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8화 〉 28. 양손의 꽃(1) (298/318)

〈 298화 〉 28. 양손의 꽃(1)

* * *

***

나는 반쯤 부서진 마왕성의 중앙에 섰다.

딸각. 소리와 함께 손목에 걸린 마도구가 빛을 내기 시작한다.

「▲저장 」

마왕성을 이루는 모든 마기를 비롯한 힘들이 마도구로 흡수된다.

평범한 신 정도는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릴 정도의 크기.

이윽고 모든 힘이 빨려 들어간 마도구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부서져 바닥을 구른다.

“됐다.”

만상의 도서관은 어디까지나 기록을 읽는 곳.

이곳에서 깨달음이나 지식을 얻어 갈 수는 있지만 힘이나 물질적인 무언가를 가져가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의 특이점과 상대의 힘을 저장할 수 있는 ‘저장’이 있다면 편법으로 얻어 갈 수 있었다.

“그건 어디다 쓰게?”

“마왕전.”

나는 힘을 갈무리하며 하페를 돌아봤다.

솔직히 지금 상태라면 월드 어드벤처의 초월자, 제르노스라 한들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이 힘을. 정확히는 표본을 얻어 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 아빠라 그래?”

악마족의 공주이자 마왕의 딸인 하페루아는 제르노스의 자식.

…그래도 치고받는 것보단 깔끔히 보내드리는 게 맞겠지.

어차피 진짜도 아니고 말이다.

“흐응… 그래도 우리 아빠인데.”

“그러는 너는 네 아빠를 베이스로 만들어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하냐.”

여기 위에 있던 마왕을 포함하더라도 이미 수십, 수백 번동안 하페는 제르노스의 육신을 토대로 마왕을 구성했다.

사골을 우려도 그 정도는 안 나올 거다.

“그 정도면 싸. 나 버리고 갔잖아.”

“...버렸다고 하기는 뭐 하지 않냐? 어쩔 수 없는.”

“지금 내 편 안 들고 아빠 편 드는 거야?”

“......”

***

[즐거우셨나요?]

“그래.”

[그럼 다음에도 이야기가 읽고 싶으시다면 저를 찾아주세요!]

허공에 둥둥 뜬 하얀 털 뭉치가 인사를 건넨다.

나는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하페의 이야기 속에서 빠져나왔다.

나의 개입으로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긴 했다만 본래의 결말은 비슷했다.

나는 훨씬 더 치열하고, 또 피와 희생을 흘리며 마왕성에 도달한다.

악마와 마수에게 몇 번이고 죽을뻔하고 그때마다 조금씩 깨달음과 힘을 얻어 가며 탑을 오른다.

그리고 마주한 선택의 시간.

하페가 나가떨어지고 나의 죽음이 코앞에 떨어진 그때.

삼격의 시전과 함께 아프로가 베이고 그 힘은 전부 나에게로 스며들었다.

그때 당시의 삼격은 초월자가 된 최강자의 삼격이 아닌, 아직 인간 일때의 삼격이었기에 탑에 충격을 주는 정도로 그쳤다.

그 뒤 마왕전에서 치열하게 승부해 결국 마왕을 이겨낸다.

돌이켜보면 이 일 이후로도 꽤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만큼 세계가 멸망의 위기에 처해도 가장 먼저 서로를 위해 주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이번에는 쉽게 끝났네. 그치?”

“...혹시 안 맞아봤지.”

“어허! 지금 사랑하는 여보를 때리려 하는 거야?”

하페는 내 두 손을 잡으며 악동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지랄맞게도 정말 빠져들 것 같은 외모다.

‘이미 빠져들었나.’

도서관을 나와 어드벤쳐 행성으로 돌아온다.

제단 위에 있던 열쇠가 빠져나오고 어느새 우리는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도시로 이동되어 있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오르바틴이야. 우리가 여기서 처음 만났지.”

멸망한 천사들의 도시.

본래는 폐허 된 도시였는데 지금은 불빛이 들어오고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다.

네츠리 루아의 보고 중에 용사 길드 여럿이 여기에 자리 잡았다는 말을 들었던 거 같은데,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네.

하페는 커다란 건물의 꼭대기에 앉았다.

나 역시도 그 옆에 앉았다.

수많은 불빛들이 우리를 반겨준다.

이제는 지구보다 여기가 더 고향 같은 느낌이다.

“...고마워. 날 믿어줘서.”

하페는 볼을 긁적이며 애써 고개를 돌렸다.

조금 붉어진 그녀의 얼굴.

어쩌면 하페가 행한 것은 일방적인 믿음의 강요일 수도 있다.

계속되는 상황을 요구해 그가 자신에게 맞는 사람이길, 온전히 자신에게 믿음을 주기를 바랐으니까.

실제로 그녀는 나에게 수많은 상황을 제시하고, 또 선택을 강요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녀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었다.

하페로서는 내가 자신의 기억을 읽는 것을 꺼려 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믿고 의지했지만 그것이 온전히 자연스럽다고는 말 못 하니까.

내가 느끼기에는 이 모든 것이 하페가 그저 유용한 말을 얻기 위해 수작을 부렸다 생각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기억을 유지시켰던 초창기 상황에서도 몇번 그런적이 있었고.

“당연한 건데 뭘.”

나는 하페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손의 온기가 마주하고 하페의 보석 같은 붉은 두 눈이 커진다.

