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4화 〉 21. 무명 (3) (254/318)

〈 254화 〉 21. 무명 (3)

* * *

***

남자는 나무가 무성한 숲을 걸었다.

그가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수인 형태를 취하고 있는 다수의 초월자들이 벌벌 떨었다.

전부 고위신 이었다가 초월자가 된 자들.

그들은 고위신들과의 영역 전쟁을 준비하던 초월자들이었다.

저벅. 저벅. 소음이 들린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모든 능력을 사용해 도주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미안하군. 그대들에게도 나와 같은 삶이 있었을 텐데.”

눈앞의 남자가 주위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능력의 사용은 물론, 작은 움직임과 숨소리마저도 전부.

“““......”””

“하지만 그대들에게는 기회가 많고, ‘망각’이라는 축복이 내려졌으니. 다시 도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

“그럼…”

남자는 숲의 중심에 있는 오래된 비석을 바라보았다.

과거 로루닌의 삼신 중 두 신이 묻힌 묘지.

허나 남자가 원하는 건 고위신의 묘지 따위가 아니었다.

­읍!

­으으!

그의 손에서 이질적이고 특이한 기운이 뿜어나감과 동시에 주위에 있던 초월자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영혼이 뜯겨나가는 소리.

이건 힘을 갈취하는 것도. 무작정 초월자들을 학살하는 것도 아니다.

초월자라는 ‘재료’를 이용해 ‘문’을 두드리는 작업.

과거 관리자가 떠나기 전 행성에 남겨둔 ‘안배’중 하나를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낸다.

안배의 봉인이 서서히 풀리고 ‘그 자’도 원하던 대로 안배의 봉인을 풀었다.

남자는 과거를 떠올린다.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세는 것을 그만두었기에 확실하진 않지만 수만 단위는 족히 지났으리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자그마한 인간의 육체로 시작한 운명이, 수많은 강자들을 마주하고 신을 마주했다.

그들은 강대했다.

강대한 적을 상대하기에는 남자는 너무 약했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그를 도와줄 인연들이 제법 많았다.

그는 강해졌고, 그 주변 역시 강해졌다.

강해진 만큼 앞선 수많은 강자들은 그에게 굴복했다.

신들은 그의 힘에 감탄하고 때로는 그에게 머리를 굽히기까지 했다.

“......”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기란 쉽지 않았다.

세계의 구원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계의 존폐와 동료. 둘 모두를 챙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세계의 존폐를 지키려면 그 어떠한 수라도 써야 했고, 모든 동료를 지킬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반대로 동료를 지키면 세계는 반드시 멸망을 향해 달려갔다.

“...왔군.”

남자는 수없는 도전 끝에 모든 걸 포기하려 들었다.

그리고 마주했다.

‘진정한 이 판의 주인을.’

그를 마주해 세계가 멸망하지 않으면서도 동료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 대가는 자신의 착취에 가까운 노동.

수만 년 가까이 다른 차원을 돌며 창조석을 모으고 자신의 행성의 멸망을 막는 일이다.

「▲전승 」

어렵지 않은 일이다.

어렵지 않아야 하는 일이지.

“전에 질문을 한번 듣기로 했는데…”

이름 없는 자는 초월의 결계를 뚫고 나타난 백색의 검신을 든 남자를 바라본다.

김윤.

이레귤러이자 빚이 있는 자.

자신의 것을 앗아간 적.

“이젠 자격이 되나?”

‘제거해야 할 변수.’‘제거해야 할 변수.’

***

하페루아에게 무명의 위치 정보를 들었다.

목적지는 로루닌 근처의 숲.

어째서 로루닌 근처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페루아는 위험하니 단단히 준비할 것을 경고했다.

위험한 적이니 다른 동료들을 더 데리고 갈까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결국 나와 무명의 싸움이다.’

싸움이 격해지면 나와 그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전장에 있기도 어려울 거다.

그런 점에서 부상자들은 당연히 제외.

이랑은 도움이 되지만 전투가 지속되면 쉽사리 대처가 어려울 거다.

베타는 특이 저항이라는 것이 탑재되어 있지 않으니 가봤자 고기 방패가 되다 부서질게 뻔하다.

채림이는…

‘채림이는 안돼.’

아직 정신적인 요소가 너무 불안정하다.

상대는 특이점을 가진 이레귤러.

멋대로 흡수하다 자칫 정신이 망가질지도 모른다.

“후우…”

하지만 다윤이는 다르다.

다윤이는 나와 오랜 합을 맞추었기에 원한다면 언제든지 이동하고 또 연계할 수 있다.

더불어 위험하다면 언제든지 내 쪽으로 빼낸 뒤 안전한 곳으로 보낼 수도 있다.

“준비됐어요.”

“좋아.”

다윤이는 월광의 빛을 둥글게 둘러 방패처럼 만들었다.

월광의 방패는 단순히 앞을 가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윤의 주변 전체를 구처럼 말아 감쌌다.

“진입한다.”

콰앙! 투명한 결계가 나의 검신에 와르르 무너지고 그 안으로 진입했다.

***

“이젠 자격이 되나?”

“김윤.”

거친 선이 터져 나오는 비석의 앞에 황금빛의 눈과 재수 없게 잘생긴 얼굴을 가진 남자가 서있었다.

