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 24. 그녀의 친구, 그녀의 기사 (8)
* * *
***
몸에서 하나의 무언가가 뜯겨 나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일격은 나아갔다.
동시에 거대한 탈력감이 들어 시야가 흐려지고 몸을 가누기가 어려워진다.
시야 너머에 보인 것은 연푸른 검기에 저항하는 부단장.
나름 은빛의 아우라를 뿜으며 가볍게 막아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확실히 알았다.
‘적어도 상처는 입었다.’
이 싸움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 아닌 생채기를 내는 것.
때문에 뒤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든 피해를 입히는 쪽으로 공격했다.
‘내’가 쓰러진다.
“...윤!”
저 멀리서 하페가 아예 검을 놓고 쓰러지는 나를 붙잡았다.
‘나’는 이미 의식을 잃었다.
“윤아… 윤아… 죽지 마…”
나를 붙잡고 엉엉 우는 하페.
나는 그런 하페를 보고 조금의 의문을 가졌다.
내가 가진 이 감정은 명백한 진실이다.
내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으나 잊어버린, 혹은 잊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
그러나 지금 이 하페의 감정은 정말 진심인가.
이야기의 내용이 맞다면 눈앞에 하페는 나를 파악하기 위해 직접 내려온 것 일 텐데.
“......”
“죽으면…”
‘안돼.’
‘죽으면 목적을 이룰 수 없어.’
***
눈이 무겁다.
온몸에 힘 하나 들어가지 않고 누가 내 몸 위에 무거운 철근들을 마구 올려놓 거 같다.
이대로는 그대로 압사 당할 것만 같은…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죠.”
번뜩!
“읏.”
밝은 빛이 오랫동안 감겨져 있던 나의 시야를 가득 메우고 미쳐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신병이 의심되는 백색의 가구와 벽면에는 하나의 존재를 상징하는 문양이 박혀있다.
같은 색상의 타일과 천장도 마찬가지.
호록.
방의 두 개의 창문 너머로는 푸르른 정원이 들어서 있었고 뱁새라 불리는 새들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기다란 원형 테이블에 찻잔을 올려 마시는 백색의 여인이 있었다.
에린 론브디아.
예언의 성녀다.
“성녀…?!”
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벌떡 일어났지만 성녀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차를 계속해서 마셨다.
1분 정도의 짧은 실랑이 후 나는 어이가 없어져 침대에 풀썩 앉았다.
“이제 저를 인정해 주시는 겁니까?”
“...? 이해가 안 가는군요. 뭘 어떻게 인정해 준다는 겁니까.”
“제가 살아서 당신과 이렇게 1대1로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인정받는 것이죠.”
나는 몸속에 흐르는 두 방울 정도의 연푸른 힘을 체감했다.
제법 많은 기운을 사용해 지금 당장은 쓸 수 없지만 조금의 시간만 더 가진다면 금방 회복되겠지.
나는 에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부단장에게서 맹세를 받아내 세 번의 대결, 모두 승리했습니다.”
“맹세라… 수호기사로 만들어준다는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를요.”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제가 해낸 겁니다. 고작 소마을의 마력도 배우지 않은 아이가 기사는 물론 기사단의 부단장까지 이겼으니까요.”
“부단장은 이기지 않은 걸로 아는데…?”
“생채기라도 낸다면 이긴 걸로 해준다 했으니까요. 당신을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이 제가 이겼다는 것 아닙니까?”
나는 확신한다.
그때 쓰러져서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분명 작은 상처라도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예언의 성녀와 독대를 하고 있는 거겠지.
타악.
찻잔을 내려놓은 에린은 문득 푸흣 하고 옅게 웃었다.
저 피 대신 냉수가 흐를 것 같은 성녀가 웃음이라니.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가 웃기십니까?”
“너무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네?”
그녀는 즐거운 듯 찻잔을 빙글 돌렸다.
그러자 흰색의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 내가 보지 못한 이후의 상황이 펼쳐진다.
눈을 부릅뜨며 당황하는 부단장.
그는 거의 전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능력을 사용해가며 일격의 검기를 막아낸다.
나름 필사적으로 막지만 점차 밀리는 모습.
하지만.
“...어째서.”
─…후우. 괴물이구나. 넌.
상처는 입지 않았다.
발이 무려 여섯 걸음이나 밀려나고 식은땀이 흘렀지만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나는 다시 일어선다.
“그럼… 왜?”
“앉으세요.”
다시 앉았다.
그녀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하나는 별빛의 신전의 문양이 담긴 기사 뱃지.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문양의 팔찌였다.
연푸른 색의 팔찌.
“예언의 신님께 받은 예언은 두 개였습니다.”
“...!”
“하나는 별빛의 사도, 하페루아의 등장. 다른 하나는”
타악.
“검신의 사도 김윤. 바로 당신이죠.”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성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미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다고.
***
“윤!”
