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화 〉 28. 양손의 꽃 (2)
* * *
***
초월자는 불사의 존재다.
그 어느 상황이 오더라도 초월자의 격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육체가 불타거나 디딜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더라도 제 존재를 유지한다.
오직 영향을 주는 것은 영혼뿐.
영혼 역시 소멸하지 않을 만큼의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언제든 제힘을 회복할 수 있다.
“...다윤아?”
그런 요소로 인해 나를 비롯한 동료들은 죽음에 대한 것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유저 생활은 영혼을 붙잡아주는 명계와 시스템으로 인해 죽음에서 벗어났고.
더 이상 시스템이 죽음을 유예시켜주지 않을 때에는 이미 초월의 경지에 들어선 상태였다.
다만 그들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다면.
“윤씨이이이이이…”
육체를 넘어 영혼마저 소멸시켜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존재.
같은 초월자다.
***
사람이 언제 죽을까.
거대한 대검에 몸이 꿰뚫릴 때?
끔찍한 마법에 온몸이 타오를 때?
그것도 아니라면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을 때?
나는 셋 다 아니라고 본다.
왜냐면 지금 죽을 거 같거든.
지금 상황을 설명하자면 대충 누워있는 내 위로 셔츠 자락을 잡아뜯을 듯이 잡고 있는 다윤이 올라타있는 상태다.
그것도 완벽한 월광의 힘을 뿌리면서.
「▼월광 」
큼직한 창문 너머, 커튼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달빛의 기운들이 내 몸을 옭아매고 온몸에는 식은땀이 절로 났다.
“...많이 성장했네?”
“왜애애애애애애 저 악마랑.”
훽! 다윤의 머리가 돌아가고 그 시야 사이에는 긴 팔로 이불을 집어 가슴께를 가린 하페는 흐응~ 거리며 웃고만 있다.
저거 저거 일부로 저러는 거다.
일부로 다윤의 반응을 보고 즐기기 위해.
하페는 다윤을 인정했다.
비록 하페가 먼저 시작이고 나와 많은 공유를 이룬 상태에서 기억이 지워졌다.
어찌 보면 하페는 뒤늦게 나에게 접근한 다윤이 얄미워 보일 수도 있다.
‘김다윤 정도라면 괜찮아.’
하지만 하페는 다윤의 존재를 인정했다.
내가 기억을 못 할 때부터 다윤이를 떨어트려 놓을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녀는 나와 다윤의 교제를 도와주기까지 했다.
다윤이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다윤이와 만날 때마다 기묘하게 자리를 비웠으니까.
‘...어쩌면 이 순간만을 기다렸을지도.’
“후으으으으…”
하지만 다윤은 어떨까.
다윤이는 하페를 인정할 수 있을까?
“진정하고 내 말좀 들어봐.”
“어떻게 진정을.”
꽈아아아악!!
멱살 부분이 심하게 쪼여진다.
최강자의 목재 인형을 상대할 때도 이 정도로 두렵지 않았는데.
진짜 영혼이 소멸될 것 같은 느낌이다.
살려줘.
“케엑.”
“나. 윤 씨. 많이 기다렸어요. 육체와 영혼이 힘에 짓눌리면서도. 계속.”
뚝. 뚜욱.
투명한 눈물방울들이 내 가슴팍으로 떨어진다.
예쁜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다, 다윤아?”
“자면서도 기다리고, 일어나서도 기다리고, 훈련하면서도…”
흐윽.
울음이 터져 나온다.
방안에 울음소리가 울려퍼진다.
나는 그런 그녀를 아무 말 없이 안쪽으로 끌어안았다.
울음은 계속 이어진다.
“나쁜 남자네.”
“그러게요. 길드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냐아냐아!”
팝콘을 먹고 있는 네츠리 루아와 등 뒤에 무기들을 엄청 달고 있는 채로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는 채림.
그리고 불소스 당근 치킨을 먹고 있는 레빗이 보인다.
…쟤들은 언제 왔어?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을 받으며 하페를 바라봤다.
대화는 필요 없다.
이미 읽었으니까.
하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관람객 세명을 대리고 방에서 사라졌다.
***
울음소리가 잦아진다.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시작은 하페였고, 지금은 다윤이었다.
도서관 이전까지의 나는 하페와 어느 정도의 친분을 유지했지만 연인까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미 다윤이가 있었고 지구의 인간이었던 나는 한 명이 한 명을 사랑하는 문화에서 살아 왔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기억을 모두 떠올린 나는 이미 지구에서의 시간보다 어드벤처 내에서의 시간이 수 배 더 길었다.
다윤 역시도 어드벤처 쪽이 많은 건 마찬가지.
하지만 우리는 아직 초월자보다 인간에 더 가깝다. 때문에 그런 생각이 쉽사리 바뀌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다윤아.”
“...네에.”
“지금부터 얘기를 하나 들려주려고 하는데. 들어줄래?”
하페는 나의 연인이 맞다.
