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설 속의 몬스터가 되었다-37화 (37/407)

〈 37화 〉 #21 던전에서 꼬리잡기 (3)

[구마준(인간)] → [구마준(키메라)]

랫 맨의 연성과는 달랐다. 랫 맨은 자신이 만들어낸 연성된 몬스터와 인간을 섞어 키메라를 만들어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키메라.'

유전학에서 키메라는 하나의 생물체 안에 서로 다른 유전 형질이 존재하는 경우를 뜻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연성이 아니라 어떤 물질에 의해 키메라가 되어 가고 있었고.

'집어 삼켜지고 있어.'

이미 그 형태조차 남아있지 않고, 점차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간다. 구마준이었던 존재는 곧 조금도 남지 않고 모조리 잠식당하게 될 터.

"무슨…"

두 눈을 부릅뜬 박요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존재를 올려다본다. 어느샌가 그는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뒷걸음질 치면서.

'도망치는 게 맞아.'

박요한의 판단은 옳았다.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저런 것과 싸운다는 것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불합리했다.

'저 상태에선 절대 돌아올 수 없어.'

넘어선 안 될 강은 진작에 넘었다.

살덩이는 끝을 모르고 치솟다가, 흐물흐물 흘러내렸다. 설령 탕아들이 직접 오더라도 이미 되돌릴 수 없다. 즉, 내가 구마준을 굳이 죽여야 할 이유 또한 사라졌다는 뜻이다.

'…탕아들에게 내 존재가 알려질 일은 없게 됐으니까.'

그 잠깐의 사이, 살점의 괴물이 마치 용암처럼 사방을 집어삼키고, 탐하기 시작했다. 부근의 모든 생명체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키메라)]

[체장 …] [체고 …] [체중 …]

[힘 …] [민첩 …] [체력 …] [마력 0]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염탐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지금의 구마준, 아니 저 존재만큼은 읽기 어려웠다.

'미치겠네.'

원래 [부수적인 성과의 미완성품]의 효과가 저 정도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성장하는 속도가 비정상적이었다.

'원래라면 내가 처치할 수 있었을 텐데.'

염탐이 보여주는 스테이터스는 돌아가는 룰렛처럼, 빠르게 실시간으로 변한다. 특히 체력이 괴이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체력 500오버. 그런데도 끝을 모르고 올라간다.

'…지금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E등급 염탐으로는 읽기조차 힘든 상대. 겨우 약물 하나 마셨다고 저런 상태가 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저것의 정체를 알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엘릭서(Elixir).'

연금술의 종착점, 불로불사의 약, 현자의 돌, 신의 피 같은 셀 수 없이 많은 별명으로 불리는 전설의 묘약. 탕아들은 모종의 이유로 바로 그 엘릭서를 만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부수적인 성과].'

[이단의 탕아들]은 만능의 묘약인 엘릭서를 만들기 위해 정말 많은 시도를 했다. 알려진 수백 가지의 방법을 시도했고, 알려지지 않은 수천 가지의 방법에 실패했다.

하지만 전혀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집착은 결국 엘릭서에 한없이 가까우나 엘릭서는 아닌 [부수적인 성과]를 만들어냈다.

'모조 엘릭서(Imitation Elixir).'

모조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그 효능은 기적이라 부를 만했다. 어떤 상처라도 어떤 상태라도 회복시키는 이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거기서 그들은 생각했다.

'더 뛰어난 모조 엘릭서라면 엘릭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었다.

모조 엘릭서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결함이 있었으니.

심지어 모조 엘릭서조차 만들 수 없었다. 어째선지 그와 비슷한 '미완성품'만 계속해 탄생했다. 그것이 구마준이 마신 [부수적인 성과의 미완성품]의 정체였다.

"끄아아아악!"

달아나던 박요한이 잡혀 살점의 늪으로 끌려갔다. 원래라면 도망칠 수 있었겠지만, 지친 상태라 미처 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 살려어어억!"

삼켜지는 그를 보며 나는 고민했다.

'살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방금까지 싸웠던 상대. 구해줄 이유는… 이유는….

그걸 생각하는 동안 다시 살점이 일렁이듯 불어나, 결국 박요한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

암이라는 것은 세포가 계속 분열하는 증상.

그리고 [부수적인 성과의 미완성품] 또한 마찬가지로 상처를 치료, 재생하기 위해 끝없이 세포를 분열시킨다.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암과는 달리 한계가 없다는 점이겠지.

