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화 〉 24. 그녀의 친구, 그녀의 기사 (7)
* * *
***
순간적으로 쳐낸 검은 정확히 기사의 쇄도를 막고 그 기사는 공중으로 띄워진다.
“뭐…”
콰아아아앙!!!!
그대로 한 번 더 쳐낸다.
기사는 형편없이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의자 언저리에 처박혔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뭘 한 거야 방금?”
“또 사도의 힘을 빌린 건가?”
“그런데 별빛은 아니었잖아?”
“......”
이때까지 무료한 표정이었던 기사들에게 긴장감이라는 것이 깃들었다.
좋은 징조다.
“후우…”
본래라면 3번째 승부에서 써야 했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돌아간 이상 나도 더 이상 밑천을 숨길 필요가 없다.
‘전력을 다하는 수밖에.’
“쿨럭!”
피가 섞인 기침을 내뱉는 기사.
견고한 은빛을 자랑했던 갑주의 오른쪽 가슴팍은 뭉개지기라도 한 것 마냥 움푹 들어가 있었고, 기사의 자랑인 검은 땅바닥을 아무렇게나 구르고 있었다.
기사는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역시, 차기 성녀님의 친우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 네?”
“이제 와서 그러는 건 좀 추한데요.”
“...추하지. 쿨럭.”
드드득.
기사는 벽안의 눈을 번뜩이며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기세를 바로잡는 모습.
아까와 같은 방심이나 장난 같은 느낌은 싹 사라지고 전투의 열의가 기사의 육신을 완전히 장악한다.
나는 이 순간에 바로 공격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냥 두었다.
‘확실하게 어필해야 해.’
지금의 나는 단순히 이기기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니다.
세 번의 승부는 그저 하페의 수호기사가 될 자격을 얻는 것뿐.
진짜는 수호기사가 된 이후에도 아무도 나를 무시 못 할 정도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기습은 오히려 그런 인정을 깎아먹겠지.
무엇보다도…
‘질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나는 검을 치켜세우며 씨익 웃었다.
“제대로 하마.”
스윽. 검을 아래로 눕힌 기사가 은빛의 아우라를 뿜으며 덤벼든다.
아까와는 다른 확실한 공격.
나는 내 안에 내재된 힘을 아주 ‘조금’ 운용했다.
이제 막 운행을 시작한 연푸른 힘이 구불구불한 마나선을 타고 힘차게 달려나간다.
콰가가가가가!! 소리가 들린다 착각할 정도로 거친 운행.
그러나 그런 착각과 달리 마나를 쓰지 않는 검은 정순하기 그지없었다.
피잇.
유려한 검의 일격은 은빛의 검을 박살 내고 갑주를 뚫는다.
“...!”
“막아라!”
부단장의 말과 함께 뛰쳐나온 기사 셋이 각각의 방패를 세우고 빈 기사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우습다는 듯이 일격은 방패 두 개를 두동강 내고 마지막 방패의 기다란 실선을 남기고 나서야 간신히 질주를 멈추었다.
“미친….”
“방금 뭔 일이 일어난 거지?”
“방패가…”
세 명의 기사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부러진 방패들을 내려보았다.
그러고는 그 원인을 쳐다보았다.
원인은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
“...푸하.”
「─」
치직.
“허억… 후아…”
연푸른 힘은 거칠게 질주하던 운행을 멈추고 마나선은 다시 쪼그라들었다.
거대한 철로에서 산의 샛길로 변한 수준.
아직 마력을 익히지 않았기에 이 정도지만 제대로 마력을 익히고 이 힘을 수련한다면 아까와 비슷한 수준의 능력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을 거다.
‘그래도 마지막 한 번 쯤은 더 쓸 수 있겠지.’
“윤!”
“하페.”
나는 반쯤 쓰러지며 하페의 부축을 받았다.
약간 어질어질하지만 성녀에게서 도망치던 그때에 비하면 아직은 버틸만하다.
“무리하지 말라니까…”
“무리 아니야…”
이 정도야 무리가 아니다.
하페를 그냥 보내야 하는 상황에 비하면야.
“무리는 아니지.”
나는 씨익 웃어줬고 하페는 물기 가득한 눈을 으로 바라보며 웃었다.
떨리는 손으로 하페의 볼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웃다 울으면…”
“...더러운 소리는 하지 마.”
***
이번에는 한 시간 정도의 제법 긴 여유시간을 가졌다.
내 상태도 상태지만 저들에게 무언가 회의할 상황이 생겼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렇겠지.’
부단장의 독단으로 진행된 승부.
예언의 성녀는 오직 하페만을 빠르게 데려올 것을 명했으나 부단장은 시간을 달라는 말과 함께 그것을 미뤘다.
이 승부를 건 것은 나를 일종의 배려를 해준 것.
나를 자연스레 포기시키면서도 하페를 끌고 간다는 명분을 없애려는 게 목적이었을 거다.
수호기사는 정말 그 어느 누가 덤벼도 이길 정도로 강해야 하니까.
그게 아니라면 성녀의 곁에는 그 누구도 있어선 안된다.
