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00화 〉 29. 오래된 적수 (1) (300/318)

〈 300화 〉 29. 오래된 적수 (1)

* * *

***

하나의 점으로 시작된 창조는 무수히 많은 세계를 만들었다.

수많은 차원, 그 차원 속에 비롯된 무수히 많은 행성들.

그 세계 중 단 하나.

하나에서 시작된 두 가지의 존재가 있었다.

빛.

그리고 어둠.

빛은 어둠이 드리운 곳을 밝혀 세상을 비추었고, 네 가지의 정령이 가꿔낸 땅을 더욱 발전시켰다.

어둠은 그에 대척하여 영역을 꾸려나갔다.

빛은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그를 못마땅해 하였지만 직접 나서서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두 태초의 존재는 서로의 영역을 고수하며 자신의 후대들은 조금씩 영역을 넓혀나간다.

아주 조그만 영역에서 시작된 두 존재의 후대는 서로서로 영역을 넓히고 넓히다 결국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이 전쟁의 시작이었다.

***

나는 장비를 한번 점검했다.

늘 입던 그라티아 장비는 물론이고 평소에 들고 다니지 않는 레전드리 장비도 하나하나 착용해 전투력을 높인다.

다른 길드원들도 마찬가지.

“베린은 안 오는 건가.”

“그렇다냥.”

나의 물음에 귀를 쫑긋 세운 레빗은 당근 소시지를 먹으며 답했다.

베린은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령인 세피드와 함께 다른 세계로 떠난 지 오래였다.

다른 차원은 꽤나 위험한 환경이다만 세피드가 있으니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을 거다.

‘과연 얼마나 강해질지.’

조금은 기대 된다.

“좋아. 그럼 가보자고.”

­알겠습니다.

전보다 더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하는 베타는 허공에 손잡이를 잡듯이 손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앞으로 밀었다.

드드드드득─!

상공 수천 미터위에 떠있던 하늘섬의 밑바닥과 옆면에 마도 공학의 결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면적만 수 킬로의 달하는 남색의 둥그런 원 모양의 이동 장치.

그 안쪽은 세 겹의 원이 안쪽으로 말려들어 있었고 원의 끄트머리는 연푸른 광자 에너지가 쨍하게 흐르고 있었다.

지구의 3배에 달하는 행성을 3초 만에 어디든 주파할 수 있는 초월 병기.

나와 하페의 초월의 힘.

그리고 콜트와 베타의 마도 공학을 섞어 만들어낸 연구의 결정체.

“출발할까요?”

허공의 푸른 인터페이스를 띄워놓은 콜트가 말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양아치처럼 보였는데 전투라고 흰색의 함장복을 입은 걸 보니 꽤나 신사적이게 보였다.

나는 가기 전 한 번씩 길드원들을 돌아보았다.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있는 무기를 점검하는 채림.

여우불을 두르며 진지한 표정으로 서있는 이랑.

저 멀리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하페.

혹여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길드 내에 민간인들을 지하 방공호로 대피시킨 네츠리 루아와 내 옆에 당당히 선 다윤까지.

“마왕성, 하펠론으로.”

­길드 마스터, 오너의 명령 승인. 초고도 공간 도약을 시작합니다.

하늘섬의 하늘에 둥그렇게 광자의 에너지막이 덮여씌워지고 그대로 클로킹되어 모습을 완전히 감출 때쯤.

이미 하늘섬은 마왕성 상공에 위치해 있었다.

***

“...손님이 온 모양이군.”

“손님?”

“그렇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라.”

성의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왕좌의 옆. 자신의 오래된 애병을 집어 든다.

때가 된 모양이지.

언제 오나 한참 기다리고 있었다.

애병은 천천히 올라오는 적을 보고 발광하기 시작한다.

“참. 세상이 말세가 된 게 맞군.”

용사가 자신의 사위라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

마왕성 하펠론은 마기의 결정체다.

곳곳마다 힘과 격이 깃든 마기가 탑의 공간을 흐르고 있고 그 안의 마수들은 어지간한 고위신을 능가한다.

마왕성 내부는 하나의 거대한 다른 세계라 봐도 무방한 것이다.

본래라면 과거의 나처럼 하나씩 치열하게 싸우며 올라가야 했지만.

“안녕하세요~”

“...인간.”

“지나간다. 가라. 공주님 명.”

“지나가십시오.”

악마는 길을 자연스레 터주었다.

우리 쪽에 악마족의 이인자이자 공주, 마왕의 딸인 하페루아가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악마나 마족도 우리를 막을 수 없다.

“오! 드디어 결전의 날입니까?”

그렇게 80층 가까이 오르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최상위 악마.

혼돈의 악마, 레비아.

적색의 날개를 가진 그는 뒤이어 올라오는 인원들을 보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이제는 숨기지도 않으시니. 참으로 재밌을 따름입니다.”

“마왕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80층부터는 그가 직접 다른 탑을 안내해 주었다.

마왕성의 뛰어난 고급품과 장식들, 역대 용사들의 무기들이 벽면에 아무렇지도 않게 걸려 있다.

일반적인 유저인 용사가 왔다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상황이었지만 이미 수많은 무기를 본 우리 길드원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레비아는 재미없다는 듯 99층의 문 코앞에서 멈춰 섰다.

