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3화 〉 27. 가치있는 선택 (3) (293/318)

〈 293화 〉 27. 가치있는 선택 (3)

* * *

***

‘베그리도?’

들어본 적이 있다.

신들이 꺼리는 존재이자 세계를 통틀어 유일한 위신의 사도이자 성자.

모든 신들에게 배척받지만 그의 신인 위신의 신전이 없는 건 아니다.

지금은 신이 개입할 수 없는 인간의 시대고, 신은 얼마든지 성자와 성녀를 만들 수 있으니까.

‘물론 신전이라기에는 규모가 많이 작긴 하지만.’

‘뭐야?’

‘으음…’

나와 하페는 별빛을 이용해 기척을 가린 체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거대한 오크의 시체 위에 앉아있는 베그리도.

아래에 위치한 전지의 성녀와 아론디 왕국의 후계자 리퍼 아론디.

…그러고 보니 아츠브루 공작은 저 사람을 죽여달라 했었지.

나는 거절했지만, 어쩌면 저 성자의 목적이 황제의 후계일지도 모른다.

[반갑군요.]

“...그대가 어째서 이곳에 있지? 아래에 남기로 하지 않았나?”

[그랬죠. 지금은 아닙니다.]

리퍼와 베그리도는 서로 신경전을 벌였다.

그도 그럴 것이 베그리도는 멋대로 마왕성에 오르고 마수를 잡았음에도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듯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게다가 더 의심스러운 점은 한 층에 다섯 명이 있다는 점.

본래라면 40층 이후로 세 명 이상 뭉치는 게 불가능했으나 이층은 나와 하페, 그리고 앞선 세 사람을 포함해 다섯 명이나 같은 층 안에 있다.

우리가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

[흠.]

베그리도는 시체 위에서 천천히 내려온다.

워낙 크기가 큰 마수 위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내려오는데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주위는 어때.’

‘공간 자체가 뒤틀려 있어. 일부로 이 층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걸 거야.’

하페의 별빛이 주위를 관조한다.

확실히 이전의 층들보다 훨씬 이질적인 공간.

나 역시도 다름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형이 보냈나?”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베그리도의 물음에 황제의 후계자는 회색빛 검강을 날렸다.

평범한 소드 마스터라기에는 꽤나 강력한 검강.

그것은 단지 소드 마스터 때문이 아니다.

‘황제의 피.’

아론디 왕국에는 황제의 후계가 되면 하사받는 보물이 있다.

오로지 황제의 핏줄만이 마실 수 있는 ‘성배’.

오래전 축복의 신이 인간계를 떠나기 전 왕국의 내려준 축복으로, 마시기만 해도 모든 신체능력이 상승하고 마력이 대폭 상승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성배를 마시기 이전에도 소드 마스터였던 그는 성배를 마신 뒤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대마법사 수준의 힘을 가진 사도라면 이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빛이여.]

모조의 빛이 베그리도의 육신을 대신했고 검강은 허무하게 그를 통과해 애꿎은 벽만을 타격했다.

빛으로 변화했던 육신은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황제의 후계자는 살기를 내뿜었다.

나와 몸이 꼭 붙어 있던 하페는 작게 속삭였다.

‘둘이 같은 힘을 가지고 있어.’

“성배를 마셨구나.”

성배.

신이 인정한 황제의 핏줄만이 얻을 수 있는 힘.

하지만 상대가 위신(?)의 성자.

거짓된 존재는 오래전 거짓된 격을 쌓아올려 신이 되었고, 그것은 자신의 사도에게까지 전해졌다.

[예. 뭐, 수고하라고 음료수 한잔 받았습니다.]

핏줄을 흉내 내는 것 정도야 위신에게 있어 일도 아닌 문제였다.

베그리도는 양 팔을 좌우로 뻗으며 과장된 목소리로 외쳤다.

[어째서 그리 경계하십니까? 저는 마왕 토벌을 위해 이 자리에 올랐습니다. 같이 힘을 써줄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황실을 능멸한 죄. 그 죄는 극히 무겁다.”

[그것이 마왕 토벌을 미루는 것보다 무거운 죄입니까?]

마왕 토벌과 한 국가의 중죄.

어느 쪽이 우선인지 그 누구에게 물어도 마왕 토벌에 손을 들어주겠다만.

“적을 등 뒤에 지고 대적을 맞이할 수 없지.”

안타깝게도 리퍼에게 있어 베그리도는 둘 다 해당되는 존재였다.

[그렇습니까?]

베그리도의 중심으로 모조의 빛이 요동친다.

층을 가득 메운 마기가 모조의 빛에 의해 침식되고 침식된 힘은 다시 베그리도에게 흡수된다.

마치 고치에 감긴 것처럼 몸집이 거대해진 베그리도의 사이. 두 백안이 번뜩인다.

“막겠습니다!”

전지의 성녀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방패를 크게 펼쳤다.

방패는 물질이 아닌 개념에 가까운 능력. 베그리도의 능력을 일부 파악한 방패는 순식간에 수백 개로 분리된다.

수백 개의 방패는 성녀와 리퍼 둘의 육신 전체를 보호했다.

[빛이 있으리라.]

“죽어라.”

빛의 쇄도와 회색빛의 검강이 충돌한다.

층이 울리고 수천, 수만 개의 빛의 실들이 방패를 두들긴다.

그 사이 회색빛의 검강은 실들을 뚫고 베그리도를 향해 질주했다.

“왼쪽입니다!”