하지만 내가 이겨버렸고, 이제는 정말 내가 하페의 수호기사로 갈 수밖에 없다.
단장이 아닌 부단장이지만 성녀의 결정을 미룰정도로 권력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니 맹세를 어기진 않을 거다.
‘성녀의 얼굴이 보고 싶네.’
과연 개미라 치부했던 내가 하페와 같이 간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그때도 개미라고 무시할까?
“기대되네.”
“응? 뭐가?”
“아냐.”
나는 여전히 걱정에 가득 찬 하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페는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마지막 승부다, 김윤.”
“예 나갑니… 다?”
집에 들어가 있던 내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보인 것은 전투를 준비하는 거대한 체구의 남자였다.
샛노란 색이 눈에 띄는 머리칼과 예기가 들어갈까 의심이 되는 거대한 팔뚝.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체격과 기다란 검.
이 사태의 원흉이자 저 자리에 있어서는 안되는 부단장이다.
“...원래 예정된 사람이 있지 않았습니까?”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부단장은 자신의 머리를 쓸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뀌었다.”
“갑자기요? 그것도 부단장?”
강해지긴 했지만 그것은 기사에 한정된 수준.
아직 정예 기사도 이길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부단장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그렇게까지 제가 하페의 옆에 있는 게 꼴 보기 싫습니까?”
“...별말 안 하겠다. 지금 포기해라. 그러면 몸은 멀쩡할 거다.”
“협박입니까?”
“충고다. 재능있는 새싹을 밟는 건 이쪽에서도 원하지 않거든.”
부단장은 정말 진심이라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승부를 포기하고 기사의 일원으로 들어와라. 그러면 4년. 아니, 2년 안에 너를 정예 기사로 올려주마.”
“그래도 하페의 옆에 있지는 못하겠죠.”
“꼭 같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꼭 있어야 합니다.”
“...정말 그러고 싶나? 수호기사는─”
“이제 와서 그러는 건 너무 추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당신의 맹세가 고작 그 정도였나요?”
멈칫.
맹세의 언급을 들은 부단장은 입을 달싹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후회하지 마라.”
“안 합니다.”
그는 등을 돌려 제 자리로 돌아갔지만 나는 생각을 달리했다.
지금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강자.
하지만 오히려 이건 기회일 수 있다.
‘부단장은 기사단 중 두 번째로 강한 인물. 이기면 후작령내에서도 나의 입지가 더 커질 수 있어.’
물론 기사의 소속되지 않은 마법사나 신의 힘을 받은 성녀등이 있지만 기사단의 부단장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다.
다만 이기려면 하페가 걱정하는 ‘무리’를 해야 하는데…
“다녀와 윤.”
“하페.”
그녀는 싱긋 웃었다.
“가지 말라 해도 갈꺼잖아?”
“역시.”
넌 날 너무 잘 알아.
나는 대결의 장으로 나섰다.
***
기사단원과 마을 사람 모두를 포함해 이 일대의 전원이 보고 있는 승부.
심지어 마을 사람들이 키우는 동물들도 이 대결을 보고 있다.
‘...저건 왜 데리고 온 거야?’
나는 별말 없이 검을 세웠고 부단장도 나에게 있어 대검이지만 그에게는 장검인 검을 들었다.
“생채기라도 낸다면 내가 성녀님께 반하는 한이 있더라도 널 수호기사로 만들어주마.”
“예.”
“그럼 들어와라.”
선공을 양보해 주겠다는 부단장.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바로 힘의 운행을 시작했다.
지난 3일 동안 오로지 힘의 운행을 위해 수련했다.
비록 내가 신의 힘을 자주 사용해 본 경험은 없지만 신의 힘을 오랫동안 익혀온 하페의 도움을 받아 힘을 좀 더 자연스레 쓰는 법을 배웠다.
온몸에 퍼진 마나선에 힘이라는 윤활유를 붇고 그 길을 토대로 힘을 빠른 속도로 이동시켜 육신을 기민하게 만든다.
“흐읍…”
기민해진 몸의 손끝 하나, 발끝 하나에 힘이 깃들고 심장 아랫부분에 위치한 마력 회로가 거친 속도로 돌아간다.
그렇게 운행한 힘의 도착지는 손.
정확히는 손에 들린 은빛의 검.
화륵.
“거, 검기?!”
“마나도 없이 검기를…”
“저건 정말 재능이군.”
일렁이는 연푸른 검기를 본 놀란 기사들과 달리 부단장은 여전히 씁쓸한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것에 반발심이 들어 힘의 운용을 조금 더 늘려 검을 휘감았다.
연푸른 검기의 빛이 더욱 강렬해진다.
“갑니다.”
“와봐라.”
후웅─!
단순한 공격이지만 그 파괴력은 그 어떠한 것보다 강한 위대한 존재의 가장 기초적인 검술.
최강의 힘을 가진 남자가 그려낸 규격(??)을 무너트리는 검술.
일격(一?).
일격은 공간을 찢듯이 날아가 그대로 부단장을 덮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