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화 〉 27. 가치있는 선택 (7)
* * *
***
이기적이라.
솔직히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나는 동화 속 영웅처럼 모두를 지키지도, 그 어떤 희생자 없이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니까.
‘세상은 동화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그저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한다.
그러다 도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라면 나와 내 주변을 지키는 선에서 물러난다.
그 정도면 되겠지.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
아프로의 분홍빛 마력이 마기를 억누르고 주위를 장악한다.
더 이상 마왕의 탑이라고 하기도 뭐 한 공간.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지금의 우리보다는 우리의 힘까지 모두 흡수한 아프로가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다만 한 가지 문제 되는 부분이 있다.
“마왕.”
“...?”
“마왕은 어떻게 잡으실 거죠. 마왕은 영혼을 소멸시키지 않는 한 죽이는 게 불가능합니다.”
마왕은 신을 초월한 존재.
어쭙잖게 육신을 파하고 억제하는 것만으로는 마왕을 잡지 못한다.
이건 확실하다.
내가 쓴 두 번째 기술도 간신히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정도로 그쳤으니까.
아프로는 다시 온건히 설득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깃든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죽이는 게 아니야. 나는, 아니 우리는 죽이지 못해.”
“...네?”
하페의 물음에 아프로는 분홍빛 손에 권능을 하나 올려냈다.
여신의 그것과 같은 힘.
“내가 할 건 봉인이야. 여신께서 행하신 봉인.”
오래전, 여신은 마왕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판단해 자신의 존재를 걸고 마왕을 봉인했다.
무려 신 중에 최상위 격에 속하는 그녀였기에 마왕조차 수백 년 동안 잠들 수밖에 없었고, 지금에 와서야 간신히 회복하여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려 하고 있다.
그런데 또다시 봉인이라…
“이게 최선이다. 죽이는 것은 결코 불가능해. 이건 내가 만나봤기에 확신할 수 있어.”
“......”
“너희는 아직 마왕이 얼마나 강한지 몰라. 우선 봉인하는 것이 최대의─”
“나도 만났습니다. 직접 칼도 겨눠봤고요.”
“...뭐?”
순간 공간을 메운 모든 마력들이 멈칫한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
나는 적화검을 들어 이격을 시전했다.
그녀의 왼편을 스치고 지나가는 연푸른 검기.
모든 마력과 마기를 뚫고 지나간 검기는 마왕의 탑 벽면에 생채기를 남겼다.
“사라지긴 했지만 분명 피해를 주었습니다. 육신을 넘어 영혼까지 피해를 주었어요.”
“......”
“힘든 싸움이 되겠지만 같이 싸운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봉인을 미뤄 후대에 맡긴다 해도 후대가 마왕을 이긴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또다시 봉인을 하여 후대에게 맡긴다.
어찌 보면 현명한 판단일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마왕이 너무 강하니 인류의 전력을 기른 뒤 마왕이 약해질 순간에 단숨에 기습하는 것.
그러나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제각각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마왕 토벌을 미루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제야 나선 모습을.
게다가 같은 아군을 노리는 사람 역시 있었다.
수백 년이 또 지난다 한들 그것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저희와 함께 가요. 가서 함께 마왕을 상대하는 겁니다.”
“...같이?”
“네. 그리고 당신의 말대로 존재를 걸어서라도.”
나는 최선을 다할 거다.
비록 나의 최우선 순위는 나와 하페가 우선이다.
하지만 그게 남을 버리거나 저버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
나는 인류를 위해 최선을 다해 마왕을 저지할 것이며 죽어간 이들을 대신해서라도 내 전력을 다해 싸울 거다.
“같이라…”
같이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중얼거린 아프로는 문득 깔깔 웃기 시작한다.
여기가 동화 같은 상황이라면 나의 용사 같은 의지를 본 성녀는 힘을 건네주거나 같이 마왕을 상대하러 탑을 오르겠지만.
“너무 어리석어.”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정말 그런 각오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꼬맹아.”
그녀는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수한 일을 겪었고, 그런 그녀였기에 너무나도 확고한 신념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
고작 어린 사도 두명이 당당한 말투와 생각을 가지고 설득한다 한들 들어먹을 사람이 아니었다.
“이곳에 온 11명 중 4명은 인류의 미래를 거절했단다.”
우웅.
“자신은 죽기 싫다고. 네까짓 게 뭔데 희생을 강요하냐고 소리쳤지.”
그그그극…!
“그런 아이들은 모두 이미 미래를 위해 헌신했다.”
소드 마스터급의 강자 8명의 힘이 그녀의 몸에 들어찬다.
그들의 헌신으로 만들어진 힘은 그녀의 영혼을 활성화시키고 힘의 부담은 헌신의 신이 내어준 격이 감당한다.
뿌드득─! 터져나가는 육신.
힘을 온전히 다루기 위해 육신의 소모 값을 극한으로 늘리고 영혼의 수명 역시 빠르게 줄어든다.
어차피 그녀의 목적은 마왕 봉인.
인류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그녀는 이제 자기 자신마저 희생하려 한다.
허공으로 높이 떠오른 그녀는 강대한 기운을 담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익숙한 기운.