그의 손에는 보라색의 기운이 흘러나오는 에테르의 검이 있었는데 오래전 나와 특성이 바뀐 것을 아직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아니지. 하페루아는 내 특성이 오류가 아니라고 했어.’

그렇다면 저 특성은 처음부터 무명이 받았어야 하는 특성이 맞는 건가?

“자격이라… 그렇군. 아직 질문의 기회가 한번 남아있었지.”

무명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주변으로 재가 된 초월자들이 보인다.

네르토르, 도깨비, 에고…

익숙한 초월자들이다.

고위신으로 만났던 초월자도 몇몇 보이고.

‘자환이 없군.’

자환이 그렇게 쉽게 무기를 내어준 이유는 처음부터 다른 고위신 모두를 팔아넘길 생각인 것 같다.

그 대가는 아마도 자신의 목숨이겠지.

“궁금한 게 있나?”

“많지. 많은데. 다 대답해 주진 않겠지?”

“원한다면 두 개까지 답해줄 수 있다.”

그녀에게 빚을 진 게 있으니.

“...아니. 하나만 물어볼게.”

빚을 질문 따위에 쓸 수 없으니 최대한 이득을 볼 수 있는 질문을 해야 한다.

먼저 궁금한 건 이런 짓을 벌인 이유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 질문을 할 생각이긴 했으나 오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저 비석과 내가 가진 막대기.’

그건 아마도 관리자가 남긴 안배 겠지.

고위신을 초월자로 만든 것도, 애써 힘을 부여한 주인들의 무기가 그대로 나에게 넘어가게 만든 것도.

전부 무명이 비석의 힘을 얻기 위함일 것이다.

“...뭘 받기로 한 거지?”

“...!”

“이곳에 그렇게 목을 매는 이유. 단순히 창조석 수 개 정도만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행동 인데.”

이전에 설산의 사냥꾼을 완벽히 클리어하며 3개의 창조석을 받았다.

그리고 하페루아에게 들어보니 창조석은 제아무리 노력해 봤자 많으면 5개, 적으면 1개 정도다.

애초에 창조석이 초월자들에게 귀중하다 해도 저렇게 아득바득 얻으려 할 이유는 없다.

‘급하면 해당 게임을 포기하고 다른 게임으로 넘어가도 되니까.’

차원 유랑자나 평범한 사람들은 몰라도 초월자는 스스로 게임을 선택할 수 있다.

페널티가 거슬리긴 하나 어드벤처는 설산의 사냥꾼과 다르다.

‘시간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명이 없어도 용사는 차고 넘친다.

그가 없어도 충분히 게임은 잘 굴러갈 것이다.

무명의 기세가 날카로워진다.

나는 메티아스의 장검을 들고 다가섰다.

“대답해. 난 질문을 들을 자격이 있다.”

“서른 개.”

“...뭐?”

무명의 보라색 검신에 거친 선들이 몰아치기 시작하고 이윽고 하나의 검강을 만들었다.

“서른 개를 받기로 했다.”

“그게 말이 되나?”

서른 개라니.

관리자가 미쳤다고 그 정도의 창조석을 내어 줄리가 없다.

여태껏 나나 하페루아가 얻은 창조석이라곤 고작 열 개가 전부.

그마저도 전부 다시 사용해 행성에 그대로 흡수됐다.

제아무리 게임을 클리어했다고 한들 그만한 양을 차원 밖으로 방출 시킬 리가 없다.

“말이 되든 안 되든 내가 말한 것은 사실이다.”

「▲전승 」

“그러니 잠깐 잠들어 있어라. 자고 일어나면 끝나있을 거다.”

그걸로 그녀와의 빚은 모두 청산한 거다.

무명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담고 있는 검강을 나에게 쏘아보냈다.

공간 자체가 밀려오듯 빠른 속도로 나를 베어내려 들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개소리를.”

콰아아아아앙!!!

메티아스의 장검에서 나간 연푸른 에테르와 검강이 부딪혀 폭발을 일으키고 주위에 남아있던 재들이 일제히 산화한다.

무명의 눈이 일순 찌푸려지더니 곧장 보라색의 에테르를 두르고 나를 향해 돌격한다.

목표는 나의 심장.

“리비엔.”

‘오랜만에 절 부르시는군요.’

펜던트의 무색(無色)이 붉은빛으로 차오르고 내 등 뒤로 붉은 생기를 가진 악마의 날개가 펼쳐진다.

메티아스의 장검을 집어넣고 오래된 무기를 꺼낸다.

‘바벨의 대검.’

다른 차원의 마왕이자 힘 자체만은 3등위의 초월자의 힘을 응집해 만든 검.

나는 그것을 두손으로 치켜들고 하페루아의 마기를 담는다.

검을 들고 돌격하던 무명의 눈이 커진다.

“...!”

“너에겐 여신보다 마왕이 더 익숙하겠지.”

마혈식(?血?).

원(?) ─ 마격파(???).

피의 마기를 담은 거대한 대검이 하늘을 가르듯 수직으로 내리찍는다.

이윽고 세명을 제외한 주위 모든 것이 소실되었다.

「▲마혈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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