나는 손을 잡은 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히 많은 별.

그리고 그 너머의 있는 차원과 다른 세계들.

“의심이 많았겠지. 배신을 당하고 어린 나이에 차원 유랑자로서 살아야 했으니까.”

하페는 스물 정도의 나이에 행성을 넘어 다른 차원으로 추방당했다.

다른 차원.

그것도 사람은 물론 행성도 짓누를 수 있는 초월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누구도 쉽게 믿어서는 안됐다.

하페가 단순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쪼개진 특이점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없었다면 진작에 초월자라는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겠지.

그런 하페에게 일생일대의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는 건 아주 큰 확신이 필요했을 거다.

그 어떠한 변수라도 용납할 만한 확신이.

“난 믿어.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도 좋아.”

“......”

“나라는 사람을 가지려고 수백, 수천년을 노력 했잖아. 훨씬 더 과격한 방법을 쓸 수도 있었는데.”

하페는 기억 조작이나 최면 같은 단순한 방법 대신 오히려 그녀부터가 나를 진심으로 믿어주었다.

자신이 먼저 믿음을 주어야 상대도 믿음을 준다 생각했기에.

“...으으.”

조금. 아니, 많이 붉어진 그녀의 얼굴.

은하수를 담은 듯한 검 보랏빛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미모의 초월자가 있다면 아마 그녀이지 않을까 하는 외모.

아니, 그 초월자라도 하페보다 못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과 눈이 마주한다.

그때처럼 서로를 담았다.

서로가 존재했던 무수히 많은 시간대의 서로를 담는다.

오직 특이점을 가진 이레귤러들만이 할 수 있는 감정 공유.

우리는 순간 서로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

숨겨왔던 이야기까지도. 전부.

서로 입술을 겹쳤다.

그것도 오래.

아주 오래.

‘빅뉴스다냐.’

주황색 고양이가 왔다 간 것도 모른 체 말이다.

***

콰앙!!!

목재인형이 박살 난다.

김윤이 만들어낸 초월자의 힘으로 구성된 튼튼한 전투력 측정기.

한번 부서진 이후로 세 배는 더 튼튼해진 인형이지만 단 한 번의 달의 참격에 의해 박살 나 수많은 조각으로 쪼개진다.

카라라락…

시간이 지나 다시 생성되는 목재 인형.

콰앙!

그리고 다시 부서진다.

“...후우.”

다윤은 숨을 골랐다.

슬슬 힘의 사용도 익숙해지고 월광의 힘 역시 힘의 원리를 잘 알 거 같다.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머지않아 월광의 힘을 완전히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윤 씨는 안오나.”

깨어있을 때 와주셨으면 좋으련만.

여섯 달이 지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깨어난지는 두 달째. 이제는 몸이 멀쩡하니 슬슬 돌아와 한번 합을 겨뤘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물론 다른 합도…’

다윤의 머릿속에 음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그때.

주황색의 무언가가 다윤의 앞으로 떨어졌다.

“레빗?”

“오늘도 이거 하고 있냥?”

주황색의 두툼한 후드와 돌핀 팬츠를 입은 단발머리의 여자.

본래는 메이드 복이나 정장, 그것도 아니면 일반 판타지 복장을 입었는데 요새 용사들이 의류를 많이 팔아서 그런가 저렇게 현대 복장을 입고 돌아다닌다.

저렇게 보니 고양이 상의 레빗은 참으로 귀여우면서도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좀 더 놀다 온다 하지 않았어? 채림이 뻗었다고 들었는데.”

“소식이 있다냥.”

“소식?”

레빗은 킥킥 웃으며 양 검지를 하나씩 올렸다.

다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빗은 신난 듯 말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냐. 어떤 걸 먼저 듣겠냥?”

“으음… 좋은 소식?”

좋은 소식이 뭐가 있더라.

레빗이 좋다고 하는 거라면 맛집이라던가 새로운 당근 요리가 나온 정도─

“주인님이 돌아왔다냐.”

“주인… 윤 씨가?!”

다윤은 검을 꽈악 쥐었다.

드디어. 드디어 돌아오신 건가?

정말 보고 싶었다.

자면서도 늘 생각났고, 언제나 함께 있고 싶었다.

윤 씨는 나의 소중한 사람이니까.

“어디 계신데?! 혹시 먼 곳에 있어?”

아무리 먼 곳이더라도 그래봐야 행성 내면 10분 안에 어디든 주파할 수 있다.

다윤 정도의 초월자라면 행성을 한 바퀴 도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니까.

레빗은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남은 하나의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아직~ 나쁜 소식이 하나 남아있다냥~”

“뭔데? 뭐, 안 좋은 소식이야? 설마! 윤 씨가 다친 거야?”

윤 씨랑 악마가 간 곳은 관리자가 남긴 안배 중 하나.

윤 씨와 그 악마는 정말 강하지만 관리자는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도 쉽사리 승산이 나지 않은 초월자.

그런 초월자가 남긴 안배라면 혹시 위험할 수도 있다.

다윤이 불안한 표정으로 레빗을 바라보자 그녀는 손을 까딱였다.

귀를 대라는 건가?

뭐 때문에…

‘지금 하페루아라는 악마랑 놀고 있다냐. 그것도 아주 찐~ 하게냐.’

“...뭐?”

다윤의 손에 들린 2성급 레전드리 검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

“...뭔가 살기가.”

오싹하다.

아주 오싹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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