기억을 잃기 전의 연인.
기억을 잃었다고 나 몰라라 할 인연도 아니고 그녀와의 생활은 이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현재의 연인을 버린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아직도 다윤이를 사랑하니까.
“...네.”
“좋아.”
나는 오래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처음부터 예상은 했다.
윤 씨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심상치 않았으니까.
늘 새로운 길로 인도하고 우리 모두를 아껴주고 배려해주었다.
때로는 이상한 개그를 치는 남자 긴 했으나 돌이켜보면 그런 거 하나하나 역시 재밌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지고, 힘없이 쓰러져 가는 사람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불의보다는 정의를 좋아하고 환각 속 갇혀있던 자신을 왕자님처럼 구출하러 오기까지 했다.
상처만 받았던 과거를 잊을 만큼의 즐거운 나날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힘 없이 그저 휩쓸리다 모든 것을 망쳐버린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 더 불안했다.
‘이런 좋은 사람 옆에는 반드시 누군가 있기 마련이니.’
악마, 하페루아가 처음 자신들과 합류했을 때 묘한 기류를 느꼈다.
윤 씨와 묘하게 친한. 하지만 ‘아직은’ 친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
명분만 있다면 언제든 한없이 가까워질 것 같은 사이.
그래서 그녀를 더욱 경계했지만 그녀를 부르는 명칭이나 외모에 비해 그다지 나쁜 사람. 아니, 악마는 아니었다.
장난기가 많은 게 흠이지만 인간 위주의 관점만 벗어난다면 그리 나쁜 악마는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이곳, 행성의 존재들을 아끼는 그녀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윤 씨가 말한다.
하페루아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연인이었던 사람이라고.
오래전 차원을 추방당하고 이리저리 떠돌며 돌아와 복수를 계획했다고.
스스로의 기억을 지우고 윤 씨를 좋아하게 됐다는 말에 믿어지지가 않았다.
모든 선입견과 힘으로서의 우위, 모든 격차를 내려놓고 동등한 조건에서 사랑하기 위해.
“......”
“나는 하페를 그냥 둘 수 없어. 도와주기로 했으니. 도와줘야지.”
“...그런가요.”
웃음이 난다.
누가 누구를 인정하니 마네 한걸까.
도둑고양이처럼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자신이었는데.
문뜩 과거가 스멀스멀 올라옴에 몸을 뜨게 만들었다.
이곳에 있기에는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어딜 가.”
그때. 조금 올랐던 자신의 몸이 다시 아래로 가라앉는다.
눈이 휘둥그레 떠지자 김윤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설마 도망가려고 한 거야?”
“전, 전…”
“좋아해.”
아니, 사랑해.
“난 너를 계속 사랑하고 넌 내 거야. 그러니 멋대로 도망칠 생각하지 마.”
“그 악마… 아니, 하페루아는요?”
정말 괜찮은 건지.
오히려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자신을 떨궈내려 하지 않을지.
윤 씨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좋아할걸? 걔는 그런 애거든.”
“......”
“그러니 자신감 가져도 돼. 진심이야.”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친다.
이건 진심이다.
하페는 그 누가 보더라도 홀릴만한 외모를 가졌지만 다윤이가 그에 못 미치는 건 아니다.
다윤이 역시 내가 사랑할 만큼 아름다우니까.
그녀가 내 품을 파고든다.
“사랑해요. 저도.”
***
“역시 길드장님. 이걸 사네요.”
“후우… 스승님도 참 죄 많은 사람이네.”
“역시 인간은 재밌다냐.”
길드의 여성 삼인방은 큼지막한 문에 착 달라붙은 체 소리를 듣고 있었다.
물론 셋 모두 방 너머의 자세한 상황을 보는 건 일도 아닌 문제지만 나름의 배려를 위해 방 너머의 상황까지는 보지 않았다.
“뭐해?”
어느새 나타난 검 보랏빛의 드레스와 새햐얀 털을 두른 어깨에 두른 하페루아는 셋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들은 잠깐 문에 기대다 문득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사귀시는 거 맞죠?”
“냐아냐야냐아!!”
“...에휴.”
“어디 가요! 설명해 주고 가세요!”
“냐아아!”
하페루아는 별 볼일 없다는 듯이 화려한 고성의 복도를 지나쳤고 채림과 레빗을 그 뒤를 열심히 쫓아갔다.
혼자 남은 네츠리 루아는 곰곰이 벽면에 기대었다.
“...으음. 이러면 나도 가능성은. 없겠지.”
지금도 이런데 자신이 되겠는가?
특별히 교류도 없고 힘도 없는 자신이.
녹색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파란색 앵무새를 날렸다.
앵무새는 이윽고 세 마리로 분리되어 에메랄드빛의 마력을 뿜어내며 각자 지정된 위치를 향해 편지를 든 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이러지 말고 일이나 하자.
아직 길드의 일들이 산적해 있다.
두 사람이 비웠던 길고 긴 6개월.
최후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