된 지 오래고 마력은 폭주해 도시 주변의 몬스터들을 끌어들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점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전부 죽었다는 것이다.
─오너, 김윤님을 뵙습니다.
붉은 머리를 가진 안드로이드가 저벅 저벅 내 쪽으로 다가왔다.
베타.
대(?) 초월자용 병기이자 콜트의 연인이기도 하다.
그녀의 뒤쪽에는 반투명한 붉은색의 마공학 결계에 보호 중인 콜트가 보였다.
아마도 극심한 피해를 입고 치료 중인 상황인 거 같다.
“어떻게 된 거야?”
─17분 21초 전. 용신의 여의주가 갑작스러운 에너지 분출을 시작했습니다. 그 여파로 미르틱의 중앙 기지가 폭발했고 도시 전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도시의 인간들에게 치료를 시작했으나 근본적인 원인인 여의주가 그대로 존재해 치료하는 만큼 피해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몬스터들은 전부 제가 처리했습니다. 다만 역시 같은 이유로 몬스터들이 계속해서 몰려오는 중입니다.
베타는 빠른 속도로 상황을 보고했다.
나는 그것들을 들으며 주변을 다시 살폈다.
반파된 도시와 그 중앙에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 작은 공.
마치 모든걸 집어삼킬 듯이 압도적인 기운을 내뿜었다.
“네가 접근할 수 없을 정도인가?”
─불가합니다. ‘저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기술을 요구로 합니다.
“완성되지 않은 기술?”
─마스터께서 개발하신 ‘특이 저항(Unusual Resistance)’입니다. 샘플로 주신 오너, 김윤님과 하페루아님의 힘으로 개발한 기술입니다.
─개발 완성 단계에 있었으나 상황이 급박해 현재는 장착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
그 말은 특이점을 가진 자를 상대로도 싸울 수 있다는 소리인가?
문득 그 기술이 궁금해졌으나 지금은 상황이 급박하니 나중에 살펴보기로 했다.
청룡의 여의주.
나는 그것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용신 」
가까이 다가서자 더욱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 여의주.
용신은 죽었지만 그 물건의 힘과 능력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20M.
그 이상으로 다가가자 열기와 에테르가 점점 매섭게 다가온다.
10M.
마치 여의주를 보호라도 하듯이 적극적으로 나를 공격한다.
하지만 그 정도에 상처 입을 정도로 나는 약하지 않았다.
5M.
그 자리에서 한발국 앞으로 내밀자 브레스를 쏘듯이 나를 향해 에테르의 열선을 쏘아낸다.
나는 찬란한 빛을 꺼내어 공격을 막아냈다.
‘아!’
“엄살은.”
‘아픕니다! 아프다고요!’
검 속에 있는 히아트가 발광을 하지만 나는 무시했다.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브레스는 쉬지 않고 나를 공격했다.
그때마다 히아트가 죽는소리를 내었지만 내 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텁.
치이이익…!
내 손에 잡힌 여의주가 발광을 하듯 내 손을 갉아먹는다.
레빗과 공유된 능력인 변신을 이용해 투명하게 만든 수많은 장갑류 장비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거 2성급 레전드리 장비인데…’
그간 모아둔 장비가 많다.
그중에는 유니크가 썩어 넘칠 정도로 많고 레전드리 장비 또한 100개 이상 있을 정도다.
하지만 별이 붙은 장비는 몇 개 없었다.
아까운 감정을 애써 삼키며 맨손으로 여의주를 들어올렸다.
치이익. 내 손이 살짝 뜨거웠으나 뜨거운 게 다였다.
오히려 좀 흔들어주니 금세 미지근해졌다.
「▲─ 」
“이게 여의주…”
아이템 정보를 확인해 보니 레전드리 3성급에 화려한 스펙이 주르륵 나왔다.
예전 같으면 좋다고 챙겼겠지만 지금은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결국 장비들의 성능도 상대적인 거니까.
우우웅…
여의주를 빼내자 도시를 감싸던 마력이 서서히 사라졌다.