세포가 무한히 분열한다는 것은, 무한히 거대해진다는 뜻이었다.

'그것뿐이라면 문제 없겠지만.'

정말 문제인 건 저것에 담긴 '악의'였다.

모든 걸 탐욕스레 집어삼키려는 악의. 촉수를 피해 밟은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를 섭취했습니다. 경험치와 포만감이 상승합니다]

단순히 세포 분열을 하는 거라면 키메라라고 부르지는 않을 터.

'거기에 섞여 있는 것들.'

지네. 잉어. 참새. 고양이. 고블린. 트롤 그리고 인간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의 형질을 섞는다면, 그건 신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 발상에서 시작해 존재하는 모든 종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종의 생명의 정수를 모은 것. 그게 모조 엘릭서의 정체였다.

당연, 깃든 정수는 욕망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해 악의를 품는다. 그 악의의 결정체가 모조 엘릭서에 섞여든 것이― [부수적인 성과의 미완성품]

"끄으으윽!"

순간, 빨려 들어간 박요한의 손이 잠깐 빠져나왔다. 이유를 찾지도 못했는데, 망설이지 않고 질풍을 일으켰다. 살점의 촉수가 혐오스럽고 기괴한 움직임으로 막아선다. 촉수는 채찍이 되었고, 나도 마찬가지로 촉수를 뻗어냈다.

[촉수 다발(E) Lv.5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촉수 다발(E) Lv.5 -> 촉수 다발(E) Lv.6]

"크르르―"

촉수에 휘감긴 촉수. 탄력을 받아 박요한을 향해 뛰어올랐다.

'……!'

그러자 살점은 벽을 만들었다. 벽에 부딪혀 내려앉은 나를 집어삼키기 위해 살점이 출렁였다.

'윽!'

마치 늪처럼. 빨려들기 전에 잿불이 불태웠다. 살덩이를 타고 오르며 여기선 쓰지 않기로 맘 먹었던 스킬을 사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 정도 높이라면!'

바람을 두른 다리가 검게 물들어간다. 잿불은 질풍을 먹어 치우고 검은 화염으로 타올랐다. 걸음 발자국마다 낙인이 찍히듯, 검은 화상이 살점을 익혀 갔다.

"―――!"

살덩이는 소리 없이 아우성치며 몸을 비틀었다. 덩치라는 건 그 자체만으로 폭력이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살덩이가 고통에 몸을 비틀자, 지진이 일어난 듯한 착각을 느껴야 했다.

'떨어질 뻔했다.'

괴로워하는 살덩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게끔 조심하며 아까 박요한이 있었던 자리를 파헤쳤다. 발톱에 살점이 끼었지만, 그것조차 악식이 먹어 치운다. 순식간에 깊은 구덩이를 파내고, 박요한의 소맷자락을 물었다.

"크와아악!"

체력이 300에 달하는 박요한이었기에 간신히 견디고 있는 거지 진작에 먹혀도 이상하지 않을 터.

끼기긱― 찌직! 너무 쉽게 소매가 찢겨나갔다.

"으, 으어어억!"

공포와 황망함에 물든 박요한의 얼굴이 눈물범벅으로 물들었다. 제발 구해달라는 간절한 눈빛에.

'씹…'

그의 손목을 물었다. 뼈가 드러날 것처럼 이빨이 깊게 파고들자, 박요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으,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그대로 박요한을 저 아래로 던졌다.

"주, 주여어어어어어!"

추락하는 동안 몇 번이나 부딪힌 살덩이가 쿠션이 되었다.

'…두 번은 못 구해주니까, 제발 잡히지 마라.'

집어삼킨 먹이를 빼앗긴 살덩이는 본능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녀석에게서 비롯된 모든 촉수들이 내게 집중된다.

'아오. 등신같이…'

박요한은 신전의 인물이니까 구하는 게 나중을 위해서다― 뒤늦게 그런 식으로 합리화시켜봤지만, 당연히 개소리였다. 그냥 내가 멍청해서 그런 거지. 스스로 한심함을 느끼며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했다.

'이제 나만 도망치면 되는데.'

그게 쉬울까? 실시간으로 상승하는 살덩이의 민첩은 300에 달했고 힘은 400을 초과하고 있었다.