“그전에. 공주님과 용사님. 두 분만 들어가시고 남은 분들은 대기 부탁드립니다.”

“왜죠?”

다윤이 날카롭게 묻자 레비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옆방을 가리켰다.

방 너머에는 화려한 탁자와 함께 산해진미가 올려져 있었고…

“님프?”

“어서 오시는 겁니닷…!”

“어서 어서!”

음식을 옮기는 다크 님프들이 뽈뽈뽈 돌아다니며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채림 위에 있는 님프가 다소 경계하지만 그녀의 입에 사탕 한 개를 물려주니 흐헤헤 하며 바로 녹아내렸다.

“두 분은 잠깐 마왕님과 대화하실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얘기지요.”

“그렇다면 저희도 들을게요.”

“상관은 없습니다만 다가올 또 다른 위험에 대한 중요한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듣는 귀는 최대한 줄어드는 게 좋죠.”

“...여기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없어요.”

월광의 빛이 검을 감싸자 레비아는 손을 저었다.

“오해가 있었군요. 누가 배신한다는 소리가 아닌, 보는 이의 문제입니다.”

“맞는 말이다.”

나선 것은 이랑이었다.

벌써 탁자에 앉아 면 요리를 먹고 있는 그녀는 분홍색 눈을 깜빡이며 포크를 집어 든다.

“관리자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해서 우리가 열심히 숨겨도 결국 알아낼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악마의 말대로 듣는 귀는 최대한 줄이는 게 맞아.”

“그렇다냥. 귀는 없어야 좋다냐.”

“넌 그냥 먹을 게 먹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뭉승 소리당냥.”

옴뇸뇸 잘도 먹네.

나는 긴장상태의 다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 위험해지면 바로 부를 테니까 우선 저기 가있어.”

“...네. 조심하세요.”

“그럼. 나 짱 세니까. 마왕 정도는 한방 컷이야.”

나는 과장스럽게 주먹을 나의 가슴팍에 팡팡 치자 다윤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끼이이익…

문이 열린다.

과거의 나는 도달하지 못한 마왕전.

위험하다는 느낌은 사실상 없지만 그래도 기분이 새로운 것은 마찬가지다.

이제 내 눈에는 거대한 애병을 든 채 왕좌에 오만하게 앉아있는 마왕이─

“야! 야! 정말이야?! 근데 왜 말을 안 해!”

“했다! 했다고! 이 망할 것아!”

…저건 또 뭐야.

***

솔직히 조금 기대했다.

하페가 만들어낸 상황 중에서 마왕전에 도달한 경우가 많지만 결국 최종적인 시간대의 나는, 정확히 시즌 1의 나는 마왕전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왕과의 상대를 조금 기대한 부분이 있었다.

용사와 마왕.

두 단어가 주는 가슴속에 울림은 여전하니까.

“하아… 아빠.”

하페루아가 머리를 탁 집는다.

지금 우리의 앞에 보인 것은 검보랏빛 머리가 잔뜩 쥐어뜯긴 마왕과 그 위를 해집고 다니는 푸른 머리칼과 보석 같은 눈을 가진 여자가 있다.

여자는 판타지와 어울리지 않은 현대의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후드티와 돌핀 팬츠는 차마 두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너무 짧았다.

일부로 드러내려 했다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 관심이 없다는 느낌.

동물 앞에서 옷을 벗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엥?”

그제야 여자와 마왕이 우리를 돌아본다.

여자는 잠시 사고 회로가 멈춘 듯 잠시 얼어있다 그제야 큼큼 거리며 허공에서 땅으로 내려온다.

땅에 발을 닿자마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마어마한 신성과 함께 그녀의 묶은 머리가 허리까지 늘어지고 흰색의 나풀거리는 고귀한 옷이 그대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주위를 도는 전능함까지.

그녀는 고귀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어서 오거라… 인간. 마왕성에 온걸. 아니. 여신의 별장에 온걸 환영한다.]

여신?

별장?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대충 하페에게 마왕과 여신은 싸우지 않다는 걸 듣긴 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서로 같이 다니는 건 그렇다 쳐도 저렇게 남의 집을 안방마냥 들락거리다니.

게다가 무슨 20년 지기 소꿉친구처럼 아주 친해보인다.

“뭐하는 겁니까.”

[뭐 하다니. 무슨 소리냐. 나는 여신으로서 마왕을 능멸하고 이곳을 나의 땅으로─]

“장모님?”

푸흡!

마왕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어찌나 웃는지 웃음소리가 시끄럽게 주위를 웅웅 울린다.

여신은 노발대발하며 소리친다.

[무슨 헛소리냐! 나와 제르노스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이 멍청한 것아!]

“근데 왜 둘이 같이 있습니까. 그것도 터울 없이.”

[...그. 원래 뒤, 뒤통수! 뒤통수를 치려고 하는 것이다. 적보다는 아군이 되어 뒤를 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느냐?]

여신은 뻘뻘대며 나를 설득하려 들었지만 내가 들어먹을 기세를 안 보이자 에이 씨발 하며 복장을 다시 한번 바꾼다.

이전에 그 남사스러운 복장.

여신은 대충 만들어둔 소파에 드러누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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