사람들은 간신히 숨을 내뱉었고 베타에 의해 저지되던 마물들은 흠칫 놀라며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이미 입은 피해는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일어날 피해는 없을 거다.
“여기요.”
마력의 여파가 멈추자 무기를 든 다윤이 네 가지의 무기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들을 받아 한데 모았다.
다섯 가지의 무기들은 서로 공명하며 하나로 합쳐진다.
처음에는 보라색 에테르만이 휘몰아쳤으나 시간이 지나니 새까만 거친 선들이 마구잡이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선들은 근처에 있는 다윤과 베타에게도 영향을 끼쳤지만 다들 본연의 능력이 뛰어나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라면 이 거친 선 같은 건 베타에게 흡수가 안된다는 점이다.’
토옥.
내 손에 들린 건 작은 막대기였다.
아니, 열쇠에 가까운 막대기. 자세히 보이 끝 쪽이 아래쪽으로 꺾여 있다.
“어디에 쓰는 걸까요.”
“글쎄...”
나는 막대기를 챙겼다.
힘이 들어있던 건 무명의 힘이 맞지만 이 막대기 자체는 무명이 만든 것이 아니다.
‘누군가 안배. 벽을 세운. 거친 선.’
내 머릿속에 답이 하나로 좁혀졌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 누군가 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우선 정비를 해야겠어. 길드로 먼저 가자.”
***
길드로 돌아와 쓰러진 이랑과 채림을 확인했다.
다행히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했다.
참고로 이랑은 거대한 여우의 품 안에서 잠들어 있었는데 그것이 이린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린은 길드의 치료사들에게 회복을 받고 있으니 목숨은 무사할 거다.
베린과 콜트는 세피드와 베타가 관리하에 치료 중이다.
레빗까지 잠들어 있으니 기용할 수 있는 전력은 단 둘뿐이다.
“전 준비됐어요.”
나와 다윤이.
단단히 무장한 다윤이를 보니 처음 슬라임킹을 상대할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이렇게 둘이 나섰으니까.
“무리 안 해도 돼. 무명은 쉬운 상대가 아니니까.”
비록 부상자가 많더라도 다들 움직일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이랑과 채림은 말 그대로 기절만 했지 금방 움직일 수 있고 세피드와 베타는 멀쩡한 상태니까.
하지만 굳이 그들을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무명의 위험성 때문이다.
“아뇨. 저도 강해졌어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난 네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
여태껏 수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누군가를 잃는다는 감각은 극히 드물었다.
위험한 적이 있다면 가장 최근인 설산의 사냥꾼이었지만 그 마저도 보험을 준비했고 위험하면 언제든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무명은 아니다.
‘이레귤러.’
나와 하페루아와 같은 이레귤러.
무슨 수를 부릴지 짐작할 수가 없다.
눈을 깜빡인 다윤이는 픽 웃음을 자아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도 마찬가지인데.”
“......”
“......”
잠시 시선을 마주한 우리의 입술이 서로 맞닿았다.
***
하페루아는 오랜만에 관리자 권한에 접속했다.
그녀는 불안정한 이레귤러.
김윤처럼 완전한 특이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오히려 완전하지 않기에 관리자의 눈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다.
어두운 공간.
허나 어드벤처나 분리 차원 같은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관리’를 위한 또 다른 차원으로 이 근방에는 관리자가 두고 간 관리자의 분신이 있었다.
하페루아는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 여러 가지 코드를 이용했다.
수많은 정보와 위치들이 그녀의 시야에 점멸하고 행성을 아우르는 수많은 영혼이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찾았다. 무명.’
비록 눈을 피할 수 있지만 관리 차원에 직접 접근 하는 것은 위험한 행위다.
그런데도 하페루아가 위험을 감수하고 온 이유는 들키는 것보다 무명을 찾지 못하는 것이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무명은 로루닌 근처 숲에 있다.’
그 외의 정보를 모두 빼낸 하페루아는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운 후 자리를 떠났다.
[...너무 날뛰면 곤란한데.]
빈자리에 나타난 아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