'…좆같네.'

비운의 히로인도 아니고 저딴 빡빡머리 아저씨를 살리고 대신 죽을 수는 없지. 나는 [획득 가능 스킬 목록]을 열었다.

[남은 스킬 포인트 7]

필요한 건 속도. 그리고 힘이었다.

[돌파(D) Lv.1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돌진의 상위호환 스킬. 구마준이 가지고 있던 가속도 좋은 스킬이었지만, 순간적인 속도보다 벽을 뚫을 추진력이 필요했다.

[돌진(E) Lv.5이 돌파(D) Lv.1에 통합되었습니다]

[돌파(D) Lv.1의 숙련도가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돌파(D) Lv.1 -> 돌파(D) Lv.3]

'3레벨 돌파.'

이거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던 건 곧 확신으로 변했다.

[질풍(D) Lv.3과 돌파(D) Lv.3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질풍(D)과 돌파(D)가 합쳐져 돌풍(C) Lv.3으로 변합니다!]

[남은 스킬 포인트 3]

'……!'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최초로 C등급의 스킬 돌풍을 얻은 순간, 바람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돌풍에 휘날린 잿불이 살점을 불살랐다.

'잿불이 돌풍을 집어삼키질 못하는구나.'

C와 D. 고작 한 등급 차이였지만 이전과는 반대로 돌풍이 잿불을 밀어낸다.

더는 벽은 벽이 아니게 됐다. 가로막은 벽은 모두 돌풍의 풍압을 견디지 못하고 찢겨나갔다. 손쉽게 뚫고 나와 바닥에 안착했다.

'도망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나는 녀석을 죽일 수 없다. ―살덩이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신전? 신전이 이 녀석을 막을 수 있을까?'

주교가 직접 온 거라면 모르겠지만. 땅을 내리찍던 성기사의 망치도 살더미에겐 안마하는 정도에 불과하리라. 하물며 내 잿불에 타올랐던 상처는 이미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이 자식을 죽이는 데 필요한 건.'

수많은 공격이 아니라, 강력한 한 방. 안타깝게도 그 화력이 내게는 없다.

'물러나자.'

박요한은 구했고 이 살덩이 괴물과 싸울 이유는 없어졌으니까― 살점은 늑대를 쫓았지만, 돌풍을 두른 늑대를 잡을 수는 없었다.

"――!"

분노에 차 악의를 발하는 살덩이. 그리고, 늑대의 꼬리를 쫓던 이들은.

***

"이건 또 뭐야? 진짜 별의별…"

홍유리는 불쾌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기껏 거리를 좁혔다 싶었더니, 있어야 할 늑대는 없고 웬 살덩어리가 출렁이고 있었다. 끔찍한 안구 테러였다.

"이거 몬스터는 맞습니까?"

"나도 본 적 없거든?"

"…어쩌시겠습니까?"

"아 몰라. 어차피 몬스터는 가능한 안 건드리기로 했잖아? 저딴 거랑 싸우기도…"

싫다. 라고 말하려다가 다가온 촉수를 쳐낸 홍유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씨발?"

"부팀장님? 저희 임무는 어디까지나."

쳐낸 건 좋았지만, 피와 살점이 튀고 말았다. 홍유리는 무표정하게 닦아내고, 닦아낸 손바닥을 털었다.

"어. 알아."

비록 손발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홍유리는 임무를 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책임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딱 거기까지만.

"부팀장님!"

한 번 더, 살덩이가 홍유리를 공격했을 때.

"……."

선홍색이던 그녀의 눈동자가 짙어져 갔다.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닫고 우택은 이마를 짚었다.

'휴우.'

뚝, 하는 소리는 환청이었을까? 혹 누군가의 인내심이 끊어지는 소리는 아니었을까.

"―넌 뒈졌어."

안 그래도 벌레와 몬스터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던 참에 훌륭하게 홍유리의 뚜껑을 열어버렸다.

"…적당히 해주십시오. 제발."

"금방 죽이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홍유리의 뒷모습을 보던 그의 눈이 살덩이를 타고 뛰어다니는 늑대를 포착했다. 바람을 두른 듯, 늑대의 주변이 일렁였다. 검은 화염을 흩뿌리는 늑대는 살덩이를 농락하고 있었다.

'잘 싸우는데.'