나는 안겨오는 하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려 일주일 동안 기절해있었다고 한다.
그 사이 이미 마을 사람들과 부모님을 포함해 이미 얘기가 다 끝났고 이주 뒤 별빛의 신전이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성녀와 그의 수호기사를 포함해서.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니.”
이럴 거면 이기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을 거 아닌가.
묘하게 화가 났지만 그래도 결과는 나쁘지 않으니 어느 정도는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도 멋졌어.”
하페는 은하수를 본따 만든듯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그 갈색의 칙칙한 옷을 맨날 보다 기품 있는 의상을 보니 낯설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녀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마치 제 옷을 찾은 거 같은 느낌.
“예쁘네.”
“윤도 멋져. 기사 복장은 왠지 둔할 거 같았는데.”
나 역시도 기사의 복장을 하고 있다.
별빛의 신전을 상징하는 어두운색의 갑옷과 별빛의 문양.
그리고 연푸른 빛의 팔찌가 내 손목에 걸려있다.
끼익…
“여기가 성녀의 방이구나.”
나는 하페의 방을 둘러보았다.
그 정신병 날 거 같은 흰색의 방을 보다 하페의 방을 보니 확실히 정상적이게 보였다.
신전은 검은색과 별빛이 상징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적재적소의 가구와 색감이 배치되어 있었고 검은색의 침대는 상당히 고풍스러웠다.
“여기 완전 부드러워.”
하페는 침대를 탁탁 치며 나를 끌어들였다.
‘나’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하페는 딱히 그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확히는 그러지 않게끔 자기 최면을 걸고 있었지만.
‘쟤도 고생하는 군.’
어쩐지 좀 웃기기까지 했다.
“일주일 동안 뭐 했어?”
“그야 뭐 신전 구경하고 마법 배우고 설명 듣고… 그랬지.”
하페는 정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윤이 깨어나는 거 기다리고.”
“나를?”
“응. 예언의 성녀라 그런지 깨어날 때쯤 되니까 귀신같이 찾아서 데려가더라. 그것도 미래를 봤으려나.”
“...그렇겠지.”
그 뒤로 대화를 더 나누었다.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다 수발을 드는 보조 사제들이 와서야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내 방은 옆방.
수호기사는 언제나 떠나지 않고 있어야 하기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활할 수 없다.
물론 정말 떨어지지 않을 거면 같은 방에 있어야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정도가 아니지.’
하도 오래 동조화를 하고 있다보니 대충 어떤식으로 진행될지 예상이 간다.
둘은 마치 당장이라도 결혼할 것처럼 굴지만 정작 그렇다고 생각 안 하는…
그런 간질간질한 상황이라는 소리다.
‘나’는 거의 수면 상태에 든 상황.
그래도 하페를 지켜야 한다는 목적이 있으니 최강의 힘을 옆방까지 퍼트려 언제든지 튀어나갈 수 있게 대기하고 있다.
아마 자고 있다가도 하페의 신변의 위험이 생기면 튀어나가겠지.
‘어디 보자… 또 가만히 있으면 또 동조화가 될 테니. 지금 움직여야 해.’
‘내’가 최강의 힘을 과하게 쓴 탓에 동조화의 연결이 다시 흐려진 지금.
지금이 움직일 타이밍이다.
나는 특이점을 사용했다.
만상의 도서관은 수많은 초월자와 강자들이 머무는 곳이지만 내가 들어와 있는 곳은 하페루아의 책 하나.
책 하나의 변화는 다른 이들에게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는다.
더불어 이 책은 이미 하페루아가 뜯어고칠 대로 고친 책이니.
‘좀 더 고친다고 페널티를 입지 않겠지.’
나는 하나의 육체를 연성했다.
수준은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않을 정도.
설정은 대충 아무개의 신의 사도인 이름 모를 강자로 정했다.
검은색의 로브를 둘러쓴 나는 그대로 별빛의 신전을 나섰다.
어드벤처를 본따 만든 곳이라 그런지 밤하늘의 별자리는 똑같았다.
별자리를 보고 대충 위치를 파악한 나는 가볍게 도약을 밟았다.
내 육신은 스프링 튀듯 하늘로 솟구치고 몸에 가득 찬 압도적인 마력과 힘은 나에게 충만감을 심어주었다.
고작 정예 기사 수준의 실력을 체감하고 있다 본래의 힘의 일부를 되찾으니 짜릿한 감각을 느꼈다.
‘이래서 초월자들이 게임을 하는 건가.’
피조물 수준으로 약해진 자신과 돌아온 신과 같은 자신을 체감하기 위해.
나는 피식 웃으며 날아가다 문득 중얼거렸다.
“...근데 다윤이 만나면 나 죽는 거 아니야?”
하페와의 결혼을 약속할 정도로 인연이 있던 나.
다윤이와 연인 사이인 나.
과연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심히 걱정이 드는 밤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