[조금 아프더라도 참거라. 정신 차려보면 다 끝나 있을 거다.]
“...성배. 황제도 당신이 흡수했나요?”
[에린이라는 아이가 가지고 온 힘이지.]
“하…”
솔직히 조금 웃음이 난다.
그 철저한 예언의 성녀조차도 눈앞의 아프로의 ‘인류’를 위해 희생했다.
이유가 뭘까.
그것이 가장 인류 생존에 가능성 있는 미래라서?
아니면 그냥 아프로가 이길 것 같아서?
…모르겠다.
“...윤아.”
하페가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잠깐 마주한다.
아프로는 마지막 순간을 주기라도 하듯이 높이 뜬 체 가만히 내려다 보기만 하고 있다.
그래, 생각을 바로잡자.
솔직히 지금 싸움은 이겨도 손해, 져도 손해다.
지면 손해 수준이 아니지.
그냥 죽어버리니.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건가.
시작은 그저 하페의 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홀로 하페를 신전에 보내는 것은 원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게 하페의 옆에 있기만을 원해서는 절대 아니었다.
‘두 번째. 두 번째. 두 번째.’
나는 그녀의 옆에 하나의 온전한 주체로서 당당히 있기를 원했고, 그것을 넘어 주위의 모두를 지킬 만큼의 힘을 얻기를 원했다.
‘불가능. 불가능. 그리고… 불가능. ’
그리고 지금.
나는 선택에 기로에 놓여있다.
‘불가하다면.’
인류를 위해서라면 내가 희생해야 한다.
단, 그렇다면 하페를 지킬 수 없다.
하페를 위해서라면 아프로를 뚫고 지나가야 한다.
단, 그렇다면 마왕을 이길 수 없다.
양자택일.
마치 누군가 악의적으로 만들어둔 듯한, 어느 한쪽을 고르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는 최악의 상황.
하지만 둘 다 옳은 선택지는 아니다.
‘새로운 기술을.’
검이 움직인다.
내 손에 들린 두 개의 검을 넘어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세 번째 검이 생성된다.
영혼을 통해 흘러가는 거대한 기운이 검 하나하나에 깃들고 어마어마한 힘의 폭풍이 내 주위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마왕탑의 타일은 물론 모든 구조물이 뒤틀리고 아프로를 유지하던 힘들은 이미 통제권을 잃고 사방팔방으로 흩어진다.
“───!”
당황하며 뭐라 뭐라 지껄이는 아프로.
하지만 그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검의 운항은 계속된다.
폭력적인 힘의 파도가 나와 그 육신을 흐른다.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친 나의 뇌리에는 하나의 동작이 전해진다.
그리고 그것을 행한다.
「▼최강 」
삼격(三?).
세상이 멈췄다.
***
“뭐야. 재밌게 보고 있었는데.”
‘나’의 검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던 나는 모든 것이 멈춘 육신을 긁적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직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미세하게 보이는 차원의 균열.
이미 아프로는 압도적인 힘의 쇄도에 나가떨어진지 오래고 마왕성은 반쯤 아작이 나있었다.
검의 시작이 되기도 전에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
“시끄러워.”
평소의 귀여웠던 하페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는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은 하페가 아닌 지금 시간대의 하페루아.
“내가 보지 말라고 했지 김윤.”
“도서관에 왔는데 어떻게 책을 안 보겠어.”
“...이래서 내가 따로 보여주려 했는데.”
이러면 괜한 부분까지 보여줘야 하잖아…
하페는 중얼거리며 뚜벅뚜벅 내 쪽으로 걸어왔다.
머리카락과 얼굴. 팔과 몸의 구석구석을 만진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멀쩡하네.”
“멀쩡 안 한 건 또 뭐야.”
“가끔씩 도서관의 이야기를 읽다가 ‘완전 동조화’가 되는 초월자가 몇 있거든. 보통은 나처럼 완전한 초월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체 우연히 도서관에 떨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넌 이레귤러니 상관 없겠지?
그녀는 씨익 웃으며 내 쪽으로 팔짱을 낀다.
갑자기 왜 이래.
“뭔 갑자기 왜 이래야, 윤아. 나랑 결혼하기로 했잖아.”
“......”
오랜만에 생각이 읽히니 기분이 묘하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은 나 역시 그녀의 생각을 대충 눈치챌 수 있다는 점 정도.
아직 자세하게는 알아낼 수 없지만 지금 그녀의 기분이 굉장히 좋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일은 잘 된 거야?”
“대충은. 트리거에 갑자기 이 시점의 네가 튀어나와서 깜짝 놀라긴 했는데. 뭐, 적당히 잘 처리했어.”
“그 네가 무릎베개 하고 있던 거?”
“응. 뿌려둔 게 많아서 가끔씩 걸리더라고.”
후후 웃으며 사악한 미소를 짓는 하페.
순간 오싹함이 들어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손을 까딱여 내 몸을 낮춘 뒤 귀에 작게 속삭였다.
“우리 김다윤 앞에서 이러면 아주 좋아하겠다. 그치?”
“...살려줘.”
난 그 분노를 견뎌낼 자신이 없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설득하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