아마 알파겠지. 스컬 울프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보통의 스컬 울프보다 작은 거로 보아 우월 종은 아닌 것 같지만.

'대체 스킬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는 거지?'

검은 화염도, 일렁이는 바람도 모두 늑대의 스킬일 터. 거기에 포식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것만 해도 셋이었다. 몬스터가 이렇게까지 스킬을 가진 경우는 굉장히 드문데.

"사, 살려! 도와주십시오!"

손목을 감싸 쥔 빡빡머리 몽크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뛰어오자 우택이 그를 진정시켰다.

"신전 분입니까? 진정하시죠. 무슨 일입니까? 저건 대체 뭐고요?"

피가 흘러나오는 손목을 지혈해주며 우택이 자초지종을 묻자 몽크는 미친 듯 고개를 휘저었다.

"모, 모르겠습니다. 신자님께서, 신자님께서 갑자기 저! 아아아. 그것보다 도망을!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완전히 패닉 상태였다. 어차피 살덩이는 홍유리가 알아서 처리할 터. 우택은 일단 그를 먼저 피신시키기로 했다.

'아마 휘말린 사람인 것 같은데…'

던전에 들어오는 조건 중 하나가 휘말린 사람들의 구조였다. 그리고 얼마 멀리 가지 않아 우택은 신전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다.

"오, 그쪽은…?"

"새벽의 여명 수색 3팀. 전우택입니다. 뒤늦게 들어왔으니 전달받지 못하셨겠지만, 여명도 던전에 입장했습니다."

흰 투구의 팔라딘이 우택을 위아래로 훑더니 납득했다는 듯 끄덕였다.

"그렇구려. 언뜻 봐도 단련된 몸. 과연 여명의 일원이라 할만하오. 나는 성대운이라 합니다."

밖에는 신전 사람들이 깔려 있을 터, 설마하니 그가 박요한을 이렇게 만들었다고는 처음부터 생각지도 않았다. 손을 마주 잡아 악수 한 두 사람은 덩치를 불려가는 살덩이를 보았다.

"그래서 저건 대체 뭐요? 우리 형제가 이렇게 된 것과 관련이 있소?"

"그런 것 같습니다. 저도 방금 발견했을 뿐이지만요."

"흠… 알겠소."

어느새 살덩이는 독보적인 크기를 이뤘다. 높게 쌓은 탑처럼. 주변의 수목들조차 범접하지 못할 만큼 몸집을 불렸다. 부팀장님은?

'설마 당했나?'

그리고, 살덩이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지.'

그 불기둥을 보고 우택은 안심했다. 하기야, 이런 던전에서 당하기엔 그녀가 가진 마력이 너무 규격 외였으니까.

***

"……!"

언젠가 느껴봤던 끔찍한 마력. 시야가 붉게 변하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살덩이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살덩이로부터 탈출하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나도 휘말렸을 터. 나는 마력의 근원지를 찾았고, 거기에 있는 건 적발 적안의 소녀였다.

'홍유리? 대체 왜 여기에?'

홍유리 또한 나를 눈치챈 모양인지 시선을 맞춰 입 모양으로 말했다.

'……!'

눈이 삔 게 아니라면 "너도 뒤졌어." 분명 그렇게 말했다.

쭈뼛 돋아오른 소름. 홍유리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아직 그녀와 싸우는 건 요원했다. 살덩이 괴물은 홍유리가 처치할 테니 얼른 자리를 뜨자.

'여태 쫓아오고 있었다니.'

미친년. 미친년. 미친년!

붉은 마력은 현상을 발하더니, 거대한 불기둥으로 화했다.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 살덩이 괴물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괴물 같은 년!'

굉음과 함께 지면이 울리는 와중에 홍유리는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네 차례야."

그녀의 손이 움직인다. 그 움직임에 맞춰 붉은 마력도 넘실거리며 다가온다. 침을 꿀꺽 삼키며, 돌풍을 두르려 하는데.

"――!"

붉은 마력이 급히 선회했다. 놈의 체력은 어느새 500을 돌파해 600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 촌각 동안 잿더미가 된 몸을 재생하고 홍유리를 덮친 것이다. 과연 엘릭서의 모조품다운 회복력이었다.

'…저걸 홍유리가 이길 수 있나?'

지금 당장은 그녀가 유리하겠지만, 마력은 무한하지 않다. 제아무리 강대한 마력이라도 언젠가는 바닥날 터.