방패를 이용해 대상을 파악한 성녀가 급히 리퍼에게 알린다.

리퍼는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검강을 한차례 더 쏘아냈다.

상대는 위신의 성자.

저기 있는 고치 덩어리와 실들의 대부분은 가짜.

진짜는 왼쪽에 있는 마수의 시체들 사이에 있었다.

검강은 베그리도의 육신을 베어낸다.

피가 터지고 육신이 순식간에 산화하지만 리퍼는 혀를 차며 강기를 온몸에 둘렀다.

산화한 피가 빛으로 변화되어 그대로 공격.

“엇…”

순식간에 방패를 뚫고 들어온 모조의 빛이 그들의 육신을 꿰뚫었다.

[...!]

“하페!”

정확히는 별빛을 꿰뚫었다.

“자네들은…”

리퍼는 강기를 뚫고 들어온 별빛에 놀라고, 그 위를 넘어 연푸른 검강을 두른 나를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부상당한 소드 마스터에게 건네받은 용의 비늘로 만들어진 적화검.

레드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어진 검은 이름처럼 뜨거운 불이 나가는 대신 강기의 운용을 극대화 시키는 검으로, 지금의 나에게 있어 가장 유용한 무기였다.

‘일격 정도만 써볼까.’

또다시 육신을 뒤바꾼 베그리도를 찾기 위해 하페에게 저들의 보호를 맡긴 뒤 일격을 원으로 휘둘렀다.

콰가가가가가가!!!!

돌아가는 일격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 층 전체를 터트린다.

어마어마한 폭발.

이걸 레이나가 본다면 마력 폭탄은 무슨 의미가 있지 하며 자신의 폭탄을 쓰레기통에 넣을 것 같은 위력이었다.

“후우…”

딱히 지치진 않지만 그래도 달라 올랐던 숨을 내쉬며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뒤를 보니 입이 떡 벌어진 성녀와 황제의 후계가 보인다.

유일하게 멀쩡한 건 하페 뿐.

“대단하군. 말로 들은 것보다 상상이상이야.”

“과찬이십니다.”

리퍼는 감탄을 내뱉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수는커녕 완전히 초토화되어 흔적도 남지 않은 60층.

유일하게 멀쩡한 건 층을 구성하는 바닥 타일들과 벽면.

그리고 천장뿐이었다.

‘일격 정도로는 흠집도 안 나는구나.’

예상은 했지만 마왕은 여전히 강하다.

적어도 두 번째 기술. 이격을 써야 하겠지.

아니, 어쩌면 그 정도의 기술로도 어림없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하페에게 다가가던 순간.

육신을 집어삼킬 것 같은 살기에 나는 강기를 극대화한 후 하페를 끌어안아 바닥을 굴렀다.

“야, 뭘…”

순식간에 우리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흑백의 빛.

빛은 순식간에 성녀의 심장을 꿰뚫는다.

성녀의 몸이 한순간 위로 붕 뜨고 벌레처럼 달려든 빛은 성녀의 몸을 뜯어먹듯이 삼키기 시작했다.

리퍼는 벽면에 처박힌 체 회생이 불가능한 양팔을 부여잡으며 피를 토하고 있었다.

한순간에 일어난 사태.

비록 잠깐 방심하긴 했다만 다들 힘을 거두지 않고 있었고, 나 역시 언제든 대처할 수 있도록 강기를 두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완벽히 대처하지 못했다.

뚜벅.

어둠 사이로 끔찍한 마기가 흐르는 남자가 걸어 나온다.

그의 손에 들린 작은 새장 속에는 더 이상 빛이라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요동치고 있었다.

“이거. 재미난 일이 있어서 구경을 나와 봤거늘.”

짙은 마기로 둘러진 남자는 흥미로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베그리도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강한. 더 사악한 기운을 내뿜는 악의 종주.

모든 마(?)의 군주.

“마, 마왕…?”

황제의 후계는 검을 떨구며 덜덜 떨리는 몸으로 바닥을 기었다.

마왕은 싸늘한 시선으로 리퍼를 내려다보았다.

잘 보이진 않지만 어둠 속에 가려진 붉은 눈이 리퍼의 육신을 넘어 영혼을 흔들었다.

금방이라도 소멸될 것 같은 불안함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마왕은 재미가 없어졌는지 우리 쪽을 돌아봤다.

“미안하군. 나설 생각은 없었는데. 이 녀석이 워낙 날뛰어서 말이야.”

철컹철컹.

새장 속 베그리도로 추정되는 빛이 날뛴다.

이미 이지를 잃어버린 듯 마구잡이로 날뛰다 마왕의 포근한 마기가 덮어지자 행동력을 잃고 잠잠해졌다.

‘포근해?’

나는 헛웃음을 내지었다.

분명 최대의 적이자 최악의 적을 마주했음에도 그리 꺼려지지 않았다.

그저 대상이 얼마냐 강하냐에 대한 미지의 두려움뿐.

마기나 마왕 자체의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왕은 나를 넘어 하페를 보았다.

‘...?’

묘하게 요동치는 붉은 눈.

그러나 하페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하페에게서 시선을 뗐다.

나는 고민했다.

‘지금 마왕을 상대해야 하나.’

비록 전력이 부족하긴 하지만 지금 마왕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문제는 아직 공간을 다루는 간부를 처치하지 못했다는 점.

싸우다가 마왕이 도망치거나 하페와 내가 떨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고민이 많은가 보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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