'어쨌든 지금이 기회야.'

괴물들은 괴물들끼리 싸우라지. 그 과정에서 서로 죽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다.

"후우. 너 거기서 딱 기다려."

'너 같음 기다리겠냐?'

늑대가 도망치는 가운데, 두 괴물이 본격적으로 치고 박기 시작했다.

***

얼룩 점박이 고기를 뜯어 먹던 거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좀 쉬려고 했더니."

수십 km는 떨어져 있음에도 거한의 눈에는 모든 것이 똑똑히 보였다.

"흠."

붉은 마력과 살점 촉수들이 마구 부딪쳤다. 시종일관 유리한 건 홍유리의 마력이었으나, 무한하진 않을 터. 마력이 바닥나기 전에 살덩이를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 승부는 그것으로 결정지어질 것이다.

'음. 50 대 50?'

거한조차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보통이라면 도와주러 달려가겠지만.

"알아서 하겠지. 뭐."

그러기엔 얼룩 점박이 고기가 너무 맛있었다.

***

"아, 씨발."

상황은 시종일관 홍유리에게 유리했다. 살점 촉수는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전부 타올랐으니. 그러나 홍유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다 재생해버리잖아.'

재생계 스킬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대체 이 덩어리가 뭐길래… 늑대도 다 잡은 거였는데 이 씹새끼 때문에 놓친 걸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진짜… 짜증 나네."

던전에는 형태가 있다. 예를 들어 코발트 광산은 동굴과 미궁의 복합형. 이현공원의 이 던전은 숲의 단일형. 보통 던전의 테마에 따라서 몬스터가 출현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이 살덩이만큼은 그 어떤 던전에서도 비슷한 것조차 본 적 없었다.

괴물(怪物)을 넘어 이형(異形)의 존재. 이런 몬스터가 존재했다고?

마치, 만들어진 것처럼 이질적이다.

'만들어져?'

그제야 홍유리는 떠올렸다. 자신이 부산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무엇을 보았는지를.

'아, 그러니까. 그 좆같은 새끼들이 만든 거다?'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다는 추측에 불과했지만, 너무 공교로웠다. 누가 봐도 자연 발생한 몬스터는 아닌 것처럼 보였으니까. 실패한 실험체… 하수도에서 봤던 연구 기록들. 이 모든 게 우연일까? 만약 인체 연성과 관련이 있는 거라면?

"좋아."

강한 마력이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렸다. 마법의 행사가 아니라 마력이 행사한 물리력으로 공중으로 부유하는 홍유리. 터무니없는 마력이 만들어낸 기적이었지만, 지성이 없는 살덩이는 그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살덩이는 홍유리를 유린하기 위해 넘실거렸다.

"―제대로 죽여줄게."

두둥실 떠오른 그녀의 눈동자가 심홍을 넘어 진홍빛으로 물들어갔다.

***

"어… 3팀장님? 알파 추적은요?"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상황이 변했습니다. 저것부터 어떻게 해야겠죠."

끝없이 크기를 부풀려가는 살더미. 처음엔 수목에 가려있었지만, 이제는 그 수목의 배는 거대해졌다. 10층 높이의 아파트가 살점으로 뒤덮여 움직이는 듯했다.

"어차피 알파도… 망할."

아주 잠깐 마력 감지를 스쳐 지나간 기척. 십중팔구 알파이리라. 팀장은 이를 갈았다.

'저건 쫓아도 잡기 힘들겠는데.'

기차와 비견될 속도다. 굳이 무리한다면 잡을 수는 있겠지만, 당장 급한 건 늑대가 아니라 살덩이였다.

"늑대는 어차피 나가지 못합니다. 나가봤자 신전 사람들이 깔려있을 테니. 하지만 저건…"

만약 저것이 던전 밖으로 나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대구가 유령 도시가 되는 걸 보고 싶습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차라리 저희 팀장님을 불러오죠?"

"…그 양반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혼자 찾는다고 진짜 찾고 있겠습니까? 아마 근처에서 농땡이 피우고 있을걸요?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전 먼저 가세할 테니."

팀장의 모습이 저 멀리 사라지자, 성훈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냥 특수종 늑대나 보러 온 거였는데 갑자기 뭔가 터무니없는 일에 휘말리고 말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한시라도 빨리 2팀장을 찾아야 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왠지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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